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작은 예능, 넥스트 K-스타 (2) >
댓글창을 열어보니 댓글이 이천 개가 넘는다. 여기도 레몬걸즈와 이유람에 대한 비난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넥스트 K스타에 관련된 댓글들도 보인다. 거의 제작진 피드백이 빨라서 좋다는 의견들이다.
다행히 넵튠에게 향하는 악플들은 별로 없다. 큰 관심도 없고.
피디가 잠재력 있는 팀이라고 하니 지켜보겠다는 정도?
일방적으로 레몬걸즈를 밀어내고 들어갔다면 폭풍 악플이 달렸겠지만, 이유람이 워낙 사고를 크게 친 덕분에 악플러들을 모두 흡수한 것 같다.
넵튠으로 검색해보니 헤드라인에 넵튠 이름이 걸린 기사들도 보인다.
[레몬걸즈 대신 넥스트 K-스타 합류한 ‘넵튠’ 누구길래?]
[‘넥스트 K스타’ 넵튠 합류, 누군가 했더니…]
클릭해보니 넵튠의 프로필이 기사화돼 있고, 말아먹은 앨범들과 지금 활동 중인 싱글도 그럴싸하게 포장되어 소개되고 있다. 처음 보는 멤버들의 사진도 함께 뜬다. 그 아래엔 W&U 제공이라고 써있다.
댓글을 보니 비주얼에 대한 칭찬이 여러 개 달렸다. 일일이 저장하면서 읽다가 기막힌 댓글들을 발견했다.
-꽃병풍 쩌리 예약. 경합 프로그램이니까 얘들이 하위권 깔아주겠네.
-다른 팀들 개이득ㅋㅋㅋㅋ
공감수가 무려 수십 개다. 어이가 없네?
대댓글을 달려고 로그인하고 왔는데 이미 키보드 워리어가 참전해있다. ‘넵튠맘’이라는 닉네임인데, 살펴보니 다른 댓글에도 넵튠을 감싸는 대댓글을 엄청 달고 있다. 분명 욕은 안 하는데도 전투력이 만렙이라 악플러들이 나가떨어지고 있다.
벌써 넵튠 팬이 생겼나?
댓글들을 정독하는 동안 잠은 멀리 달아났다. 그 대신 나는 흥분과 고양감에 휩싸였다. 김현조가 했던 말이 정확하다. 내 손으로 신인을 키워서 인지도를 올리고 인정받게 하는 맛…… 이건 정말 중독적이었다.
뭐 내 손으로 키운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이번 일에는 일조했으니까 나도 뿌듯해 할 자격은 충분하지. 그렇고말고.
곧 지하철이 멈춘다. 내려야 할 역이다. 넵튠의 노래를 들으며 회사로 들어가는데 전화가 온다. 김현조다. 지금 시각은 7시 53분. 세이프!
“여보세요?”
-오고 있냐?
이 사람은 왜 자꾸 존대랑 반말이 왔다 갔다 하는 거야? 일관성 없게.
“지금 문 앞이에요. 몇 층으로 갈까요?”
-매니지먼트팀은 4층이야. B 회의실로 와. 그냥 들어오지 말고 회사 앞에 커피숍 있으니까 커피 좀 사와. 아메리카노 따듯한 거 두 잔….
나는 재빨리 녹음버튼을 눌렀다.
-바닐라 라떼 한 잔, 카페모카 생크림 올린 거 한 잔… 잠깐, 건영이 넌 뭐… 카푸치노 한 잔, 그리고 너 마시고 싶은 거 한잔.
“네, 알겠습니다.”
-다 외웠어?
“녹음했어요.”
-일 잘하네.
커피 심부름으로 일 잘한다는 소릴 들을 줄이야.
다시 회사 밖으로 나갔다. 횡단보도를 건너자 바로 앞에 24시 커피숍이 보인다. 주문받은 커피를 사서 박스에 담아 양손에 들었다.
이미 지각에 대한 걱정은 없어졌지만, 커피가 식을까 봐 서둘러 다시 회사로 돌아갔다.
“아씨, 몇 층이랬지?”
잊어버렸다.
일 잘한다는 소리까지 들어놓고 다시 전화하는 건 좀…… 마침 엘리베이터에 타는 남자가 있길래 얼른 올라탔다.
