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24화 (24/218)

< 너 연기해라 (2) >

윽! 생각을 하고 말했어야 했는데.

내 뇌가 렉 걸린 것처럼 멈춰 있는 동안 이송하가 땀을 닦으며 대답한다.

“저 연기 못해요.”

“뭐? 왜 못해? 못할 게 뭐 있어?”

W&U도 그쪽을 더 밀어줄 수 있을 텐데?

“연기를 못해요.”

“어?”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해요.”

“왜? 연기를 왜 못해?”

“왜 못하냐고 물으시면…… 그냥 못하는데요.”

“아니, 너 연기 잘……!”

말하다가 움찔 놀랐다.

이송하를 보니 이미 나를 이상한 놈처럼 보고 있다. 정신 차리자. 미래랑 현재를 헷갈리면 안 되지. 미래에서는 이송하가 연기를 잘했다느니, 이송하의 재발견이었다느니 했지만, 지금은 아닐 수도 있잖아.

그럼 뭐가 어떻게 되는 거지?

지금부터 뭘 어떻게 해야 그런 미래가 오는 걸까?

가수로서의 앞날이 불투명하니까 연기를 시작하나? 아닌데. 연기를 못한다고 하는 걸 보면 이미 연기를 시도해보기는 한 것 같다.

뭐 때문인지 연기하는 거에 대해 안 좋은 인식이 박힌 것 같고. 연기라는 단어를 말할 때마다 표정이 굳고, 무엇보다 연기를 못한다고 말할 때의 어조가 너무 확고했지.

그럼 원래는 발연기였는데 피나는 연습을 해서 실력이 일취월장하나?

뒤늦게 몰랐던 재능이 꽃피는 대기만성형 스타일인가?

“연기 제대로 배운 적 있어? 누가 너보고 연기 못 한다고 했어? 혹시 나한테 한번 보여줄…….”

나는 다다다다 묻다가 말끝을 흐렸다. 좀 전부터 이송하가 내 눈치를 보면서 슬금슬금 짐을 챙기고 있다. 두툼한 패딩을 입고, 가방도 메고. 그리고 멍하니 쳐다보는 나한테 다가와 꾸벅 인사한다.

“저 들어갈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어?”

그리고 바람처럼 사라진다.

……뭐야. 쟤 지금 도망간 거야?

결국, 나는 고민하느라 밤을 하얗게 새웠다.

이송하는 왜 연기를 하라는 말에 그렇게 안 좋은 반응을 보였을까?

그리고 미래에서 본 이송하의 오디션 영상.

사실 당시에는 그냥 넘어갔는데, 침대에 누워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이상하다.

제목도 모르고, 감독도 모르고, 무슨 배역인지도 모르는 비공개 오디션? 국내에서도 그런 방식으로 오디션을 보나? 얼마나 비밀스러운 작품이길래? 게다가 직접 얼굴을 맞대는 게 아니라 영상으로 오디션을 봐?

대체 왜?

생각할수록 자꾸 의심의 방향이 한 곳으로 좁혀진다.

시나리오를 무슨 군사 기밀이라도 되는 것처럼 엄격하게 관리하는 시스템. 유창한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서 연기하던 이송하. 동시통역사 연기를 우연히 본 캐스팅 디렉터가 리스트에 넣은 덕분에 오디션에 참가할 기회를 얻게 됐다…… 고 한다면 혹시 할리…….

아니야. 정신 차려, 미친놈아.

흥분해서 지금 너무 멀리까지 가고 있다. 거기가 어디 옆 동네야?

국내에서 십 년, 이십 년 동안 연기를 해온 베테랑들도 쉽게 엄두 내지 못하는 곳인데. W&U에서도 끊임없이 문을 두드리며 단역, 조연, 가리지 않고 배우들을 밀어 넣으려 애쓰지만, 아직도 깨진 항아리에 물 붓기나 다름없는 게 현실인데.

그런데 이송하가?

에라이, 잠꼬대 그만하자. 잠도 안 잤는데.

