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래와의 조우 (1) >
샵으로 돌아가자 애들이 배가 고팠는지 격하게 반긴다. 편의점에서 데워온 도시락을 비롯해 먹을 것을 챙겨주고, 김종훈과 매니저한테도 간식을 돌리고, 샵 직원들에게도 돌렸다.
그리고 배신자와 함께 양해를 구한다.
“죄송합니다. 지금 아니면 점심 먹을 시간이 없어서.”
“괜찮으니까 눈치 보지 말고 드세요. 우리가 사정을 모르나, 뭐.”
그래도 꾸벅 꾸벅. 어제부터 목과 허리가 쉴 틈이 없다.
우리도 샵 한쪽에서 도시락을 뜯었다. 내 건 불고기 도시락. 냄새를 맡자마자 뱃속이 요동친다. 꾸르륵하는 소리도 난다.
그러고 보니 나 아침도 걸렀지. 먹은 게 커피 한 잔밖에 없었어. 애들 웃는 얼굴에 배부른 건 한순간이구나.
허겁지겁 젓가락질을 했다.
역시 불고기야. 불고기는 실망시키는 법이 없지.
젓가락을 놓자마자 애들은 분장을 계속한다. 잠시 후 스타일리스트들이 가져온 의상으로 갈아입자 모든 준비가 끝났다.
우리는 다시 우르르 승합차에 탔다. 목적지는 종로에 있는 지투데이 신문사. 보통 인터뷰 기사 사진들을 보면 인테리어가 예쁜 카페에서 많이 찍던데, 이런 삭막한 건물 안에 사진 찍을 장소나 있나?
밥도 제대로 못 먹고 꾸미고 왔는데 사진빨 안 받을까 봐 걱정이다. 각도나 조명 문제로 찍힌 굴욕 샷과 멀쩡한 사진이 붙으면 곧바로 성형설이 탄생하니까.
배신자가 지투데이 건물 지하에 주차하는 동안 나는 김현조가 보내준 기자 번호로 전화했다. 한참 신호가 가더니 젊은 여자가 받는다.
-네, 지투데이 박우정입니다!
“넵튠 매니접니다. 지금 도착했는데 어디로 가면 될까요?”
-헉! 버, 벌써 오셨어요?!
2시 약속이고 1시 40분에 도착했는데 벌써라니?
“인터뷰 2시 아니에요?”
-맞아요, 2시 맞아요. 그런데…… 아, 씨.
아, 씨?
-으아아아, 죄송해요. 일단 4층으로 올라오실래요?
허둥지둥하는 게 전화로도 전해진다.
뭐야 대체?
일단 차에서 내렸다. 애들은 메이크업을 고치는데 또 시간을 들이고 있다. 고칠 것도 없어 보이는데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분주하게 뭔가 바르고 덧칠한다.
김현조가 근처에 있다고 해서 배신자는 다시 차를 끌고 김현조를 데리러 가고, 내가 애들을 데리고 4층으로 올라갔다. 잠깐이라지만 나 혼자 애들을 챙겨야 하는 상황이라 몸에 저절로 힘이 들어간다.
뭐 잠깐인데, 별일 없겠지?
건물에는 사람이 많았다. 누가 기잔지 구분이 안 되서 그냥 지나가는 사람한테는 다 인사했다. 이제 ‘안녕하세요 넵튠 매니저 정선웁니다.’ 이 멘트는 아예 입에 붙었다.
“안녕하세요, 넵튠입니다!”
내가 인사할 때는 쳐다보지도 않던 사람들도 넵튠의 밝고 활기찬 목소리에는 시선을 집중한다.
“누구야? 예쁜데?”
“신인인가? 인터뷰하러 왔나 보네.”
“어디서 봤는데…… 아, 걔들 아냐? 넥스트 K스타.”
자기들 딴에는 작게 수군거리는 것 같은데 다 들린다.
통화했던 여기자를 기다리면서 기자들의 세계는 어떤가 하고 슬쩍 구경했는데, 엄청 정신 사납다. 종이와 신문, 포스트잇들이 아무데나 널려있고, 통화중인 사람들이 많은데도 어디선가 계속 전화벨 소리가 들려서 시끄럽기까지 하다.
