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드라마가 대박 날 드라마인가 (1) >
나는 시놉시스 두 개를 번갈아 봤다. 여기서 타이밍 좋게 딱! 미래 예지 능력이 나와주진 않겠지?
몇 장 훑어봤는데 역시 반응이 없다. 젠장. 능력 발현이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게 너무 안타깝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서 조실장에게 물었다.
“두 개 다 읽어보고 말씀드려도 되죠?”
“하하, 이놈 자신만만하네. 부담 없이 찍어보라고 해도 지가 찍은 거 망할까 봐 한번은 빼기 마련인데…… 그래. 앉아서 봐. 우리도 대표님이랑 약속 있어서 한 시간은 여기 있을 거니까.”
바로 의자에 앉아서 시놉시스를 펼쳤다.
먼저 ‘타임슬립’.
연쇄 살인마를 쫓다가 살해당한 프로파일러가 1년 전으로 타임슬립하면서 벌어지는 액션 스릴러.
여주인공은 강력계 형사. 역할은 남주인공의 사이드킥에 가깝다. 러브라인은 희미하지만, 능동적이고 천재적인 캐릭터라서 시놉만 보면 굉장히 매력적이다.
그리고 ‘뭍으로 나온 인어공주’는 인기 웹툰 원작의 로맨틱코미디.
멋진 왕자님을 찾으러 나온 인어공주가 성격 까칠한 재벌 2세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뻔하지만 여전히 잘 먹히는 스토리다.
무엇보다 손채영이 연기할 여주인공 캐릭터가 입체적이고 사랑스럽다.
사랑하는 왕자를 다치게 할 수 없어서 물거품이 되는 것을 선택한 안데르센 동화의 인어공주와는 달리, 드라마 여주인공은 남자주인공을 가지려고 스토킹까지 불사하는 저돌적인 백치미 캐릭터다.
일단 시놉시스만 봤을 때는 두 개 다 땡긴다. 시놉에 엄청 공을 들였다.
이 시놉가지고 투자받고, 섭외하고 다 해야 하니까 과대 포장은 좀 했겠지만, 작가나 감독이 흥행작을 몇 개나 가진 사람들이니까 용두사미가 될 걱정은 안 해도 될 거고.
시놉대로만 뽑히면 못해도 중박은 칠 것 같다.
문제는 둘 다 괜찮다는 거지.
타임슬립은 젊은 층을 공략해서 개념드라마, 웰메이드 드라마 소리를 들은 것 같은 스타일. 이런 건 솔직히 내용만 좋으면 시청률이 기대보다 조금 못하더라도 배우 필모그래피에 흠이 되진 않는다.
뭍으로 나온 인어공주는 삼십 대, 사십 대까지 폭넓은 시청자층에게 어필 할 수 있는 스타일. 게다가 로맨틱 코미디 장르인 만큼 여주인공 원탑 드라마라는 장점도 있고. 원작 웹툰이 인기작이니까 화제성도 높을 거고.
손채영이랑 조실장이 고민하는 이유를 알겠다. 두 개를 다 할 수가 없으니 꼭 하나를 골라야 하는데, 그 선택이 정말 어렵다.
둘 중에 뭐가 더 잘 될까?
“어때요? 딱 꽂히는 게 있어요?”
손채영이 선글라스를 벗으며 묻는다.
갈색 눈과 마주친 순간 세상이 흔들렸다.
미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또 다른 미래다. 박국장과 송기자가 있는 선명한 미래가 아니라, 성도원을 봤던 때처럼 노이즈가 가득한 접속 불량 미래.
시야가 어지러운 만큼 어느 때보다도 더 집중해서 살폈다.
여긴 어디지? 지금 어디 와 있는 거지?
미래의 나는 젓가락질을 하고 있다. 입안과 목이 뜨끈뜨끈하다. 오케이, 밥 먹는 중이고. 흐릿하긴 하지만 식탁 위에 냅킨과 상호명이 적힌 칼국수 그릇, 반찬, 물컵이 보인다.