나는 마른세수를 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오늘의 하루는 이미 시작됐다.

넥스트 K스타 효과인지 오늘은 공중파 음악방송에 출연한다. 화면에 예쁘게 나오도록 풀 메이크업을 하고 가려면 또 새벽부터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뭐, 달 보고 나가서 달 보고 들어오는 건 이제 익숙하다.

애들을 데리러 가는 차 안에서 김현조에게 벼르던 것을 물었다.

“실장님. 송하 말인데요.”

“어.”

“혹시 연기레슨 받았어요?”

김현조가 숙취 해소 드링크를 원샷하고 대꾸한다.

“걔 비주얼을 생각해 봐. 어디 가서 밀리는 비주얼이야?”

“아니죠.”

“그런데 연기시킬 생각을 안 했겠어?”

“그럼…….”

“당연히 개인 레슨 받았지.”

역시 받았구나.

“욕먹을 정도만 아니면 공중파 주말드라마 조연으로 넣으려고 알아보고 있었는데, 신이 한 사람한테 다 주진 않나 보더라고. 송하는 연기에 재능 없대.”

“누가요?”

“누구긴. 레슨 선생님이지. 그분이 우리 회사 애들 여럿 봐 준 분이거든. 보라, 수란이, 채영이도 그 선생님한테 배웠고. 그래서 송하도 보내봤는데, 애가 얼굴은 너무 예쁜데 그걸로도 커버가 안 될 정도로 연기를 못 한다고 그러시더라고. 송하도 레슨 받고 난 다음부터는 연기는 안 하겠다고 말했고.”

“의외네요. 뮤직비디오 같은 거 보면 연기도 잘할 것 같았는데.”

“뮤직비디오는 대사가 없으니까. 나도 아쉬워서 더 설득해보려고 했는데 씨도 안 먹히더라. 그쪽으론 관심이 뚝 떨어진 것 같아.”

하긴 어제도 연기 얘기 꺼내자마자 도망쳤지.

그런데 미래의 이송하는 분명 연기를 하고 있었단 말이야…… 그것도 잘. 그럼 앞으로 심경의 변화를 느낄만한 일이 생긴다는 건가?

어쨌든 이 문제는 좀 더 알아보자. 코앞에 닥친 일부터 끝내고.

숙소에서 애들을 픽업해서 샵에 들렀다가, 또 한참을 달려 여의도 방송국에 도착했다. 그래도 Knet보다는 출근 시간이 좀 늦어서 바깥은 환하게 밝아진 지 오래다.

“어? 넵튠이다.”

“누구?”

“넵튠. 내 본진이랑 같이 넥스트 K스타 나와.”

연예기사에 많이 노출된 덕분에 지난번보다는 알아보는 사람들이 늘었다. 사진 찍는 사람들도. 아직 붙들려서 사인을 부탁받는 일까진 없지만, 음악방송 1위를 하고 나면 그런 일도 생기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한참 동안 다른 그룹 팬들에게 인사를 하고 방송국 안으로 들어갔다. 음악방송 대기실 크기는 Knet이나 여기나 비슷하다. 대기실에서 대기밖에 할 게 없는 것도 비슷하고.

오늘은 지난번의 경험을 거울삼아 준비한 게 많다. 빵빵하게 채운 핸드폰 보조 배터리. 부족할까 봐 충전기까지 가져왔다.

그리고 수면안대도. 첫날은 긴장과 흥분 때문에 한숨도 못 잤지만, 매니저가 된 지 며칠 만에 나는 쪽잠의 달인이 됐다. 이젠 장소가 어디든 자려고만 하면 얼마든지 잠들 수 있다. 살아남기 위해 진화했다고나 할까.

선배 가수들이 다 도착해서 인사를 돌아야 할 때가 되자, 임서영이 이송하의 뒷덜미를 붙잡는다. 그리고 샵에서부터 하고, 또 하고, 또 한 얘기를 다시 꺼낸다.

