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20화 (20/218)

< 밟지 않으면 밟히는 곳 (3) >

답답한 게 어느 정도 가라앉고 나자, 나는 지금 이 상황이 흥미롭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성도원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은밀히 판을 짜고 있을 누군가.

그리고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성도원과 W&U.

곧 전쟁 씬이 시작될 것 같은 영화를 턱 괴고 엎드려서 관람하는 기분이랄까? 그 전쟁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는지까지 아는 상태로.

물론 가장 흥미로운 포인트는, 영화관람과는 달리 이건 내가 직접 끼어들 수 있다는 거지.

일단은 사건이 시작될 때까지는 조용히 기다리자. 지금 이런 얘길 어디 가서 떠들어봤자 편집증 있냐는 소리나 들을 테니까.

그리고 미래…… 아까 본 장면의 뒷부분을 꼭 봐야 하는데.

이 사건의 경위를 완벽하게 알 수만 있다면 그건 대단한 가치를 가진 정보가 될 거다. 어쩌면 내가 이 판을 쥐고 흔들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넵튠 일에 집중하자.

생각을 정리하고 인터뷰룸으로 돌아가자 김현조가 반갑게 맞아준다.

“현기증은 좀 괜찮아?”

“이제 괜찮아요.”

“몸이 허하다 싶으면 바로 말해. 보양식 먹여줄게. 너 쓰러지면 안 된다.”

……그날이 올 때까지 살아는 있어야 할 텐데.

“자, 그럼 마지막 질문이에요.”

“네!”

고준태 피디의 말에 칙칙하던 애들 얼굴이 환해진다. 밤새 연습하고도 활력이 넘치던 애들인데, 대체 얼마나 괴롭힌 거야?

“슈가캣 인터뷰하면서 들었는데, 서영 씨가 원래는 슈가캣으로 데뷔할 뻔했다면서요?”

반갑지 않은 주제인지 임서영이 입술을 깨문다.

“아…… 같은 회사 연습생이었어요.”

“슈가캣 멤버들은 서영 씨가 W&U로 간 걸 굉장히 아쉬워하던데?”

“네?”

“물론 그 친구들도 아쉬운 것과는 별개로 이해한다고 했어요. 슈가캣 소속사도 작은 건 아니지만 W&U랑 비교하면 아무래도 좀…… 그렇지. 그런데 그렇게 버리고 떠나온 슈가캣이 지금 넵튠보다 인기가 많은 걸 보면 질투도 나고 그러지 않아요? 그때 결정을 후회해 본 적 없어요?”

오랫동안 같이 고생한 동료들 배신하고 더 큰 회사로 갔는데, 오히려 예전 동료들이 더 잘돼서 질투하는 애. 이런 캐릭터로 몰고 가려는 것 같은데. 그렇게 비쳤다간 방송 나가자마자 줄줄줄 달릴 악플들, 안 봐도 뻔하다.

옆을 보니 김현조가 불안하게 다리를 떨고 있다.

임서영이 침착하려 애쓰며 말한다.

“일단, 버리고 나온 게 아니에요.”

“응?”

“제가 운이 안 좋아서 그런지 연습생 생활을 하면서 데뷔가 몇 번이나 무산됐어요. 슈가캣도 데뷔 못 하고 뿔뿔이 흩어질 것 같다는 얘길 들어서, W&U에서 연락 왔을 때 옮기겠다고 한 거예요. 다른 애들이 슈가캣으로 데뷔했을 때 저도 놀랐어요.”

“아…… 그래요? 그럼 회사랑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있었나?”

“그리고 슈가캣이 인기가 많은 건 부럽고, 진짜로 잘됐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지금 넵튠으로 데뷔한 걸 후회하진 않아요. 태희 언니랑 엘제이, 송하, 멤버들 다 정말 좋아하구요.”

김현조가 손가락으로 OK 사인을 보낸다. 그리고 인터뷰가 끝난 후에 고준태 피디를 붙들고 조심스럽게 편집 얘기를 한다.

“피디님. 서영이 옛날 얘기, 왜곡돼서 나가지 않도록 잘 부탁드립니다.”

“시청률 때문에 과장은 해도 거짓말은 안 합니다. 저 그 정도로 싼마이는 아니에요.”

거짓말은 안 하지만 진실을 다 말하지도 않겠지.

혹시 넵튠이 욕먹는 게 서영이 때문인가……?

미래를 단편적으로 아니까 의심만 자꾸 늘어가는 것 같다.

사전인터뷰가 종료되고, 지난번 회식 때 봤던 막내 작가가 우리를 대기실로 안내했다. 인터뷰하는 사이에 다른 팀들이 도착했는지 복도에 예쁘고 잘생긴 어린애들이 여럿 보인다.

“여기가 넵튠 대기실이에요.”

문 앞에서 멈춘 막내 작가가 슬쩍 눈을 피한다.

문에 붙은 이름이 두 개다. 넵튠님. 그리고 슈가캣님.

이 사람들이 장난하나.

“죄송해요, 대기실이 부족해서…… 오늘 녹화만 같이 쓰실 거예요.”