식당이구나.
앞자리에는 남녀 한 쌍이 앉아서 나와 함께 칼국수를 먹고 있다.
어라?
낯익은 얼굴인데…… 홍보팀 젊은 직원들이다. 워낙 사교적인 사람들이라 지금도 회의할 때 틈틈이 근황을 주고받긴 하지만, 아직 이 멤버로 밥을 먹어본 적은 없는데.
여직원의 헤어스타일이 내가 아는 거랑 비슷하다. 먼 미래는 아닌가?
상의는 두 직원 모두 긴팔 티셔츠. 의자 뒤에 걸어놓은 겉옷은 두껍지 않은 코트. 가을 아니면 봄인 것 같은데.
지금 입기엔 얇으니까 내년 봄? 내년 가을?
아, 눈알 빠지겠네. 매직아이 그림 보는 느낌이다.
핸드폰 화면이라도 보면 몇 월 며칠인지 정도는 알 수 있을 텐데, 미래의 나는 칼국수 그릇을 쳐다보고 젓가락질만 하고 있다. 이 와중에 칼국수는 되게 맛있다.
“졸려 죽겠어요, 잠도 못 자고 이게 뭐야.”
홍보팀 여직원의 짜증스러운 목소리. 내가 고개를 들고 묻는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손채영이 자꾸 들들 볶잖아요. 파워블로거가 드라마 말아먹었다고 비평했다고 그거 내려달라고 징징, 2016년 1분기 드라마 결산 기사에서 자기 거 워스트 드라마로 뽑았다고 그거 내려달라고 또 징징. 이거 지워달라, 쟤는 고소해라…… 홍보팀이 신이야? 그게 우리 마음대로 되냐구요. 내가 그걸 다 할 수 있으면 왜 여기서 일하겠어요. 청와대로 가지.”
손채영 이번 드라마 망하는구나!
2016년 1분기 드라마면 타이밍이 딱 맞는다. 지금 계약하고 겨울에 찍으면 내년 1분기 안에 드라마가 종영할 테니까.
뭘 골랐길래 망했지? 두 개 다 대박은 못 쳐도 쪽박 찰 건 아니었는데.
“드라마가 망해서 사람들이 망했다고 하는 걸 무슨 수로 막냐구요.”
남직원이 젓가락을 탁 내려놓으며 덧붙인다.
“내 말이. 적당히 망했어야 우리가 어떻게 포장이라도 좀 할 거 아냐. 최저시청률 3프로짜리 드라마를 어떻게 포장해?”
뭐? 3프로?!
케이블과 종편 채널들이 다양성을 앞세운 드라마들을 제작하면서 공중파 드라마의 시청률이 확 내려가긴 했다. 요즘에는 20프로를 넘기면 대박, 10프로만 넘겨도 아쉬운 대로 중박은 쳤다고 평가하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런 세상이 됐다고 해도 공중파 시청률 3프로는 좀…….
아니, 그러니까 두 개 중 뭐냐고!
피가 마른다. 이러다가 뚝 끊겨버리면 진짜…….
“시놉만 봤을 땐 참 괜찮았는데. 선우씨도 보셨잖아요?”
“저도 시놉만 봤을 때는 최소 중박이라고 생각했었어요.”
맞다. 두 개 다 최소 중박이라고 생각했지.
여직원이 한숨을 쉬며 말한다.
“대본도 처음엔 괜찮게 뽑았어요. 3화까지는 시청률이 상승세였고. 원작 골수팬들 때문에 말아먹은 거죠.”
원작!
긴장이 탁 풀린다. 원작이 있는 쪽이라면 뭍으로 나온 인어공주다.
“원작 팬들이 원작을 못 살렸네, 별로네 하면서 하도 갑질을 해대니까. 제작사랑 작감이 그 의견들 다 반영하겠다고 대본 세 번 갈아엎고 나서 산 탄 거지. 뚝심으로 밀고 갔어야 하는데 골수팬들 의견에 너무 휘둘렸어.”
