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23화 (23/218)

< 너 연기해라 (1) >

박팀장은 선뜻 홍주미 작가의 시놉시스를 구해주겠다고 했고, 나는 절대로 시놉시스를 외부에 유출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때부터 계속 시놉시스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닌다.

회의하는 동안에도, 행사대행사 직원과 저녁을 먹고 폭탄주를 말아 마시는 동안에도 계속.

틈틈이 인터넷으로 홍주미 작가에 대해서 좀 알아봤는데 정보가 거의 없다. 나이는 삼십 대 중반. 기혼. 필명으로 로맨스 소설을 두 권 출간했고, 드라마 작가로서는 완전히 신인이다.

이 사람이 데뷔작으로 대박을 터뜨린단 말이지?

그럼 이번 드라마가 끝나고 나면 몸값이 엄청나게 올라가겠지. 신인 작가라는 이유로 캐스팅에 난항을 겪는 것도 지금뿐일 거다.

그러니까 지금이 두 번 없을 기회라는 건 확실한데.

내가 담당하는 연예인이 배우였다면, 그랬다면 당장 그 작품의 오디션 일정부터 알아봤을 거다. 그런데 없다. 대박이 터질 거라는 걸 뻔히 아는데도 거기 밀어 넣을 내 배우가 없구나.

내 배우…… 라고 하니까 갑자기 성도원이 떠오른다.

성도원한데 말을 꺼내 볼까?

눈을 번쩍 떴다가 3초 만에 고개를 내저었다. 말도 안 되니까. 성도원이 뭐가 아쉬워서 신인 작가 작품을, 그것도 케이블 드라마를 하겠어. 공중파에서 회당 출연료 7천을 주고 같이 하자고 매달리는 탑급 배운데.

W&U에 내가 얘기해 볼 만한 신인 배우가 있을까?

5층 복도에서 봤던 화보 사진들을 떠올리다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이건 아니다.

지금 나는 넵튠 매니전데, 다른 배우를 찾아가서 시놉시스를 보여주고 같이 해보자고 할 수는 없잖아. 그 사람들도 다 자기 담당 매니저가 있을 텐데.

남의 밥그릇 건드린다고 얻어맞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나 같아도 더럽게 기분 나쁘겠다.

그럼 담당 매니저가 없는 배우, 그러니까 W&U 소속이 아닌 배우지망생을 찾아봐야 하나? 그런데 내가 W&U 소속이니 밖에서 다른 배우와 접촉하는 게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고, 가능하다고 해도 너무 막막하다. 미래 예지능력이 친절하게 오디션에 철썩 붙을만한 배우지망생 신상정보를 알려주지 않는 이상. 무엇보다, 나는 그런 일을 추진할 만한 여유가 없다.

지금도 집에 못 들어가고 회사 수면실에 누워 있는 판인데, 뭐.

물론 위층 침대에는 배신자가, 건너편에는 김현조가 기절해 있다.

드르륵.

진동과 함께 핸드폰이 번쩍거린다. 확인해 보니 형이 보낸 톡이다.

맞다, 오늘 형한테 전화하기로 했었는데 깜빡했네.

-통화 괜찮아?

그새 누군가 빛을 보았는지 뒤척이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얼른 신발을 신고 수면실을 빠져나왔다. 어으…… 아직 술기운이 남아있어서 움직일 때마다 골이 댕댕 울린다.

썰렁한 복도에 서서 전화를 걸자 몇 번 만에 수신음이 끊어진다.

-어. 아직도 일하는 중이야?

“자려고 누운 참이었어. 일 다 끝나고 전화하려고 했는데 깜빡했어, 미안. 나 때문에 지금까지 못 잔 거야?”

시간은 벌써 새벽 1시가 넘었다. 나한테는 이제 깨어있는 게 당연한 시간이지만, 형은 12시 땡 하면 자는 사람인데.

-괜찮아. 나도 책 보다가 시간 가는 줄 몰랐어. 넌 집이야?

“회사야.”

-서울에 있는 건 맞지? 멀리 지방으로 팔려간 거 아니지?

“매일매일 청담동이랑 상암동만 왔다 갔다 하고 있어. 지금은 넵튠 애들 계속 따라다녀야 해서 여유가 없는 거고, 좀 지나면 배신, 아니, 같이 일하는 애랑 나랑 나눠서 할 거니까 숨통이 트일 거야.”

-그래. 그때는 집에 좀 와라. 애들도 너 목 빠지게 기다려.

“애들 얼굴 본 지 정말 오래됐네. 이틀에 한 번씩 보다가.”

-각오 단단히 하고 와. 너한테 궁금한 것도 많은 거 같더라. 너 오면 기자회견해야 될지도 몰라.

핸드폰을 붙들고 한참 동안 웃었다. 그놈들이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단 말이지? 날 기다리는 건지 다른 뭔가를 기다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낮에 홍보팀에 갔을 때 좀 민망하더라도 블랙아웃 싸인 씨디 같은 거 얻을 수 있나 물어볼 걸 그랬나.