진짜 대기실이 부족한 거야, 아니면 넵튠이랑 슈가캣을 한 방에 밀어 넣고 싸움을 붙이고 싶은 거야?

“대기실이 부족으면 어쩔 수 없죠.”

김현조가 피곤한 얼굴로 문을 연다.

“안녕하세요!”

“서영아, 안녕!”

응?

지난번 음방 때 봤던 슈가캣 애들이 벌떡벌떡 일어나면서 반긴다.

뭐야, 저 과한 리액션은?

임서영도 놀랐는지 인사하는 타이밍이 늦다.

“어… 안녕, 얘들아.”

“넵튠 합류한다는 기사 보고 우리가 얼마나 좋아했는데. 연락할까 하다가 너 바쁜데 괜히 방해될까 봐 참았어. 앞으론 여기서 자주 보겠다!”

쟤가 슈가캣 리더였지 아마? 이름이 한샛별이었나?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외모에 임서영하고 비슷한 애교 많은 스타일이다.

왜 저렇게 오버를 하나 했더니, 막내 작가가 정답을 알려준다.

“대기실 안에 카메라 설치돼 있으니까 혹시 옷 갈아입으시려면 탈의실로 가세요.”

아하.

“그냥 자연스러운 그림 좀 찍으려는 거니까 카메라 의식 안 하셔도 돼요.”

막내 작가는 애도 안 믿을 소리를 하고 나갔다.

다수의 카메라가 지켜보는 가운데 슈가캣과 넵튠 애들이 한차례 인사를 주고받았다. 겉핥기식으로 근황만 서로 얘기하다가, 다른 팀들이 다 도착하고 난 후에 함께 복도로 나갔다. 녹화 시작하기 전에 다른 팀들하고도 인사해야 하니까.

복도는 이미 인사 나누는 사람들로 시끌시끌하다. 애들이 많아서 마치 학생 캠프 온 느낌이다. 여기서 제일 나이 많은 애가 25살이니까. 최연소는 17살이었던가?

1년에 수십 개씩 쏟아져나오는 아이돌 그룹 중 선택받은 여덟팀.

좋게 말하면 유망주, 기대주지만 그래 봤자 가요계 먹이사슬의 밑바닥에 있는 신인들이다. 인기와 성공에 목마른.

그래선지 애들답지 않은 애들이 많다. 겉으론 웃는 얼굴로 근황도 묻고, 연습이 부족해서 점수 안 나올 것 같다며 엄살도 떨지만, 은연중에 서로를 비교하고, 견제하고, 부러워하고, 무시하고.

전부 고만고만한 신인 그룹들이지만 그 사이에서도 격차는 존재한다.

그 증거로 인지도가 좀 있는 애들, 예를 들어 우리와 함께 나온 슈가캣 주변엔 사람이 바글바글하지만 우린 찬밥신세다. 형식적인 인사만 왔다 갔다 할 뿐, 오래 얘기하려는 사람은 별로 없다.

시간은 부족하고 사람은 많으니까 자기한테 더 도움이 될만한 사람, 좋은 인맥이 될 사람한테 몰리는 거다.

같이 사진을 한 장 찍어 올려도 더 화제가 되고, 나중에 방송에서 친한 사이라고 얘기하면 자기 급도 좀 높아질 것 같은 그런 사람.

즉 뜰 것 같은 사람한테.

게다가 넵튠은 뒤늦게 합류한 거라 무임승차한 애들 취급을 받고 있다. 같은 신인이라도 자기들과 넵튠은 급이 다르다고 생각하는지, 쳐다보는 눈길들이 곱지 않다.

뭐, 충격적이진 않다.

고준태 피디가 아까 읽어줬던 거, 넵튠이 꼴찌가 될 것 같은 이유라고 적어놓은 것들. 그것만 봐도 여기 모인 일곱팀 중 대부분이 넵튠을 안 좋게 생각하고 있다는 거니까.

그래도 머리로 아는 거랑 실제로 겪는 건 달라서 애들도 그렇고 김현조나 배신자도 표정이 안 좋다.

나도 튀지 않으려고 무표정을 하고는 있는데…….

사실대로 말하자면 난 이 상황이 좀 우습다.

넵튠의 다음 앨범이 성공한다는 걸 아니까.

여기 모인 팀들, 인지도 있다고 해봤자 도토리 키재기다.

사전조사했던 걸 기억해보면 음악방송 1위는커녕 후보에도, 아니 후보가 뭐야. 탑 10에도 못 올라가 본 애들이다.

몰랐는데 음악방송 1위가 절대 쉬운 게 아니더라고.

하지만 넵튠은 다음 앨범으로 그 음악방송 1위를 차지할 거다. 그 후에는 더 이상 무명이나 중고신인 같은 수식어를 달 일은 없겠지.

곡 하나 빵 띄우고 나서 소리 없이 사라진 원히트 원더 가수들도 많지만, 미래에서 박국장이 ‘넵튠의 첫 히트곡’이라고 했으니까 분명 두 번째도 있겠지.

어쨌든 쟤들이 줄줄이 음방 1위를 달성하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머지않아 넵튠은 쟤들이랑 더 이상 비슷한 급이 아니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걸 알고 있는 내 입장에선 쟤들 하는 짓이 우습게 보일 수밖에.