“작가 멘탈이 가루가 됐더라. 원작 팬들한테 협박 메일도 받았대.”
“어휴…… 이럴 줄 알았으면 이거 말고 다른 드라마 골랐을 텐데.”
그래, 타임슬립을 하라고 해야겠다.
“야. 손채영 인어공주랑 타임슬립이랑 두 개 놓고 고민했잖아.”
“맞다. 그랬지.”
“고민은 왜 한 거야? 이렇게 둘 다 쪽박 찰 거.”
뭐?
“타임슬립도 시작은 좋았는데 참…… 작가랑 감독이 바람만 안 났어도.”
뭐라고?
“그것 때문에 감독 부인이 촬영장 찾아가서 난리 치고, 작감 다 바뀌고, 스릴러 주제에 떡밥 회수는 반도 못하고. 그것도 길이길이 남을 망작이지.”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
두 개 가지고 고민 중인데 둘 다 쪽박이라고?
이렇게 운이 없을 수가 있나? 아니, 일이 이렇게 진행된다면 버린 타임슬립이 대박 나서 배 아픈 것보단 차라리 같이 망하는 게 나은 건가?
미래의 내가 칼국수 국물을 시원하게 들이켠 후에 말한다.
“이래서는 시놉시스만 보고 작품 못 고르겠네요.”
“그렇다니까요. 뚜껑 열어봐야 알아요. 이번에 케이블에서 대박 난 홍주미 작가 작품 보세요. 시놉시스 보고는 다 유치하고 진부하다고 했었잖아요.”
대박 난 작품?
귀가 번쩍 뜨인다. 여직원이 한 말이 머릿속에 못처럼 박혔다.
홍주미 작가, 케이블 작품, 시놉시스를 보고는 다 유치하고 진부하다고 했다.
“그건 진짜 대본이 다 했어. 이래서 드라마는 작가놀음이라니까.”
“덕분에 출연자들은 계 탔잖아. 그게 중국에서까지 대박이 나는 바람에 주조연들 전부 하루아침에 한류스타 됐으니까.”
“신인 작가 작품이라 섭외 난항이라고 기사도 났었는데. 우리도 섭외 때문에 연락받았었잖아. 스케줄 때문에 고사해서 그렇지. 어휴, 그걸 물었어야 했는데…….”
“그게 그렇게 대박 날 줄 알았나? 생각하지 마. 생각하면 배만 아파.”
“대박이라고 생각한 건 쪽박이고, 별로라고 생각한 건 대박이고. 작품 고를 때 이게 대박 날 작품이라고 누가 좀 알려줬으면 좋겠어. 앞으로는 점쟁이한테 가서 골라달라고 해야 하나…….”
“저기요?”
노이즈가 가득하던 세상이 선명해진다.
바로 앞에서 손채영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꽂히는 게 있냐구요. 두 작품 중에.”
나는 손에 들린 시놉시스를 봤다.
타임슬립과 뭍으로 나온 인어공주.
둘 다 쪽박…… 시청률 3프로…….
이걸 어떻게 말해야 내가 덜 미친놈 같아 보일까?
시놉시스가 둘 다 별로라고 하면 내 안목이 별로라는 것만 증명하는 거고. 솔직히 시놉시스는 정말 괜찮으니까. 그리고 그건 나보다 전문가인 저 사람들이 더 잘 알겠지.
예언자라도 된 것처럼 타임슬립은 작가랑 감독이 바람나서 드라마 말아 먹고, 뭍으로 나온 인어공주는 작가가 원작 골수팬들한테 휘말려서 대본을 세 번이나 갈아엎다가 말아 먹게 될 거라고 얘기하는 건, 멀리 봤을 때 나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 같아서 찝찝하다.
그렇다고 망할 걸 뻔히 아는 드라마에 들어가는 걸 그냥 보고만 있기엔, 이 정보도 아깝고, 손채영 연기를 좋아하는 팬으로서 좀 안타깝기도 하고.
나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입을 열었다.
< 어떤 드라마가 대박 날 드라마인가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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