-요즘 애들한테 연예인 매니저는 대통령이나 수퍼히어로랑 동급인가 봐.

웃음이 쏙 들어갔다. 술도 확 깼다.

수퍼히어로라는 말에 갑자기 내 초능력이 생각나서.

-쉬어야 할 텐데 이만 끊자. 옷 따듯하게 입고 다니고. 너 별일은 없지?

뭐라고 말해야 할지 정리도 안 되는, 그런 말이 목까지 올라왔는데 그만뒀다. 결국에 입 밖으로 나온 건 평소와 같은 농담이다.

“별일 많지. 매일매일 다이나믹해.”

-하하. 그건 너랑 잘 안 어울리는데.

“옛날의 내가 아니거든. 내 인생이 판타지 블록버스터로 바뀐 게 언젠데.”

이건 농담이 아니고 진짜로.

-하하하. 그건 좀 재밌겠다.

형이 낮게 웃는 소리가 들린다.

가만히 듣고 있다보니, 내 입가에도 점점 웃음이 번진다.

미래 예지 능력이 갑자기 내 인생에 끼어든 것도 벌써 며칠 전 일이다. 처음엔 멘붕이었지만, 그 뒤로는 나한테 큰 도움을 주는 능력이 반가웠다. 아무도 모르는, 어쩌면 유일할지도 모르는 특별한 능력을 얻었다는 사실이 나를 흥분시키기도 했고.

하지만 마음 어딘가에는 여전히 비현실적인 일에 휘말린 것에 대한 불안감이 남아있었나 보다.

뭘 털어놓은 것도 아닌데, 그냥 이렇게 대화하고 웃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있다. 갑자기 비현실에 휘말리긴 했지만 그래도 나한테는 여전히 내 삶과 가족이 있다는 사실이 든든하다.

형과 통화를 끝내고 사무실로 갔다. 술이 깨서 그런지 계속 갈증이 난다.

종이컵에 정수기 물을 가득 따라 마시고 빠른 걸음으로 수면실로 돌아갔다. 티셔츠만 입고 나왔더니 너무 춥다. 벌써 이러면 겨울엔 어떡하지. 핫팩을 대량 구매해놔야 하나?

으으, 얼른 따듯한 이불 속으로 들어가서 눈 좀 붙여야겠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핸드폰이 다시 진동한다.

-오빠, 늦게 죄송해요. 아직 회사예요?

임서영이 보낸 톡이다.

-어. 왜?

-송하 아직도 안 들어왔어요. 전화도 안 받아요. 연습실에 있는지 한번 살펴봐주심 안 돼요? 걱정돼서 잠을 못 자겠어요. ㅠㅅㅠ

-알았어. 가서 확인해볼게.

-엉엉 감사합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에 있는 연습실로 내려갔다. 이송하가 늦게까지 연습실에 남아있는 건 드문 일도 아니다. 내가 본 것만 몇 번이니까. 처음엔 새벽에 머리 풀고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는 거 보고 간 떨어질 뻔했다.

넵튠 애들은 모두 연습량이 많은 편이지만 이송하는 그중에서도 연습에 가장 많은 시간을 쏟아붓는 멤버다.

오늘도 역시 연습실에 불이 켜져 있다.

똑똑.

몇 번 두드려도 대답이 없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전면거울 앞에서 시원시원하게 움직이는 이송하가 보인다. 넵튠의 타이틀 곡에 맞춰 안무연습과 노래연습을 하는 중이다. 얼마나 오래 했는지 등까지 축축하다.

나는 문을 닫고 잠시 이송하를 지켜봤다.

거울에 비치는 몸짓과 표정을.

처음 봤을 때도 생각한 거지만 이송하는 단순히 예쁘기만 한 게 아니다.

타고 난 건지, 알고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정말 매력적인 뭔가가 있다.

“어, 깜짝이야.”

내가 멍하니 보는 사이에 노래가 끝났나 보다. 내 쪽으로 돌아선 이송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굳어있다.

“언제 오셨어요?”

“지금. 서영이가 너 연락 안 된다고 걱정하더라.”

“아…… 이렇게 늦었는지 몰랐어요.”

핸드폰을 보고 놀란 이송하가 꾹꾹 문자를 보낸다.

“저 한 시간만 더 하고 갈게요. 먼저 들어가세요.”

“스케줄 때문에 해 뜨기 전에 일어나야 되잖아. 체력 괜찮겠어?”

“괜찮아요. 저는 쓰는 만큼 먹잖아요.”

끼니마다 먹방을 찍는 이유가 있었구나.

“혼자 새벽까지 남아서 고생한다.”

“……걱정돼서요.”

“뭐가?”

“저 때문에 질 수도 있잖아요.”

“지다니…… 아. 넥스트 K스타 미션?”

“네.”

목소리에서 걱정이 느껴진다.

팀 미션 때문에 저렇게 연습하는 거였구나.