“저, 매니지먼트팀3팀 몇 층이에요?”
“4층이요. 눌러드려요?”
“감사합니다!”
목소리 죽이네. 여기 직원인가?
옆을 쳐다봤다가 깜짝 놀랐다. 영화배우 성도원이다.
20대를 대표하는 탑배우. 큰 키에 수영 선수처럼 넓은 어깨, 거지 같은 옷을 입혀놔도 옷이 성도원 빨을 받는다는 축복받은 몸매. 선글라스를 써도 가려지지 않는 빛나는 외모.
하지만 성도원이 비주얼만 내세우는 배우인 건 아니다. 비주얼 못지 않게 연기력도 탄탄하다. 흥행파워도 있고.
드라마로 중국에서 대박을 쳤고, 최근 찍은 영화 두 편은 각각 천만, 600만의 관객을 동원해서 충무로에서의 주가도 나날이 올라가고 있다.
올여름 처음으로 FA시장에 나온 걸 W&U가 거액의 계약금과 할리우드 진출을 떡밥으로 낚아챘다는 기사는 봤지만, 이렇게 금방 만나게 될 줄이야.
이것도 인연인데 악수 한 번만 해달라고 할까…… 생각한 순간 눈앞이 흐려진다.
미래인가?
그런데 이번엔 조금 다르다.
신호가 잘 안 잡히는 화면처럼 뚝뚝 끊어지고 시야가 흐릿하다. 뭐지?
게다가 내가 지금까지 본 미래의 모습은 다 박국장, 송기자와 인터뷰하는 장면이었는데 지금은 낯선 사무실에서 남자와 마주 앉아있다. 주변에 다른 사람들도 있는 것 같긴 한데 노이즈가 심해서 분간이 안 되고, 바로 앞에 앉은 남자만 겨우 얼굴을 확인했다.
어?
성도원이다. 선글라스를 벗은 성도원이 웃고 있다. 전혀 늙지 않은 얼굴. 내가 조금 전에 실물로 본 얼굴 그대로다.
이건 또 뭐야?
혼란에 빠져있는데 성도원의 목소리가 들린다.
“은인이죠. 선우씨 아니었으면 그쪽 수작에 말려들어서 제 연기자 인생이 끝났을지도 모르는데. 그래서 말인데요…….”
은인? 내가? 수작은 또 뭐야?
“난 선우씨가 내 매니저가 돼 줬으면 좋겠어요.”
……!
“4층 다 왔어요.”
똑같은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성도원이 엘리베이터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있다.
“가, 감사합니다.”
얼떨떨한 상태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럼 좋은 하루 보내세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엘리베이터는 성도원만 태우고 위로 올라간다. 나는 멍청하게 서서 닫힌 엘리베이터 문을 바라봤다.
방금 그건 뭐였지?
분명 어제 봤던 미래와는 다른데. 노이즈가 가득 낀 시야도 그렇고, 미래를 본 시간도 아주 짧았다. 무엇보다 먼 미래가 아닌 것 같았는데.
이건 언제쯤 일어나는 일이지? 힌트가 너무 없다.
내가 뭘 도와줬다는 거지? 앞으로 일어날 일은 맞을까? 맞겠지?
성도원이 나한테 매니저가 돼 달라고 부탁하다니…… 내가 대답할 수 있었다면 바로 오케이했을 텐데.
잠깐 넵튠이 떠오르긴 했지만, 신인을 키우는 즐거움과 뿌듯함을 막 알아가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내가 하고 싶은 건 배우 매니저고. 그리고 성도원이잖아.
“거기서 뭐 해? 빨리 와.”
낯익은 목소리가 나를 현실로 부른다. 엘리베이터 맞은편의 B 회의실. 반쯤 열린 문으로 배신자가 상체를 내밀고 손짓하고 있다.
언제 올지 모르는 미래는 잘 넣어두고, 일단 현재에 집중하자, 현재에.
나는 양손에 커피 박스가 잘 있나 확인하고 서둘러 회의실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여기 커피 사왔습니다.”
“커피값은 이따가 줄게.”
김현조는 아예 반말하기로 정한 것 같다. 진작 그러라니까.
