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14화 (14/218)

< 시작은 예능, 넥스트 K-스타 (4) >

15분쯤 후 숙소에 도착했다. 어제 새벽엔 그냥 칙칙한 빌라였는데 밝은 햇빛 아래서 보는 빌라는 느낌이 확 다르다. 하얀 벽돌 위를 덮은 담쟁이덩굴이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

5층으로 올라가서 벨을 눌렀다. 도어락의 비밀번호는 아직 듣지 못했다. 매니저가 여러 번 바뀌었던 거 같은데, 비밀번호를 가르쳐주면 매니저 바뀔 때마다 번호도 바꿔야 했을 테니까 쉽게 알려주지 않게 된 거겠지.

“누구세요?”

임서영이 안전 고리 길이만큼 열린 현관문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민다.

“우리야. 실장님 바쁘셔서 우리만 왔어.”

“잠깐만요!”

문이 닫히더니 이번엔 활짝 열린다. 우린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두 번째지만 아직까진 익숙하지 않다. 배신자는 벌써 팔다리의 움직임이 뻣뻣하다. 저건 진짜 긴장한 거야, 컨셉이야?

“오셨어요?”

“어, 좋은 아침.”

멤버들이 거실에 옹기종기 모여서 인사한다. 그리고 나를, 우리를 빤히 올려다본다. 어제보다 훨씬 더 생기가 도는 것처럼 보이는 건 넥스트 K스타 때문이겠지.

눈부시게 예쁜 여자애들이 반겨주는 아침이라니. 안 자도 활력이 솟고 안 먹어도 배가 부르구나.

내가 본 미래가 실제로 일어나서 성도원의 매니저가 되면, 이런 건 좀 그리워지겠는데.

“현조오빠랑 박팀장님한테 전화로 백번 정도 들긴 했는데…… 그래도 직접 들어야 실감 날 거 같아요. 저희 진짜 넥스트 K스타 나가는 거 맞아요? 고정으로?”

임서영이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묻는다. 두 눈은 반짝반짝하고 입술은 긴장했는지 꾹 닫혀있다. 임서영만이 아니라 소파에 앉은 이태희와 엘제이, 러그에 엎드린 이송하도 우리의 입이 열리기만 기다리고 있다.

“맞아.”

나와 배신자가 동시에 말했다.

“꺄악!”

임서영이 폴짝폴짝 뛴다. 헐렁한 티셔츠 아래로 볼륨 있는 가슴이 같이 흔들린다. 진짜 귀엽다. 이건 찍어야 돼. 나는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서 사진을 찍었다. 물론 어깨 위로만.

찰칵찰칵 소리가 나자 애들이 전부 나를 쳐다본다.

“홍보팀장님이 사진 많이 찍어서 넘기라고 해서.”

당당하게 이유를 대고 거실에 모여있는 애들도 몇 장 찍었다. 과연 연예인, 렌즈를 들이대니 곧바로 표정과 포즈가 달라진다. 사진이 잘 찍혔는지 확인해보니 버릴 게 한 장도 없다.

“어떡해, 너무 좋아. 저 이거 꿈일까 봐 계속 기사 검색하고 있었어요.”

임서영은 지금도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다.

“그거 적당히 봐, 멍청아.”

엘제이가 임서영의 다리를 툭 찬다.

“악플도 있잖아.”

“난 악플도 좋은데? 처음으로 받는 관심인데 이거저거 가릴 처지야?”

“언제까지 좋은가 보자.”

“혼자 태연한 척하고 있네. 너 아침에 엄마 아빠한테 전화로 자랑한 거 다 알아. 돈도 없는 게 국제통화로 두 시간이나!”

임서영이 능글맞은 웃음소리를 내면서 약을 올린다. 울컥한 엘제이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난다.

“내가 건 거 아냐. 엄마가 기사 난 거 보고 전화한 거야! 그리고 태연한 척 하는 게 아니라 신중한 거지!”

내가 봤을 때 정말 태연해 보이는 건 이송하다. 대담한 건지, 포커페이스라서 그렇게 보이는 건지.

지금도 과자 먹으면서 러그 위에서 굴러다니고 있다. 러그 위에 과자 부스러기가 막 떨어진다. 뭐 그래도 내 조카들보단 낫다. 떨어진 부스러기는 알아서 치우니까.

일일이 주워서 입 안에다가…….

“슬슬 나갈 준비해야 될 거 같은데.”

배신자가 시계를 가리킨다.

“우리 인터뷰가 2시부터라 여유가 별로 없어서.”

“준비 다 했어요. 나가면 돼요.”

이송하가 제일 먼저 일어난다. 다른 멤버들도 각자의 방에서 가방이나 모자 같은 것만 챙기고 금방 나왔다. 알아서 척척 잘 하는구나. 김현조 없이 배신자와 나 둘뿐이라 좀 걱정했는데 이 정도면 순조로울 것 같다.