사람들이 피곤에 쩔어있는 건 W&U나 여기나 똑같고.
“허억, 헉! 죄송합니다!”
여자가 달려온다. 하나로 꽉 묶은 머리와 화장기 없는 얼굴. 커다란 안경을 쓴 여자는 이십 대 중반쯤으로 보인다.
그리고 왠지 낯이 익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에 이름인데. 흔한 인상도 아닌데…….
“많이 기다리셨죠!”
“저희도 방금 올라왔어요.”
“어…… 어떡하지, 일단, 일단 이쪽으로 오세요.”
우왕좌왕하던 여기자가 안내한 곳은 비좁은 탕비실이다.
“죄송해요!”
“……여기서 인터뷰하는 건 아니죠?”
“아니에요! 인터뷰는 인터뷰룸에서 할 건데, 먼저 쓰기로 한 팀이 아직 안 끝났어요. 전부 뒤져봤는데 다른 회의실도 꽉 차있어서 사람들 시선 없는 데가 여기밖에…… 진짜 죄송해요.”
여기자가 바쁘게 여기저기서 의자를 끌어왔는데 수가 모자란다. 어쩔 수 없이 하이힐을 신은 애들만 앉히고 나와 여기자는 서서 얘기했다.
“예정대로라면 앞 팀이 벌써 끝났어야 하는데, 인터뷰하기로 한 분이 컨디션이 안 좋아서 좀 늦게 오셨거든요.”
탕비실 문을 꼭 닫은 여기자가 민망함에 빨개진 얼굴로 쩔쩔맨다.
“5분 안에 인터뷰 끝난다고 하니까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시면 돼요.”
“아…… 네. 알겠습니다.”
“커, 커피 드릴까요? 믹스도 있고, 원두도 있고, 녹차도 있는데.”
여기자는 커피를 타면서 계속 넵튠의 눈치를 살폈다. 욕을 할 거라면 빨리하라는 표정인데, 우리 애들은 비좁은 탕비실에 구겨 넣어져도 불평 한마디 없다. 오히려 잠시 후 인터뷰할 때 어떤 얘기를 할지, 그리고 어떤 포즈로 사진을 찍을지에 대해 상의하고 있다.
그리고 임서영은 벌떡 일어나서 커피 타는 걸 돕는다.
“기자님이 저희 인터뷰 하시는 거예요?”
“네? 네, 맞아요. 제가 해요.”
“저희 기사 잘 부탁드려요.”
“그럼요, 당연하죠! 넵튠 기사는 제가 밤새서 쓸게요.”
“네? 되게 피곤해 보이시는데… 밤은 새지 마세요.”
“삼 일째 밤샘 중이라 죽을 거 같은데, 넵튠 기사는 쓰고 죽을 거예요.”
여기자는 애교가 넘치는 임서영이 마음에 쏙 든 것 같다.
“넵튠 이번에 잘 풀릴 거 같아요. 곡도 좋고, 넥스트 K스타도 잡았고.”
“진짜요? 저희 노래 들어보셨어요?”
“인터뷰 할 팀인데 당연히 들었죠. 오늘 출근하면서 계속 들었어요.”
5분이면 끝난다던 앞 팀이 질질 끌어서 한참 더 기다려야 했지만,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고 좋았다.
여기자는 넵튠 멤버들에게 홀딱 빠졌다. 특히 임서영에게. 인터뷰 기사에 어디까지 공을 들일 수 있는가를 보여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한다.
그사이 김현조와 배신자가 도착했다. 김현조는 탕비실에 모여 있는 애들을 보고 기막혀했지만, 여기자의 호언장담을 듣고 난 후에는 만족하는 눈치였다.
우리는 기다린 지 30분 만에 탕비실을 벗어났다. 여기자가 인터뷰할 장소로 우리를 안내했다. 탕비실보다 훨씬 넓고 쾌적한 인터뷰룸이다. 애들부터 나란히 앉히고 나와 김현조, 배신자도 의자를 하나씩 잡았다.
