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26화 (26/218)

< 폭풍전야 (1) >

드라마 고양이 수호령에 등장하는 동시통역사라는 배역.

그리고 미래에서 얻은 이송하가 동시통역사를 연기했었다는 정보.

이게 우연일 수 있을까?

우연이라면 그건 그것대로 소름 끼친다. 친구1, 2도 아니고 동시통역사라는 배역이 드라마마다 하나씩 있는 건 아니잖아.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절대 우연이 아닌데.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 또 뭔가 이상해진다.

내가 먼저 본 미래에서 고양이 수호령은 분명히 놓친 물고기였단 말이야.

W&U도 섭외 때문에 연락을 받았었는데 사정 때문에 고사했다고, 홍보팀 직원들이 그걸 낚았어야 했다고 아쉬워했으니까. 이송하가 그 배역을 잡아서 호연을 펼쳤다면 홍보팀 직원들이 분명 그걸 언급했었겠지.

그럼 그 미래에서 이송하는 고양이 수호령과 인연이 없었다는 건데…….

그날 밤에 봤던 다른 미래에서는 또 이송하가 동시통역사 연기를 아주 잘했다고 했지. 이송하의 재발견이었다고. 그렇다는 건 거기서는 이송하가 고양이 수호령에 캐스팅돼서 드라마에 참여했다는 거잖아.

이거 그럼…… 미래가 바뀐 건가?

내가 이송하한테 연기를 해보지 않겠느냐고 해서?

잠깐. 생각해보자.

내가 처음에 봤던 미래, 박국장과 송기자가 등장하는 이십여 년 후의 미래는 분명 고정된 미래였다. 내가 현재를 바꿔도 그 미래는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평행우주 같은 개념이라고 생각했던 거고.

그런데 이번에는 왜 미래가 바뀐 거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분명 차이는 있다. 고정된 미래는 모든 걸 선명하게 보고 느낄 수 있고, 중간중간 끊어지긴 했지만 연결해보면 박국장과 송기자와의 인터뷰가 쭉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바뀐 미래, 그러니까 노이즈가 가득 낀 접속 불량 미래는 비교적 가까운 미래를 보여주고 있다. 상황이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시간대, 장소, 등장하는 사람도 들쭉날쭉하다.

언제든 변할 수 있는 유동적인 미래라서 접속 불량인 것처럼 보였던 건가?

“아…… 미치겠네.”

내 행동으로 미래가 바뀌었다는 것을 직접 확인하니까, 솔직히 겁도 난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주 높은 확률로, 20년 후의 나는 매니지먼트사의 대표가 된다.

칠전팔기 끝에 올라간 위치라고 했으니 젊었을 때 고생은 많이 하겠지. 송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아직 갈 길이 더 멀다고 말했으니까 이룬 것에 만족하지 않고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고.

하지만 지금의 내가 보기엔 그건 성공한 미래다.

내가 아무것도 바꾸지 않으면, 그 미래는 내 것이 되겠지.

그런데…… 그럴 수 있을까?

지금 당장 내 손에는 몇 달 후에 대박이 날 드라마 시놉시스가 들려있는데? 얼마 뒤면 성도원이 누군가의 수작질 때문에 추잡한 섹스스캔들이 휘말린다는 것과 거기서 뭔가 반전이 생긴다는 것까지 알고 있는데?

나에게만 주어진, 내 인생에 엄청난 기회가 될지도 모르는 정보들을 모르는 일인 척 무시하고 20년 후의 미래만 바라보고 살 수 있을까?

그건 자신 없다.

나는 이미 배신자에게 뒤통수 맞을 뻔한 미래를 바꿨지만 후회하지 않으니까. 어떻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그 상황을 방관했다면 배신자가 복덩이 소리를 듣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을 거 아냐. 그럼 난 지금쯤 화병 나서 드러누워 있을걸?

나는 아주 오랫동안 고민하고 일어섰다.

이렇게 된 거, 겁먹지 말고 한 번 해보자.

미래 예지 능력이 나를 어디까지 도와줄지는 모르겠지만…… 어디 한 번 내 손으로 더 좋은 미래를 개척해보자.

그날 이후.

나는 내가 지금 알고 있는 정보를 조합해서 나올 수 있는 최선의 결과를 생각해봤다. 성도원의 일은 저번 이후로 더 정보를 얻지 못하고 있어서, 당연히 넵튠 애들이 그 대상이었다.

