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작은 예능, 넥스트 K-스타 (1) >
“헉!”
나는 벨소리에 놀라서 깨어났다.
정신이 들자마자 큰일 났다는 생각부터 든다.
내가 언제 잠이 들었지? 지금 몇 시지?
창밖은 아직 어둑어둑해 보이지만 새벽에 비가 왔으니 구름이 낀 것일 수도 있다. 허겁지겁 시계를 찾았다.
다행히 시간은 7시 정각이다. 깜빡 졸긴 했지만 겨우 10분 정도였다.
긴장이 풀리자 한발 늦게 졸음과 피로감이 밀려온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전화를 받았다.
“땡큐, 형. 8시 출근인데 하마터면 지각할 뻔했어.”
-몇 시에 들어갔는데?
“6시 넘어서.”
-뭐? 그런데 지금 다시 출근한다고? 너 피곤해서 어떡하냐.
“어떡하긴. 그래도 출근해야지.”
자… 지금은 정확한 상황판단과 빠른 결정이 필요한 때다.
택시를 탄다면 조금 여유를 부려도 되겠지. 지하철을 타려면 당장 일어나야 되고. 잠깐. 어쩌면 도로가 막힐 수도 있잖아. 택시를 탔다가 중간에 지하철로 갈아타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어. 안전하게 지하철을 타자.
일어나서 욕실로 들어갔다. 물을 틀어놓고 따듯한 물이 나올 때까지 또 고민한다.
머리 감을까 말까.
-어제는 어땠어?
“…다이나믹했지. 그래도 나 어제 일 잘했다고 칭찬도 받았어.”
출근 둘째 날인데 머리는 감자. 린스는 됐고 샴푸만 하는 걸로.
-다행이네. 오늘은 꼭 일찍 퇴근해서 술 한잔 하자. 직장 얘기도 좀 듣고.
“나도 그랬으면 좋겠네. 꼭!”
-어머니한테 전화하고. 기다리실 텐데.
“그래야지.”
전화를 끊으려는데 건너편에서 요란한 목소리들이 들린다.
-아빠아빠 삼촌이야? 나도! 나도 바꿔줘! 나 먼저 바꿔줘! (얘들아, 아빠 통화 중이잖…) 나도 물어볼 거 있단 말이야! 나나나나!
전화기는 오래 못 버티고 초글링들의 손으로 넘어간다. 나는 이를 닦으면서 네 명이 싸워 한 명이 다시 전화기를 차지할 때까지 기다렸다.
-삼촌! 어제 연예인 많이 봤어? 누구누구 봤어?
“K팝콘서트 나가는 가수들 다 봤지.”
-헐 대박! 대박 좋겠다! 삼촌 개멋있다! 개부러워!
“개멋…… 너 그런 말….”
-다음에 나도 데리고 가면 안 돼?!
“안 돼. 이제 끊어, 삼촌 일하러 간다.”
매달리는 놈을 냉정하게 쳐내고 전화를 끊는다. 조카들 사이에서 권위가 무너지면 큰일 난다. 연예계만 위계질서가 중요한 게 아니다. 여기도 중요하다. 권위가 무너지면 이놈 저놈 다 기어올라 내 위치는 바닥으로 떨어질 거다.
끔찍한 일이지…….
초스피드로 머리를 감는다. 어제는 정장 빼입었다고 머리에도 신경을 썼는데 오늘은 그런 거 없다. 그냥 수건으로 탈탈 털어 말렸다. 옷도 어제의 실패를 되새기며 편하게 입었다. 후드티에 청바지. 코트.
너무 편한가? 오늘은 회의도 할 텐데.
10초 동안 고민하다가 슬랙스에 니트로 갈아입고 집을 나선다. 지하철역은 원룸에서 도보 8분 거리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지하철 안은 평소보다 덜 붐빈다.
주위를 둘러보자 출근길인 직장인들도 보이고, 등굣길인 학생들도 보인다. 저기 사복을 입은 애들은 대학생이고.