“그럼 인터뷰 시작….”
벌컥.
여기자가 말하고 있는데 갑자기 삼십 대 남자가 들어온다.
“박우정, 너 가서 레몬걸즈 음주운전 기사나 계속 써. 그거 당분간 검색어 1위에서 안 내려갈 거 같더라. 오늘 퇴근하기 전까지 20개 써서 올려.”
“네?! 선배, 저 지금 인터뷰 있는데요?”
“내가 대신 할 테니까 가. 내일 트래픽 순위 다 확인할 거니까 대충 쓰지 말고.”
“선배!”
“뭐해, 얼른 가라니까!”
결국 여기자가 억울한 표정으로 일어난다. 입술을 꽉 깨물면서 참고 있다. 이 상황이 안타까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임서영도 반쯤 일어나서 어쩔 줄 몰라 할 뿐, 여기자를 붙잡지는 못했다.
우리가 기자를 지목할 입장은 못 되니까.
“이야, 눈부시네. 넵튠 맞죠? 황정구 기잡니다.”
“네…… 안녕하세요.”
“오래 기다리셨죠? 앞에 가수 레이지 인터뷰였는데 그 친구가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아서 일정이 지체됐어요. 탕비실에서 기다리셨다면서요. 제가 안내를 해 드렸어야 하는데, 쟤가 수습이라 뭘 몰라서…….”
나가던 여기자가 멈칫한다. 황정구 기자는 하하 웃으면서 김현조와 잠시 얘기를 나누다가, 배신자를 보고 깜짝 놀란다.
“어? 블랙아웃 매니저 하셨던 분 아닌가?”
“맞아요. 어제 이쪽으로 옮겼습니다.”
“우와, 타이밍 좋으시네! 넵튠 이제 뜨는 일만 남은 거 아니에요?”
“하하. 감사합니다.”
황정구 기자와 배신자가 얘기를 나누는 동안 여기자는 문을 닫고 나갔다. 황정구 기자는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입을 연다.
“그런데 실장님, 넵튠 K스타 캐스팅된 거 저희한테 먼저 좀 알려주시지. 레몬걸즈 일도 그렇고, 어제 사건이 많았나 봐요?”
“그게…….”
인터뷰가 시작됐다. 황기자가 던지는 질문들은 대부분 넥스트 K스타에 관한 것들이었다. 어떻게 출연하게 됐는지, 캐스팅 확정된 걸 알았을 때의 기분, 경합 프로그램에 임하는 각오.
그러다가 한 번씩 껄끄러운 질문도 들어온다.
레몬걸즈 음주운전 사건 어떻게 생각하는지, 레몬걸즈보다 잘할 자신이 있는지…… 멤버들이 곤란해 하자 김현조가 대신 대답하거나 웃는 얼굴로 두리뭉실하게 넘어간다.
인터뷰는 길어졌다. 배신자가 화장실에서 돌아오는 걸 보고 나도 조용히 일어났다. 어깨가 아파서 빙빙 돌리면서 걷다가 여자화장실에서 나오는 여기자와 마주쳤다.
아직도 화난 표정이다.
“괜찮으세요?”
“네…… 인터뷰는 어때요? 잘 되고 계세요?”
“엄청 숨 막혀요. 기자님이 했으면 훨씬 분위기 좋았을 텐데.”
여기자가 살짝 웃는다.
근데 왜 자꾸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찜찜하게.
“혹시 우리…….”
어디서 본 적 있느냐고 물어보기 전에 팍! 떠올랐다.
어디서 봤는지.
“왜 그러세요?”
“저기, 성함이 뭐라고 하셨죠?”
“박우정이요. 여기.”
여기자가 지갑을 꺼내 명함을 내민다.
박우정.
저 얼굴이 이십 년 정도 더 늙고, 입술에 검은 립스틱을 바르고, 머리를 금발로 염색한 다음 짧게 자르면…….
박국장이다.
미래에서 본, 날 인터뷰하러 온 그 박국장.
< 미래와의 조우 (1) > 끝
ⓒ 장우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