“이송하. 고정예능 생겼다고 괜히 목에 힘주고 그러면 큰일 난다? 금방 뒷말 나오니까. 알지?”

“알아.”

“넌 가만 있으면 뚱한 표정이니까 의식하면서 웃어. 알았지?”

“알아… 온종일 잔소리…….”

이송하가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리자 임서영의 눈초리가 가늘어진다.

“지금은 우리가 다 같이 다니지만 넥스트 K스타 잘되면 개인 스케줄도 생길 거 아냐. 불안해서 너 혼자 보내겠니? 너 다른 사람들이랑 있을 때도 이러면 어린 게 버릇없다고 맨날 혼나고, 울고…….”

저 레퍼토리는 나도 외우겠다.

이송하는 임서영의 잔소리에서 벗어나는 걸 포기했는지 멍하니 듣고 있다. 이태희와 엘제이는 잔소리가 시작되자마자 멀찍이 자리를 피했고. BGM처럼 들리던 임서영의 잔소리는 다른 가수의 대기실에 들어간 후에야 멈췄다.

대기실을 차례차례 돌면서 인사하고, 우리에게 인사하러 오는 신인 가수들과 매니저들도 웃으면서 상대했다. 고정 예능 하나 잡은 후라서 애들도 신인 걸그룹을 대할 때 조금이지만 여유가 생겼다. 왠지 좀 뿌듯하다.

이미 한번 겪어 본 스케줄이라 시간은 물 흐르듯 잔잔하게 흘러갔다. 나와 배신자를 유심히 지켜보던 김현조는 다음부턴 자기는 느지막이 얼굴만 비쳐도 되겠다며 좋아했다.

점심까지 푹 쉬다가 12시가 넘어서 간식을 사러 나갔다. 오늘도 운전은 배신자가 했기 때문에, 간식 셔틀은 내 몫이다. 이제는 애들 간식 취향도 꿰고 있어서 순식간에 골라 다시 방송국으로 들어온 참인데…….

저건 뭐야?

대기실 복도로 들어가는 코너 쪽에 임서영과 이송하, 그리고 슈가캣 멤버 세 명이 모여있다. 몇 번 찜찜하게 부딪치고 나니 이제 슈가캣 멤버들이 우리 애들하고 같이 있는 걸 보면 불안하다. 언젠가 한 번 터질까 봐.

거리가 가까워지자 목소리가 들린다.

“센터는 거의 송하가 서지?”

“송하 비중이 조금 높긴 한데, 우린 네 명이라 거의 비슷비슷해.”

“솔직히 춤은 넵튠 멤버들 중에서는 네가 제일 낫고, 노래는 태희 언니가 잘하잖아. 랩이야 엘제이 실력 좋은 거 다 알고. 언니들 제치고 센터 서려면 송하도 노력 많이 해야겠다. 팀 구멍인데 얼굴로 센터 선다고 욕먹으면 어떡하니.”

쟤 지금 이송하가 멤버들 중에 노래도 제일 못하고 춤도 못 추고 랩도 못하면서 얼굴로 센터 선다고 비꼬는 거 맞지?

나는 반쯤 뛰다시피 걸었다. 오늘도 지난번처럼 가식적인 인사나 하고 헤어질 줄 알았는데, 주변에 지켜보는 눈도 없고 카메라도 없어서 그런지 말 속에 뼈가 있다. 숨겨진 것도 아니고 날카롭게 튀어나온 뼈가.

아무래도 바쁜 척하고 애들 데려가는 게 낫겠다.

거의 도착했는데, 임서영이 웃으면서 말한다.

“걱정 마. 얘 연습 엄청 많이 해. 우리는 금방 따라잡힐까 봐 걱정인데?”

“와. 니네 팀 멤버들 진짜 착하다. 우린 옛날에 기분 좀 그랬는데.”

“어?”

“니가 우리 센터였을 때, 우리는 기분 좀 그랬다고.”

< 너 연기해라 (2) > 끝

ⓒ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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