기분이 참 이상하다. 학생 딱지를 떼고 직장인이 되면 뭔가가 엄청 바뀔 줄 알았다. 알을 깨고 나온 새나, 우물을 벗어난 개구리가 보는 것처럼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계가 펼쳐질 줄 알았는데…….
딱히 그렇진 않구나. 어쩐지 이 얘기 했을 때 형이 엄청 웃더라.
지하철을 기다리며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엄마, 나. 어제 늦게 퇴근해서 전화 못 했어.”
-안 그래도 기다리다가 잤어. 첫날부터 일이 많았어?
엄마 목소리에 걱정이 가득하다.
부모님은 내가 군대를 제대하자마자 서울집을 형에게 주고 시골로 가셨다. 서울 물가가 부담스럽기도 하고, 아버지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공기 좋은 시골에서 요양도 할 겸 겸사겸사.
요즘은 건강도 많이 회복되셨고, 두 분이서 함께 작게 텃밭도 기르고, 강아지도 키우고 하신다.
나이가 사십인 형이야 알아서 자리 잡고 잘 살고 있고, 이제 네쌍둥이들도 초등학교 고학년이라 내버려둬도 지들끼리 쑥쑥 잘 큰다. 그래선지 부모님은 뒤늦게 나한테 신경을 쏟는 중이시다.
“아냐, 신입 환영회 하느라 늦은 거야. 걱정하지 마. 집에는 별일 없고? 아버지는 건강 괜찮으시지?”
-우리는 잘 지내지. 너 일하는 건 어때. 괜찮았어? 그렇게 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재미는 있어?
“재밌지, 그럼.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다 좋아.”
한 명 빼고.
-어제 너희 고모들하고 다 같이 모여서 저녁 먹었는데, 너 TV 나오는 배우들이랑 같이 일한다고 하니까 집집마다 애들이 난리다. 사인받아다 달라고.
“…그래? 그런데 배우가 아니라 가수랑 일하게 됐어. 걸그룹.”
-걸그룹?
“넵튠이라는 애들인데, 엄만 모를 거야. 다음에 가면 사진 보여줄게.”
-그래. 일하면서 힘든 거 있으면 형한테 꼭 얘기하고. 알았지?
안 그래도 오늘 아침에 형이 큰 도움을 줬지. 형이 모닝콜 해줬다는 얘길 하려는 참에 지하철이 들어온다.
“알았어. 지하철 온다. 또 전화할게.”
급히 전화를 끊고 지하철 좌석에 앉았다. 지금이 7시 반…… 회사는 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늦지는 않겠다. 졸다가 내릴 역을 지나치는 일을 피하려고 눈에 힘을 팍 줬다.
음악이라도 들을까? 이어폰을 찾는데 옆에서 교복을 입은 여자애 둘이 호들갑을 떤다.
“야야야야, 대에박! 레몬걸즈 이유람 사고 쳤네. 얘 지금 실검 1위야.”
“뭔데? 뭔 사고?”
둘은 머리를 딱 붙이고 핸드폰 화면을 쳐다본다.
“음주운전이래. 허얼. 일반인 남친이랑 같이 있었대. 얘 인터뷰 할 때마다 모쏠이라고 어필하던 애 아냐? 남팬들 쿠크 다 깨지겠네.”
“넥스트 K스타 대비해서 연습 겁나 한다고 언플 쩔더니…….”
“그것도 하차했네. 빈자리에 넵튠이 대신 들어간다는데?”
“완전 듣보잡이네. 제작진 급했나 봐.”
나도 서둘러 인터넷에 접속했다. 포털을 보니 이번 사태가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을 다 차지하고 있다.
레몬걸즈 이유람. 이유람 음주운전. 이유람 남친. 넥스트 K-스타도 네 번째에 올라와 있다. 넵튠의 이름은 안 보인다.
