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래와의 조우 (2) >
무서운 장면이라도 본 것처럼 소름이 쫙 끼친다.
미래에서 먼저 본 사람을 현재에서 만나는 거, 진짜 희한한 기분이구나. 뭐라고 해야 될까. TV에서 빠져 나온 사람이랑 마주 보고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
“매니저님은 정….”
“아, 저는 정선웁니다. 아직 명함이 안 나와서 드릴 게 없네요.”
“일 시작하신 지 얼마 안 되셨나 봐요?”
“오늘이 이틀째예요.”
박우정이 깜짝 놀란다.
산전수전 다 겪은 것처럼 묵직하던 박국장과 달리, 눈앞에 있는 이십 대의 박우정은 아직 어설프고 표정 관리도 안 된다.
먹이사슬의 바닥에 있는 것 같은 이 여자가 이십여 년 후에는 박력 넘치는 국장님이 되다니.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정말 모르는 거구나.
“저랑 비슷하네요. 저도 신입이에요.”
“정말요?”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어요. 되게 오래 한 것 같은 느낌이긴 하지만…….”
박우정의 표정은 복잡하고 지쳐 보인다. 하긴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선배란 놈한테 그렇게 까였으니, 내가 박우정의 입장이었다면 지금도 어디 구석에서, 내가 드러워서 출세한다, 시발, 시발, 이러고 있지 않았을까?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기자님. 명함 나오면 제일 먼저 드릴게요.”
“앞으로요…….”
박우정이 망설이다가 말한다.
“전 기자 계속 안 할 거예요.”
“네?”
“때려치우려구요. 못 해먹겠어요. 저랑 안 맞는 거 같기도 하고.”
“……정말이요? 제가 보기엔 기자로 성공하실 것 같은데요.”
진심으로.
박우정은 내 말을 듣자마자 호탕하게 웃는다.
“으하하하! ……큼큼. 빈말이라도 감사해요.”
“빈말 아닌데요. 진짜예요. 할 수 있다면 돈도 걸겠는데…….”
“있잖아요.”
갑자기 박우정이 가까이 붙는다.
“……어차피 저 그만둘 거니까 얘기해드릴게요.”
목소리는 속삭이는 것처럼 작다.
“황선배, 황정구 기자요. 완전 쓰레기예요.”
“네?”
“인터뷰할 때 하나 얘기하면 가지 열 개 쳐서 기사 쓰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아까 인터뷰한 레이지, 아파서 늦은 거 아니에요. 황정구 기자가 시간 잘못 전달해서 늦은 거예요. 제가 인터뷰룸에서 넵튠 인터뷰해야 된다고 했더니 듣보잡 신인보다 레이지가 더 중요하다고 넵튠 그냥 보내라는 거, 제가 K스타 캐스팅된 그룹이라 기사 쓸 거 많다고 간신히 말린거구요. 아까까지만 해도 인터뷰어가 넵튠인지도 몰랐으면서 갑자기 자기가 인터뷰하겠다고 밀고 들어온 거 보면 뻔해요. 레몬걸즈랑 넥스트 K스타랑 엮어서 MSG 잔뜩 쳐서 단독기사 쓸 거예요.”
나는 멍하니 박우정을 바라봤다. 박우정은 쌓인 걸 다 쏟아냈는지 엄청 후련해 보인다.
그러니까…… 황정구 기자가 쓰레기라는 거지?
“W&U야 큰 회사니까 기사 나가고 나서 홍보팀에서 연락 오고 하면 데스크에서 기사 내리라고 할 수도 있죠. 근데 우라까이 기사들 쫙 깔리는 거 순식간이고, 그렇게 되면 W&U 홍보팀이 날고 기어도 수습하기 힘들 걸요. 황정구 기자랑 걸그룹 해피캔디, 포털에 검색해보세요.”
핸드폰을 꺼내서 박우정이 말한 대로 검색해봤다. 황정구 기자가 얼마 전에 쓴 기사가 바로 뜬다. 헤드라인부터 헉, 하게 된다.
[신인 걸그룹 ‘해피캔디’ 제 2의 세라픽 기분 나빠]
해피캔디는 들어본 적도 없는 그룹이고, 세라픽은 대부분의 사람이 알고 있을 10년 차 정상 걸그룹이다. 제 2의 세라픽이라는 말도 눈총을 받을 텐데 기분 나쁘다니…… 무슨 생각으로 이런 어그로를 끌었지?
예상대로 댓글란은 악플 폭격을 맞았다. 황정구 기자를 빼고 다시 검색해보니 황정구 기자의 기사를 살짝만 바꿔서 베낀 기사들도 여러 개 나온다.