순조롭게 넥스트 K스타로 인지도를 높인 뒤 다음 앨범으로 음악방송에서 1위를 하게 하는 것. 그리고 이송하를 고양이 수호령의 동시통역사 배역에 캐스팅 되게 하는 것.

이게 지금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래서 나는 더 적극적으로 이송하를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넵튠이야 뭐 넥스트 K스타의 미션 준비도 철저하게 하고 있고, 지금 당장은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없지만 이송하는 다르니까.

물론 고양이 수호령에 캐스팅되지 못하더라도 이송하 본인은 그런 기회가 있었는지도 모르고 넘어가겠지만, 내가 아까워서 못 견딜 것 같다.

오늘은 반드시 결판을 내자.

양손에 간식을 들고 회사로 갔다. 오늘은 스케줄이 하나도 없는 날이라 넵튠 멤버들은 회사 지하 연습실에 모여서 연습을 하고 있다. 문을 열고 둘러보자 전면거울 앞에서 땀 흘리며 안무를 맞추는 애들이 보인다.

그런데 셋뿐이다. 이송하는 어디 갔지?

“어? 오빠 오늘 쉬는 거 아니었어요?”

눈치 빠른 임서영이 제일 먼저 나를 발견했다.

“맞아. 지나가다가 잠깐 들렀어.”

“진짜요?”

당연히 거짓말이지. 쉬는 날 회사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미친놈이 어딨어.

내가 황금 같은 휴일에 회사에 온 건 마음이 급해서다. 고양이 수호령이 캐스팅 오디션을 시작하기 전에 이송하를 설득해야 하니까.

“간식 사왔으니까 먹고들 해.”

들고 있던 걸 모두 넘겨줬다. 봉투 하나만 빼고.

“그건 뭔데요?”

“이건 송하 주려고 사온 거. 송하는 어디 갔어?”

“화장실이요. 왜요? 또 연기 얘기 하시려구요?”

“그렇지 뭐.”

“송하 걔도 고집 장난 아니지만 오빠도 대단하시네요. 현조 오빠는 몇 번 설득해 보다가 접었는데.”

김현조도 내가 본 걸 봤으면 도시락 싸들고 쫓아다니면서 설득했을걸?

어쨌든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 눈에는 내가 끈질긴 놈으로 보일만도 하지.

연습을 멈추고 다가온 이태희가 바닥에 털썩 앉더니 입을 연다.

“원래 배우팀 지원하셨었다고 들었어요.”

“어?”

“조사해봤더니 면접 보실 때 배우팀 지원하셨다고 하던데요.”

뭘 해봤다고?

나도 놀랐지만, 임서영과 엘제이도 휘둥그레진 눈으로 날 쳐다본다.

이태희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말한다.

“죄송해요. 세상에 이상한 사람들이 많잖아요. 매일같이 붙어 다녀야 하니까 걱정돼서 조금 알아본 거예요. 예전에 저희 벗은 사진 몰래 찍으려고 했던 사람도 있었거든요.”

“그런 미친…….”

“그러니까요. 그런데…… 혹시 그것 때문에 송하 연기 시키려고 하시는 거예요? 배우 담당하고 싶으셔서?”

뭐?

“그건 아니야. 만약에 송하가 연기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고 하면 강요 안 해. 다시는 얘기 안 꺼낼 거야.”

가장 중요한 건 이송하 본인의 마음이니까.

아예 배우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한다면, 대박 드라마 캐스팅도 이송하한테는 기회가 아닌 거잖아.

“송하 연기 레슨받을 때 많이 힘들어했어요.”

이태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직접 본건 아닌데, 선생님한테 심하게 혼나면서 배우는 것 같더라구요.”

혼나면서 배웠다고?

엘제이와 임서영도 한마디씩 거든다.

“걔 그때 스트레스 많이 받았어요.”

“맞아요. 보컬 트레이닝이나 안무 연습할 때도 트레이너 선생님들한테 엄청 혼났는데 걔 기죽는 거 한 번도 못 봤거든요. 기운 없어도 밥 먹고 나면 금방 원래대로 돌아오는 앤데, 연기 레슨받을 때는 보기 딱할 정도였어요. 걔가 그러는 거 처음 봤다니까요.”

“스트레스 쌓이는 건 풀어야 하니까 밤마다 야식 3인분씩 먹으면서 혼자 우울해 하더니 결국 그만두더라구요.”

“처음에 연기 레슨 시작할 땐 기대 많이 했었던 거 같은데…….”

애가 연기 레슨받다가 트라우마가 생겼나?