회의실 안에는 김현조와 최건영 외에 여자 둘과 남자 한 명이 함께 있다. 나는 인사를 하다가 김현조의 옷차림을 보고 흠칫했다. 청바지에 헐렁한 맨투맨 티셔츠. 어제 입고 있던 옷인데.
설마 호프집에서 헤어지고 나서 집으로 안 가고 회사로 왔나?
“여긴 새로 온 정선우, 그리고 이쪽은 홍보팀 직원분들.”
나는 속으로 얼굴과 이름을 매치하며 외웠다. 삽십대의 화장기 없는 빼빼 마른 여자가 홍보팀 박팀장. 그 아랫사람 같은 남녀 한 쌍은 나랑 나이가 비슷해 보이고.
어제는 좋은 첫인상 남기기에 실패했지만, 오늘만큼은!
“정선웁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커피!”
“우리 커피 좀 마시고 얘기해요. 이러다 죽겠어.”
커피한테 졌다.
나는 내 몫의 커피를 들고 빈자리에 찌그러져 앉았다.
솔직히 첫 회의를 좀 기대하고 있었다. 정장에 넥타이를 맨 남자들과, 흰 블라우스에 H라인 스커트를 입은 여자들이 다리를 꼬고 앉아서 진지하게 의견을 주고받는 모습.
그러다 피곤해지면 커피 한잔의 여유를 즐기기도 하고…… 뭐, 그런 장면까진 아니더라도 비슷한 걸 기대했는데.
하하하. 헛된 기대였다.
여긴 회의실이라기보다 PC방 같다. 테이블 위에는 노트북과 종이들이 널려있고 사람들은 밤새서 달린 게임 폐인들처럼 커피를 마신다.
“3팀 복덩이 맞지?”
박팀장이 날 보고 대뜸 묻는다.
“네?”
“매니지먼트3팀 복덩이 신입 아냐? 출근 첫날에 대박 터트린. 축하해.”
“진짜 비기너스 럭이라는 게 있나 봐요, 팀장님.”
“어떻게 저렇게 얻어걸리지? 전생에 나라를 구하셨나 봐.”
“우리가 2년 동안 애써도 안 되던 걸 하루 만에… 더러운 세상.”
홍보팀 삼인방은 나를 안주로 한참 동안 떠들었다.
배신자는 강 건너 불구경이고, 김현조는 핸드폰 들여다보느라 바쁘다. 어디서 연락이 쏟아지는 건지 그의 핸드폰은 아까부터 계속 진동하고 있다.
박팀장이 김현조의 핸드폰을 힐긋 본다.
“실장님 핸드폰 울리는 거 보니까 넵튠 앞으로 바빠지겠네요.”
“그러게요. 이제 진짜 일할 맛 나겠네요.”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어야죠. 넵튠 애들 보면서 기삿거리 되겠다 싶은 건 다 토스해줘요. 거기 신입 둘도.”
“네.”
뭘 하라는 건진 잘 모르겠지만 일단 대답부터 했다. 다행히 박팀장이 바로 설명한다.
“반응 괜찮을 거 같은 건 다 찍어두고 기록해 두라고. 애들이 서로 장난치는 거, 뭐 먹는 거, 걷다가 넘어진 거라도. 쓰든 안 쓰든 소스는 많을수록 좋으니까.”
괜찮은 사진을 건지면 넵튠 공식 SNS에 올려서 기사용으로 주고, 재밌는 일화는 킵 해뒀다가 나중에 토크쇼나 인터뷰할 때 써먹는다고 한다.
그때 가서 급하게 떠올리려고 하면 생각이 안 나서 허구로 지어내거나 재미도 없는 얘길 해서 편집되니까, 지금부터 차곡차곡 모아두면 좋다고.
“어제 서영이가 고준태 피디를 팬으로 착각해서 사인해주겠다고 했다면서. 이런 얘깃거리도 좋아.”
“어? 그거 어떻게 아셨어요?”
저걸 아는 사람은 나랑 임서영이랑 고준태 피디 세 명뿐인데.
“홍보팀이니까.”
박팀장이 음흉하게 웃는다.
< 시작은 예능, 넥스트 K-스타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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