“정말로 인터뷰할 때 이렇게 말한 거예요?”
“아니요. 걔들은 황정구 기자가 ‘세라픽 같은 대선배랑 자꾸 비교되니까 기분이 안 좋겠어요.’라고 물으니까 ‘네.’라고 대답한 거예요.”
뉘앙스가 완전히 다르잖아!
“기사 나가고 해피캔디 매니저가 헤드라인 수정해달라고 애걸복걸을 했는데도 무시했어요. 거긴 회사도 작거든요.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뭐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이 다 있어?
혹시 애들이 욕먹게 되는 계기가 이건가?
기사가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보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어쨌든 애들은 지금도 아무것도 모르고 열심히 인터뷰하고 있을 텐데, 김현조한테 얘기하고 대책을 찾아봐야겠다.
아, 먼저 박우정에게 인사부터 하고.
“기자님,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탕비실 정말 죄송했어요.”
“괜찮다니까요. 그럼 다음에 다시 봬요. 아, 그리고 참…….”
고민하다가 말했다.
“혹시 기삿거리 생기면 기자님한테 연락드려도 될까요?”
예를 들면 레몬걸즈 매니저가 앙심을 품고 넵튠 매니저한테 주먹을 휘둘렀다, 이런 거?
“그럼요. 제 번호로 연락… 아니, 저 기자 그만둔다니까요?”
박우정이 눈을 흘긴다. 나는 말없이 웃고 인터뷰룸 방향으로 뛰었다.
인터뷰룸 안에서는 여전히 인터뷰가 계속되고 있다. 문을 열고 들어보니 임서영이 이번 앨범 컨셉을 조목조목 설명하는 중이다.
“실장님, 잠깐만요.”
“응?”
나는 최대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김현조가 인터뷰를 잠깐 멈춰놓고 나온다. 인터뷰룸 문을 닫고, 몇걸음 떨어진 곳에서 박우정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전했다. 김현조의 얼굴이 단번에 일그러진다.
“확실해? 어떻게 알았어?”
익명으로 하는 게 좋겠지?
“내부고발자한테 들었어요. 이것도요.”
조금 전에 검색했던 기사까지 보여줬다. 순식간에 읽은 김현조가 인터뷰룸을 노려본다.
“어휴, 저 기레기 새끼가 진짜……!”
“이번엔 아닐 수도 있지만, 그래도 대비는 해야 하지 않을까요?”
“해야지. 기사 나가고 나면 늦어. 나는 홍보팀 박팀장님하고 통화하고 올 테니까, 넌 먼저 들어가서 애들 대신 쓸데없는 얘기나 좀 떠들고 있어.”
나는 김현조의 지시를 충실하게 이행했다. 인터뷰룸으로 들어가서 화장실 세면대에 있는 물비누 향이 내 취향이라는 얘기로 3분을 끌었다.
잠시 후 김현조가 들어와 인터뷰를 속행했다. 박팀장과 무슨 얘길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답변할 때 좀 더 신경 쓰는 건 분명했다. 시시콜콜한 근황 질문까지 대부분 김현조가 대답했다.
결국 황정구 기자가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제 스튜디오로 가셔서 사진 찍으시면 됩니다.”
“기자님도 고생하셨습니다. 기사 잘 부탁드립니다.”
“네, 뭐…….”
건물 안에 있는 스튜디오로 이동해서 기사와 같이 올라갈 단체 사진과 개인 사진을 찍었다. 그 후에야 인터뷰 스케줄이 끝났다.
돌아가는 길에 김현조가 얘기를 꺼내자, 승합차 안이 떠들썩해진다.
“진짜 큰일날 뻔했네! 저 오빠가 계속 화장실 얘길 하길래 왜 그러나 했는데.”
임서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투덜거린다.
“그 기자님, 질문하는 게 느낌이 좀 쎄하긴 했어. 우리한테 원한이라도 있대?”
“그런 게 어딨어? 그냥 기사 자극적으로 뽑아서 클릭 수 늘리려는 거지. 개구리야 돌에 맞아 죽든지 말든지.”
“무섭다, 정말.”
“그런데 우리 이제 괜찮은 거야? 기사 이상하게 나가는 거 아냐?”
엘제이가 걱정하자 김현조가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박팀장님이 저기 연예부 부장이랑 좀 아는 사이래. 별 탈 없도록 처리할거라고 걱정하지 말라더라.”
“진짜?”
“그 기레기 자식이 기사 이상하게 써서 올리면 데스크에서 까고 수정하라고 할 거야. 지가 국장도 아닌데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 별수 있어?”