쟤들이 넵튠을 무시하고 깔볼수록, 입장이 뒤바뀌고 난 다음 쟤들의 반응이 어떨지가 기대되니까.

“후후후.”

“오빠는 뭐가 그렇게 웃겨요? 나는 지금 적진에 들어온 기분인데.”

임서영이 내 등을 찌르며 속삭인다.

“그냥 좀 재밌어서.”

“뭐가요?”

“사람들 하는 게.”

“…이 오빠 가끔 이상할 때 있다니까.”

답답해 죽을 것 같을 때도 있긴 하지만, 역시 미래 예지 능력은 좋다.

첫 녹화지만 MC들은 오지 않았다. 제작진은 본격적인 미션 시작 전의 첫 만남이라며 아이돌 여덟팀을 무대 위에 밀어 넣었다. 자기소개와 질문시간을 빙자한 기싸움이랄까. 그게 끝난 후에는 또 제작진과의 개별 인터뷰.

계속 긴장하느라 애들도 그렇고 매니저인 우리까지 진이 다 빠졌다.

그리고 첫 미션을 받았다. 노래 단체 미션인데, MC인 현직 솔로 가수, 전직 걸그룹 리더, 현직 프로듀서, 현직 작곡가, 이 네 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팀별로 자신들의 대표곡을 공연하는 거란다.

당연히 MR, 그러니까 반주곡 정도는 틀어줄 줄 알았는데 무반주로 부르라고 해서 모든 팀이 공황상태에 빠졌다. 리듬감, 박자감, 무엇보다 가창력을 정확하게 보기 위해서라나.

리스크가 크지만 잘하면 얻을 수 있는 것도 많은 미션이다. 어쨌든 방송에서 대표곡을 제대로 홍보할 기회니까. 무반주 노래로 시청자들을 만족시키면 음원을 찾아 듣는 사람도 많아질 거다.

대신 망치면 그 곡은 영원히 흑역사로 남게 되겠지.

애들은 첫 녹화가 끝나자마자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회사 연습실에 틀어박혔다. 의욕들이 엄청나다. 저녁도 거르면서 하길래 먹을 것을 좀 사다 줬다.

그리고 다시 사무실로 올라가는 길.

나는 조금 낯익은 얼굴과 아주 잘 아는 얼굴, 두 명과 마주쳤다.

여배우 손채영과, 며칠 전 홍보팀 회의 때 봤던 손채영의 매니저 조실장.

두 사람은 4층 라운지에 앉아있었다. 조실장이 양손에 A4용지 묶음 두 개를 들고 열정적으로 말하고 있고, 손채영은 선글라스를 끼고 지루하다는 듯이 듣고 있다.

진짜 손채영이다. TV와 영화관에서만 봤던 청순함의 대명사, 손채영.

인사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조실장이 손짓한다.

“3팀 복덩이!”

“…저요?”

“그래, 너. 잠깐 얘기 좀 하자.”

내 얼굴에서 인사할까 말까 고민한 티가 났나?

멋쩍은 표정으로 다가갔더니 조실장이 들고 있던 A4 묶음 두 개를 내민다.

뭐지? 꽤 두툼한데.

표지를 보니 제목 같은 게 써있다.

<20부작 미니시리즈-타임슬립>

<16부작 미니시리즈-뭍으로 나온 인어공주>

이거 설마, 드라마 시놉시슨가?

재빨리 받아서 몇 장 넘겨보니 시놉시스가 맞다. 그것도 아직 방송 전인 따끈따끈한 시놉시스. 맨 앞장에는 제목과 연출, 극본의 이름이, 뒷장부터는 자세한 개요와 등장인물 소개, 줄거리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자세히 읽어보고 싶다. 아니, 갖고 싶다.

그런데 이걸 왜 나한테 보여주지?

“하나는 PBS 월화, 하나는 IBC 수목. 방영기간이 겹쳐서 둘 중 하나만 골라야 하는데 두 작품 다 작감 실력도 믿을만하고 출연료도 똑같아. 이거 잘못 골라서 버린 게 시청률 더 잘 나오면 진짜 환장한다. 고를 때 고민되겠지?”

“그렇겠네요.”

그래서 배우와 매니저에게 작품을 보는 안목, 그리고 운이 중요한 거지. 운 나쁘게 대박 작품들을 몇 개나 놓친 배우도 있고, 원래 자기 배역이 아니었는데도 얼떨결에 얻어걸려서 단박에 스타덤에 오른 배우도 있으니까.

어떤 드라마가 대박 날 드라마고 어떤 드라마가 쪽박 찰 드라만지 알 수가 없으니까, 작품 선택 과정에선 고민이 안 될 수가 없겠지.

“그냥 타로카드 점 보는 심정으로 너한테 물어보는 거야. 그러니까 부담 갖지 말고 찍어봐.”

“네?”

“니가 보기에 그 두 작품 중에 뭐가 더 잘될 것 같냐?”

< 밟지 않으면 밟히는 곳 (3) > 끝

ⓒ 장우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