그래서 내가 연기 얘기만 꺼내도 슬금슬금 도망갔던 건가?

나와 눈을 마주한 이태희가 묵직한 어조로 말한다.

“말씀하신 대로 송하가 정말 하기 싫다고 하면 억지로 시키려고 하지는 마세요.”

“당연하지.”

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만약에, 본인이 연기를 못한다고 생각해서 안 하려는 거면 너무 안타까워서 그래. 내가 보기에는 송하 연기 잘하는 거 같아서.”

“……너는 어때?”

이태희가 내 뒤를 쳐다보며 묻는다.

“연기 다시 해보고 싶어? 아니면 하기 싫어?”

황급히 돌아보니 반쯤 열린 문 사이에 이송하가 서 있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뭔가 말하려는 듯 복잡한 표정을 짓던 이송하가 머리를 긁적이며 내 옆에 앉는다.

도망치기만 하더니 드디어 뭔가 말할 준비가 된 건가?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는데 이송하가 내가 들고 있는 봉투를 본다.

“무슨 냄새예요?”

“어? 이거? 찹쌀호떡인데 니가 좋아할 것 같아서 샀어. 줄까?”

“주세요.”

봉투째 넘겨줬다. 그리고 이송하가 호떡을 먹는 동안 잠자코 기다렸다. 도중에 옆구리가 터진 호떡에서 설탕물이 질질 흐르길래 물티슈를 주긴 했지만.

“이걸로 닦아.”

“아…… 감사합니다.”

“거기 손목도.”

“네.”

“턱에도 묻었잖아.”

“네.”

이게 아니지! 조카들한테 하던 것처럼 벅벅 닦아줄 뻔 했네.

잠시 후 깨끗해진 이송하가 입을 열었다.

“진짜 제가 연기를 잘하는 거 같으세요?”

“난 그렇게 생각해.”

“저 같은 애는 절대 배우하면 안 된다고 했어요.”

뭐라고?

“아이돌 출신 배우들이 그 꼬리표 떼려고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는데, 저처럼 연기는 못하고 내세울 게 얼굴밖에 없는 애가 배우 한다고 나서면 다시 그런 선배들 욕먹게 하는 거라고… 그리고 가능성 있는 다른 신인배우들 기회만 뺏는 거라고 얼씬도 하지 말라고 해서 레슨 그만뒀어요.”

“……레슨 선생님이 그렇게 말했어?”

이송하가 고개를 끄덕인다.

어처구니가 없다. 절대 배우 하면 안 된다고, 얼씬도 하지 말라고 했다고? 저런 말을 들으면 연기에 정떨어질 만도 하지! 선생이라는 사람이 어린애 하나를 완전히 뭉개놓은 거 아냐?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지?

“송하야. 진짜 그랬어?”

“그 사람 뭐야? 말을 왜 그딴 식으로 해?”

“이 답답아! 너는 우리 앞에선 막말도 잘하는 애가 그런 소리를 듣고만 있었어? 왜 우리한테 얘기 안 했어?!”

다른 애들도 화가 나서 씩씩거린다. 이송하는 뭔가 아직 말하지 않은 게 있는지 다른 애들 시선을 피하고 있고.

나는 벌떡 일어났다.

“잠깐 나갔다 올게.”

사무실로 올라가서 레슨 선생의 연락처를 알아낸 다음, 이송하한테 왜 그런 말을 한 건지 물어봐야겠다.

4층을 누르고 올라가는데 엘리베이터가 1층에서 멈춘다. 그리고 회사 안에서 한두 번씩 얼굴을 마주쳤던 사람들이 올라탄다. 엄청 심각한 표정들을 하고서.

무슨 일이지?

턱수염이 있는 중년 남자가 누굴 다그친다.

“성도원이 걔는 왜 안 와? 지금 어디래?”

“화보 찍던 중이어서….”

“지금 화보가 문제야?!”

“올스톱하고 달려오는 중이래요. 곧 도착한대요.”

“성도원한테 확인해 봤어? 어디까지 진짜래?”

“그게….”

“잠깐.”

턱수염이 구석에 있는 나를 힐끔 본다.

“올라가서 얘기해. 성도원한테도 바로 올라오라고 하고.”

엘리베이터가 4층에 도착했다. 내가 내리자 엘리베이터는 다시 올라간다.

대표실이 있는 6층까지.

그걸 보고 직감했다.

일이 터졌구나.

< 폭풍전야 (1) > 끝

ⓒ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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