마치 거대한 먹이사슬의 한 단면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앞으로도 이 기자는 이름 기억해놓고 최대한 거를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런데 정선우.”
나는 꼬인 안전벨트 줄을 정리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네?”
“너는 운이 엄청나게 좋은 거냐, 아니면 뭐가 있는 거냐?”
당연히 뭐가 있는 거죠. 뭐 이번 일은 운도 좋았지만.
“어제부터 희한하게 이것저것 잘 물어오네. 어떻게 화장실 가다가 내부고발자를 만나?”
임서영이 고개를 내밀며 거든다.
“어? 어제 고준태 피디님도 화장실 가다가 딱 만난 거 아니에요?”
“어라, 그러네?”
“와, 와아! 저 오빠한테 좋은 기운 있나 봐. 우리 다 저 오빠랑 철썩 붙어 다니자. 오빠 아예 짐 싸서 우리 숙소로 들어와요!”
얼굴이 따갑다.
아니, 내가 들어가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왜 날 보는 시선들이…….
“임서영 약 먹을 때 됐네. 헛소리하지 말고 아프면 잠이나 자.”
엘제이가 임서영이 앉아있는 좌석을 퍽퍽 걷어찬다.
“헛소리가 아니라 근거 있는 얘기야!”
“근거?”
“엄마가 얼마 전에 용한 선녀님한테 가서 우리 언제쯤 잘되겠느냐고 물어봤는데, 그 선녀님이 연말에 큰 복이 있다고 그랬대. 뱀이 복을 물고 오니까 그 뱀을 놓치지 말고 꼭 잡으라고.”
임서영이 호들갑을 떨었지만 멤버들은 무반응이다. 금방 시무룩해진 임서영이 중얼거린다.
“진짠데…… 뱀을 잡아야 된댔는데…….”
그런데 뱀이라고 하면 나도 짚이는 게 있긴 한데…….
“너 뱀띠 아냐?”
운전하던 배신자가 나한테 불쑥 묻는다.
“내가 뱀띤데. 너랑 나랑 동갑이니까…… 맞지?”
“맞아.”
뒤에서 김현조가 웃는다.
“그만들 해. 니들은 농담을 뭐 그렇게 진지하게 하냐?”
“농담 아닌데요.”
“뭐?! 그럼 진짜 둘 다 뱀띠야?”
“네. 89년생 뱀띠요.”
“헐.”
몇 초간 침묵이 흐르더니 뒷좌석이 시끄러워진다.
“으아아, 소오오름……!”
나도 조용히 팔뚝을 쓸어내렸다.
어쩌면 미래 예지능력이라는 거, 생각보다 흔한 거 아냐?
저녁에는 넥스트 K스타 제작진과 만났다.
장소가 비싼 소고깃집이길래 프로그램 제작비가 넉넉한가 했더니 1차는 W&U에서 내기로 했단다. 엄청나게 좋은 고기라는데, 술 따르고 술 마시느라 제대로 음미하지도 못했다.
그래도 다행히 분위기는 시종일관 화기애애했다. 넵튠 멤버들도 제작진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긴 것 같다. 각자 개성도 많이 보여준 것 같고.
고깃집에서 시작한 사전미팅은 2차와 3차를 거쳐 새벽 3시가 넘어서 끝났다. 얼큰하게 취한 피디 작가들을 배웅하고 우리도 마지막으로 승합차에 올라탔다.
김현조와 내가 쉴 틈 없이 술잔을 받는 동안 간을 지킨 배신자가 운전대를 잡았다. 졸려서 계속 하품하는 애들을 숙소에 내려주고 나니 어제처럼 세 명만 남았다.
와, 그게 어제였구나…… 한 달은 지난 것 같은데.
길던 하루도 끝났고, 이제 집에 가서 쉴 일만 남은 거겠지.
“오늘도 둘 다 고생 많았어. 피곤하지?”
김현조가 혀가 꼬인 발음으로 말한다.
“빨리 들어가서 자고, 아침에 맛있는 거 많이 먹고.”
데자뷘가?
“7시까지 출근해. 내일도 할 일이 많다.”
어제처럼 멍청하게 되묻는 실수는 하지 않는다. 다만…….
“실장님. 저 그냥 회사에서 자면 안 될까요?”
“저도…….”
“그래? 나도 회사에서 잘 건데. 그럼 같이 가자! 회사 수면실 괜찮아.”
나는 하하하 웃으며 김현조를 따라갔다.
젠장, 하루빨리 여기서 벗어나야겠어.
< 미래와의 조우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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