연예 기사란은 자극적인 헤드라인으로 가득하다.
[레몬걸즈 이유람 불구속 입건, 일반인 애인과 대낮에 음주 데이트?]
[모태솔로라던 이유람 비밀 남친에 음주운전까지? ‘충격’]
[이유람 음주운전 입건에 팬들 ‘경악’ 넥스트 K-스타도 하차]
뒤 페이지에 먼저 올라온 기사들부터 읽어보니 흐름이 재밌다.
처음에는 레몬걸즈 이유람의 입건소식을 알리는 기사들만 가득했다. 그대로 복사해서 베낀 것처럼 내용은 다 비슷비슷하다.
올해 초 공중파 주말 예능에서 뛰어난 예능감을 발산하며 눈도장을 찍은 레몬걸즈 멤버 이유람이 인기몰이 중이던 행보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유람은 어제 오후 일반인 연인을 태우고 음주운전을 하다가 적발, 불구속 입건됐다. 혈중 알콜농도는 면허취소에 해당하는 0.107…….
메인에 걸린 기사는 댓글이 천 개가 넘었고 원색적인 욕설과 비아냥들이 어마어마한 공감수를 받고 있다. 그 속에서 이유람은 이미 대중을 우롱한 죽일 년이 되어있다.
넥스트 K스타에도 불똥이 튀었다.
네티즌들은 넥스트 K스타는 저런 애를 섭외해놓고 한류니 뭐니 언플한 거냐, 케이블 수준 알겠다, 범죄자가 한류스타가 웬 말이냐며 제작진에게 화살을 돌렸다.
비난여론이 일어나자 흐름을 캐치한 기자들이 발 빠르게 기사들을 써올린 게 보인다.
[레몬걸즈 이유람 입건, ‘넥스트 K-스타’ 방송 전부터 시끌]
[‘음주운전’ 이유람, 넥스트 K-스타 녹화 계속 진행하나?]
이런 기사들이 한참 도배되다가 어느 순간부터 레몬걸즈의 하차 기사들이 떴다. 그런 기사들도 초반은 앞 기사들과 비슷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중반부터 뉘앙스가 확 바뀐다.
한편, 레몬걸즈가 하차한 Knet의 신규 프로그램 ‘넥스트 K-스타’는 스타성과 잠재력을 가진 신인그룹 여덟 팀을 선정해 노래, 댄스, 예능 등 다양한 주제로 경합을 벌여 차세대 K팝 스타가 될 단 한 팀을 찾아내는 프로그램…….
이유람을 소재로 자극적인 이야기를 쏟아내다가 갑자기 프로그램 홍보로 넘어간다. Knet 홍보팀이 움직였구나.
레몬걸즈의 음주운전 사건에서는 재빨리 발을 빼고, 이왕 실검 차지하고 화제가 된 김에 프로그램 홍보는 제대로 하겠다는 의도가 보인다. 끝에는 고준태 피디의 인터뷰까지 실려 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드디어 넵튠의 이름을 찾아냈다.
넥스트 K-스타의 고준태 피디는 불미스러운 일로 레몬걸즈가 하차하게 된 상황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했다. 그는 “제작진이 밤새 대책회의에 매달린 끝에 빈자리에 4인조 신인 걸그룹 넵튠을 합류시키기로 결정했다”며 “넵튠은 섭외과정에서 아쉽게 제외됐던 친구들이다. 매력과 잠재력을 두루 갖춘, 넥스트 K-스타의 기획의도에 어울리는 그룹이라고 생각한다”고 새로운 소식을 전했다.
또 고준태 피디는 “방송 시작하기도 전에 물의를 빚게 되어 죄송스럽다. 이번 일을 전화위복으로 삼아 시청자분들의 기대에 부합하는 완성도 높은 프로그램을 만들겠다. 관심 있게 지켜봐 주셨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 시작은 예능, 넥스트 K-스타 (1) > 끝
ⓒ 장우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