지켜보면서 안타깝다고 느낀 게, 이송하는 노래연습을 엄청나게 하는데도 이태희보다 못하고, 안무연습도 엄청나게 하는데 임서영보다 못하다. 그래서 포지션이 서브보컬이고 서브댄서인 거지. 랩은 뭐,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애들에 비해서 실력이 떨어진다는 걸 본인도 알 거다. 그러니까 혼자 남아 연습하는 거고.

자기가 팀에 폐를 끼친다고 생각하니까.

상대적으로 봤을 때 실력이 부족한데도 이송하는 안무에서 센터에 서는 부분이 가장 많다. 뮤직비디오에서도 얼굴이 가장 많이 비친다. 어깨가 무거울 만도 하지.

김현조는 단순히 얼굴이 제일 예쁘니까 그림이 좋아서 많이 노출되는 거라고 하는데, 내 생각은 좀 다르다. 니가 뭘 아냐는 말을 들을 것 같아서 얘기는 못 했지만.

그냥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송하는 연기가 좋다.

3분 40초짜리 짧은 곡에도 당연히 스토리가 있다. 넵튠의 이번 타이틀 곡은 나를 사랑하는 남자와 내가 사랑하는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는 스토리다. 가사에도 혼란스러운 심정이 잘 담겨있고.

다른 애들은 노래를 잘하고 춤을 잘 추지만, 뛰어난 가창력과 댄스 실력이 그 감정까지 전달해주지는 못한다. 그 애들도 감정 전달을 위해 노력하는 것 같은데 항상 2프로가 아쉽다.

그런데 이송하는 가사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그대로 전달한다. 오로지 표정과 목소리만으로. 크게 노력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다.

그러니까 3분 40초, 아니, 이송하가 부르는 단 몇십 초를 듣는 동안은 확 몰입하게 된다. 당연히 가사도 귀에 쏙쏙 박히고.

나는 그게 아주 대단한 거라고 생각하는데.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부족한 부분만 채찍질하는 것 같아서, 그게 좀 안타깝다.

아무리 생각해도 쟤는 배우를 해야 하는데…….

나는 이송하를 쳐다보다가 생각하고 있던 걸 불쑥 꺼내놓았다.

“송하야.”

“네?”

“너 연기 해보고 싶은 생각은 없어?”

어라?

전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미래로 왔다.

나는 서둘러 주변에 보이는 것들을 파악했다. 이번에도 역시 노이즈가 가득한 접속 불량 미래. 미래의 나는 베이지색 테이블 의자에 앉아서 노트북 영상을 보는 중이다.

테이블이 되게 익숙한데…… 아, 여기 회사 회의실이네.

영상에 담긴 사람은 이송하다. 나이는 지금이랑 비슷해 보이고. 헤어스타일은 다르다. 검은 생머리인 건 똑같은데 지금보다 조금 더 길다. 눈썰미가 없으면 못 알아볼 차이긴 하지만,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애들 겉모습을 꼼꼼하게 기억해뒀지.

머리가 저만큼 길어지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지? 아니, 더 길었다가 자른 걸 수도 있으니까 저걸로 시기를 알아내기는 어렵겠다.

그런데 이송하는 대체 뭘 하는 거지?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집중했다. 영상 속에서 이송하는 혼자 움직이며 말하고 있다. 잡음 때문에 정확하게 알아듣지는 못하겠는데,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서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쟤 혹시…… 연기하는 건가?

“다 된 거예요?”

뒤에서 누가 묻는다. 누구지?

미래의 나는 뒷사람을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한다.

“네. 보내기만 하면 돼요.”

“그런데 그쪽에선 대체 이송하를 어떻게 알고 시나리오를 보낸 거예요?”

시나리오를 보냈다고?

그럼 쟤 정말 연기하는 거야? 이거 오디션 영상인가?

“송하가 동시통역사 연기한 걸, 그쪽 캐스팅 디렉터가 우연히 보고 리스트에 넣었나 봐요.”

“아하… 그거 연기 하나는 정말 잘했죠. 이송하의 재발견이었으니까.”

역시!

이럴 줄 알았지. 내 생각이 맞았다.

이송하는 배우를 하면 잘할 것 같았다고.

흥분을 억누르며 정보를 머리에 쑤셔 넣었다. 동시통역사 연기, 캐스팅 디렉터가 우연히 보고 리스트에 넣었다.

뒷사람이 내 어깨에 묵직한 팔을 걸친다.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그런데 이거 어떤 작품인지는 진짜 모르는 거예요?”

“진짜 몰라요. 제목도 모르고, 감독도 모르고. 무슨 배역인지도 몰라요. 완전히 비공개 오디션이에요. 정체가 뭔지 저도 궁금해요.”

“헐…….”

“송하가 최종 오디션까지 올라가면…… 그때는 알게 되겠죠.”

“연기요?”

정신을 차려보니 다시 연습실.

눈앞에서 이송하가 뚱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필터를 거치지도 않은 말이 튀어 나갔다.

“어. 너 연기해라.”

< 너 연기해라 (1) > 끝

ⓒ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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