임서영이 나가면서도 핸드폰을 쳐다보느라 두 번이나 넘어질 뻔하고, 엘제이가 그 핸드폰을 뺏어버리는 바람에 귀는 좀 시끄러웠지만.

빌라를 나와 승합차에 올라탔다. 역시 운전석에는 배신자가 앉았다.

“샵 주소가…… 이거다.”

내비게이션 도착지를 샵으로 맞춰놓고 안전벨트를 맨다. 뒷좌석을 돌아보니 멤버들은 안전벨트 맬 생각은 않고 인터뷰 때 할 말을 연습하느라 정신없다.

“다들 차에 타면 안전벨트부터 매야지.”

말해놓고 아차 했다. 내가 또 애 넷 딸린 남자처럼 굴었나?

네쌍둥이한테 하던 버릇이 튀어나올 때마다 원수 같은 친구들은 나를 정줌마, 정보모, 정엄마 따위로 부르며 수치사시키려고 했는데.

힐끔 뒷좌석을 보자 다행히 멤버들은 별말 없이 넘어가는 분위기다. 다들 고개를 숙이고 안전벨트를 매고 있다.

나는 안도하며 그 모습도 사진으로 남겼다.

샵에서 기다리는 지루함도 오늘은 견딜만하다. 멤버들이 메이크업을 받고 머리 모양을 바꾸는 동안, 나와 배신자는 나란히 소파에 앉아서 핸드폰으로 넥스트 K스타에 대한 정보를 모았다.

프로그램명은 ‘넥스트 K-스타’

곧 7시즌이 끝나는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의 후속작이다. 오디션 프로그램이 다음 시즌을 준비하는 공백 기간을 메우는 역할인 셈.

나는 관심이 없어 몰랐지만, 케이블 채널에서 시작하는 프로그램치고 넥스트 K스타에 대한 관심과 기대는 상당히 큰 편이었다.

출연자가 아이돌들인 게 긍정적으로 작용한 거겠지?

아무래도 일반인들보다는 비주얼이 훨씬 좋고, 신인이라도 보이그룹 중에는 벌써 팬덤이 형성된 팀들도 있으니까. SNS나 인터넷 사이트에 소식을 퍼다 나르며 넥스트 K스타를 홍보하는 팬들이 꽤 있다.

물론 방송사에서도 홍보를 쏟아 부으며 힘껏 밀어주고 있다. 케이블 방송의 부흥을 이루어낸 오디션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시즌을 거듭할수록 추락하고 있으니, 방송사도 다른 간판 프로가 간절하긴 할 거다.

방송사가 서바이벌 오디션으로 꿀을 빨았기 때문인지 넥스트 K스타는 아예 대놓고 팀 대항 경쟁 프로다.

걸그룹 네 팀, 보이그룹 네 팀, 총 여덟 팀이 출연해 경합을 벌이고, 최후에 한 팀을 뽑아 넥스트 K스타의 타이틀을 주는 컨셉이다.

경합주제는 다양하다. 기사 내용에는 노래, 댄스, 화보 촬영, 예능감 등을 겨룬다고 나와 있다.

경합한 뒤에는 심사위원 게스트와 시청자 문자 투표를 더한 점수를 받게 되고, 최후에 누적 점수가 가장 높은 그룹이 우승한다. 제작진이 출연하는 팀들 인지도를 올리는 데만 성공하면 화제가 안 될 수가 없는 컨셉이다.

우승혜택은 Knet에서 방송되는 7부작 아이돌 리얼리티프로그램 제작, 그리고 쟁쟁한 K팝스타들만 참여하는 Knet 아시안 뮤직 어워드 무대에 오를 자격. 이 정도면 내가 보기엔 상당히 좋은 기회다.

“시청자 투표 때문에 팬들 엄청 싸우겠네.”

자기가 응원하는 팀을 우승시키려고 난리가 나겠지.

배신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한다.

“그러라고 일부러 문자 투표 넣는 건데 뭐. 화제성 높이려고. 투표야 어차피 그들만의 리그잖아.”

“응?”

“걸그룹이랑 보이그룹이 붙으면 팬덤 싸움에서 밀리니까 우승은 보이그룹 중에서 나오겠지. 오디션 프로그램도 7시즌 동안 여자 우승자는 없잖아.”

“그랬나? 그럼 우승은 포기하고 인지도 올리는 걸 목표로 삼아야겠네.”

“고준태 피디가 워낙 자극적으로 편집하는 사람이라 재수 없으면 욕받이 돼서 욕만 먹을 수도 있어.”

그렇겠지. 악마의 편집에는 항상 희생양이 있으니까. 미래에서 넵튠이 욕을 먹었다고 한 걸 보면 애들한테 뭔가 문제가 생기긴 한다는 건데, 눈 크게 뜨고 잘 지켜봐야겠다.

덜컹.

누군가 또 샵으로 들어온다. 우리처럼 우르르 몰려온 게 아니라 단 두 명이다. 앞장서서 들어온 남자는 모르겠고, 뒤에 검은 스냅백을 쓰고 있는 남자는 낯이 익다.

김종훈.

데뷔한 지 꽤 오래된 힙합 가수다. 내가 고등학생 때도 저 사람 노래를 들었으니까. 지금은 가수보다는 예능인으로 본업이 바뀐 것 같지만.

부모님이랑 같이 살 때, 그러니까 집에 TV가 있었을 때는 김종훈이 고정 출연하고 있는 예능도 자주 봤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오른쪽 머리만 구불구불한 임서영이 벌떡 일어난다. 다른 멤버들도 뒤따라서 인사했다. 김종훈이 여자애들에게 둘러싸인 동네 아저씨처럼 헤벌쭉한 얼굴로 손을 흔든다.

“와…… 나 앞으로 맨날 이 시간에 올까 봐. 걸그룹?”

“넵튠이에요!”

제일 말을 잘하고 애교 있는 임서영이 앞장서서 팀명이나 멤버들의 이름을 소개한다. 김종훈의 얼굴은 점점 더 풀어진다. 그들이 인사를 나누는 동안 나와 배신자도 인사했다. 우리 상대는 김종훈의 매니저다.

“안녕하세요. 넵튠 매니접니다.”

“어, 그래. 난 종훈이 형 매니저.”

얼굴에는 수염이 덥수룩하고, 아침까지 마시다가 온 건지 숨 쉴 때마다 술 냄새가 진동한다.

“쟤들 넥스트 K스타 출연하는 애들 맞지? 오늘 기사 많이 뜨던데.”

“네, 맞아요. 잘 부탁드립니다.”

“나한테 잘 부탁할 게 뭐 있어. 그런데 그거 스트레스 엄청 받겠던데?”

“예?”

“아이돌 여덟 팀이나 나오는 거 아냐?”

“맞아요.”

“그럼 한자리에 다 모이면 한 오륙십 명은 될 거 아냐. 아이돌 체육대회도 아니고, 아오, 시발. 나는 그거 기빨려서 못하겠다.”

오륙십 명. 그 생각은 못 했네.

어제 음악방송도 아이돌들이 여러 팀 모여서 그런지 보이지 않는 긴장감 같은 게 흘렀는데, 넥스트 K스타는 그보다 더하겠지? 음악방송처럼 대기실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도 아니고 계속 얼굴을 맞대고 촬영해야 하니까.

이거 팬들이 문제가 아니라 출연자들끼리 싸움 날 수도 있겠구나.

“그리고…….”

김종훈 매니저가 소리를 낮춘다.

“음주운전 사고 쳐서 하차한 걔들, 매니저가 그 놈 맞지? 덩치 크고 인상 드럽고 깡패 같은 새끼.”

“맞아요.”

내가 대답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그 새끼 조심해라.”

“조심하라구요?”

“내가 몇 번 봤는데 질이 안 좋아. 방송국에서 오다가다 마주쳐도 인사한번 안 해. 개새끼. 카더라긴 하지만 지가 데리고 다니는 애들한테 손찌검 한다는 얘기도 있고. 다른 회사 매니저들 협박하고 다닌다는 얘기도 있고. 아무튼 그 새끼 드러운 소문이 한두 개가 아냐.”

그래 보이긴 했지. 자기가 맡고 있는 애한테 망할 년이니, 걸레 같은 년이니 떠들었던 것만 봐도…… 그것도 내가 뻔히 보고 있었는데 거리낌도 없이.

날 엄청 노려보기도 했고. 정장 덕분에 조용히 넘어간 거지, 신입 매니저 티가 났으면 분위기가 더 살벌했을 것 같긴 했어.

“애들 관리 못했다고 회사에서도 엄청나게 깨졌을 텐데, 하루 만에 대타로 쏙 들어간 니들이 곱게 보이겠냐? 괜히 니들한테 화풀이 할 수도 있다고. 알아둬.”

“예, 감사합니다.”

“감사는 뭐…… 만약 그 새끼가 진짜 찾아와서 시비 걸면 기자를 불러.”

“기자요?”

경찰이나 경호원이 아니라?

“그런 새끼한테는 다른 것보다 기자가 더 잘 먹힌다고. 재수없으면 기사 하나로 회사 이미지가 추락할 수도 있으니까. 니들도 친한 연예부기자 한둘은 있을 거 아냐, 어?”

“네.”

배신자가 대답한다. 젠장. 레몬걸즈 매니저가 시비 걸 것 같은 사람은 난데 친한 기자는 쟤한테 있네.

……진짜 뭔일 나는 건 아니겠지?

< 시작은 예능, 넥스트 K-스타 (4) > 끝

ⓒ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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