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9화 (9/218)

< 꿈이 아니라 미래 예지 (2) >

넵튠 멤버들을 숙소에 데려다준 후에 우리는 다시 상암동으로 돌아왔다. 회동 장소는 급하게 예약한 고급 횟집. 우리도 동석하게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표가 직접 오니까 얼굴은 비추자고 김현조가 우리를 끌고갔다.

나는 숨만 쉬면서 김현조의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녔다.

솔직히 나는 아까 전부터 제정신이 아니다.

하하하. 제정신일 수가 있겠냐고. 오늘 내 인생에 덮쳐온 파도를 생각하면 지금 심장마비로 안 넘어간 게 용한 거지.

내 멘탈이 아주 못쓸 정도는 아니구나 하고 새삼 안심했다고.

“저기 도착한 것 같은데?”

먼저 도착한 사람들은 W&U 쪽이었다. 매니저먼트사업본부장은 머리가 살짝 벗겨진 중년 남자고, 매니지먼트 3팀장은 삼십대 중후반정도로 유쾌해 보이는 인상이다.

그리고 마지막, 롤스로이스에서 내린 사람이 바로, 인터뷰 사진으로만 봤던 W&U의 대표. 매니지먼트 대표를 꿈꾸는 나 같은 사람들의 롤모델.

백한성.

그를 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흔 일곱이라는 나이보다 열 살은 젊어 보이는 외모, 운동으로 관리하는 게 드러나는 몸. 고급스런 정장에 캐시미어 코트를 걸쳤는데 그 모습이······ 남성잡지 표지모델을 해도 되겠다.

무엇보다 표정과 행동에 자신감과 당당함이 가득하다. 당당할 만 한 사람이지. 1인 기획사로 시작해서 십 년 만에 W&U같은 대형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일궈낸 능력자 중에 능력자, 사업가 중에 사업간데.

인사를 하면서 백한성 대표와 눈이 마주쳤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수고했어.”

그는 나와 최건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돌아섰다.

“그럼 들어가자. Knet에선 아직 도착 안했지?”

“예. 저희도 같이 갈까요?”

김현조가 묻자 백한성 대표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비즈니스는 우리한테 맡기고 좋은 소식이나 기다리고 있어.”

그리고 백한성 대표는 본부장과 3팀장을 이끌고 횟집 안으로 들어갔다.

좋은 소식을 기다린 지 벌써 4시간째. 지금은 새벽 1시다.

“무슨 회를 몇 시간씩 드신대요?”

최건영의 목소리에 초조함이 묻어난다.

우리는 지금 24시간 호프집에서 치킨을 시켜놓고 대기하는 중이다. 혹시라도 대표님이나 본부장님과 만나야 할 수도 있어서 술은 입에도 못 대고.

김현조가 식어서 뻣뻣해진 치킨을 포크로 찌르며 대답한다.

“이 시간까지 회만 먹겠어요? 진작 2차 갔겠죠.”

“어떻게 돼가고 있을까요, 궁금해 죽겠네요.”

“길어지는 게 희소식이에요. 얘기가 잘 안 됐으면 금방 끝났을 테니까.”

두 사람은 다리를 떨며 시계만 쳐다본다. 테이블에서 조용한 건 나 혼자다. 나는 생각중이다. 4시간 동안 계속, 계속 생각하고 있다.

내가 본 것들은 대체 뭐였을까.

새벽에 처음 그것을 봤을 때는 꿈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럴 리가 없다. 나는 분명 멀쩡히 눈 뜨고 서 있는 상태에서 그것을 봤고, 그대로 깨어났다. 기면증이라고 해도 화장실 타일 위에 서서 잠들었으면 뒤통수가 깨졌겠지. 그러니까 분명히 꿈은 아니다.

그럼 대체 뭐지?

초능력? 미래 예지 능력 같은 걸까?

수퍼 히어로나 초능력자가 나오는 영화, 드라마들이 착착착 떠오른다. 일분 뒤에 일어날 일을 미리 본다거나, 무의식중에 미래에 벌어질 일을 그림으로 그리는 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자들.

나한테도 그런 초능력이 생긴 건가?

후천적인 능력자들은 유전자 조작된 곤충에게 물리거나, 뱀파이어가 된다거나, 뭐 그런 특이한 경험을 겪은 다음에 초능력을 얻는 거 아니었어?

그런데 나는?

나는 아무것도 없었잖아. 뭐가 이래?!

후우우. 흥분하지 말자. 침착하게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거야.

왜 나한테 이런 능력이 생겼는지는 모른다. 능력을 어떻게 쓰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건 정말 흥분되는 일이다.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걸.

초능력이잖아, 초능력!

물론 나는 초능력이 생긴다면 순간이동이나 투명인간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지만, 미래 예지도 좋지. 멋있잖아. 왠지 신비롭고. 이게 영화라면 비중 있는 조연쯤은 충분히 할 것 같은 능력이잖아!

으하하핫! 나는 초능력자다! 예이!

이제 뭐, 외계인이 등장할 차롄 거야? 그런 거야?!

······젠장! 침착할 수가 없어!

“선우 씨.”

“네?!”

고개를 번쩍 들자 김현조가 날 보고 있다. 흥분이 푸시시 식는다.

“졸려요?”

“아뇨. 생각을 좀······ 오늘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정신이 없네요.”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더니 조는 줄 알았나보다. 나는 졸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 보니 둘 다 오늘 첫날이죠? 너무 큰일이 일어나서 잊고 있었네.”

김현조가 뻣뻣한 치킨을 한 쪽으로 밀어버리고 주문표를 내민다.

“둘이 먹고 싶은 거 다 시켜요. 벌서는 것처럼 기다리지 말고 생맥도 한 잔씩 할까요? 환영회라고 생각하고.”

우리는 기름이 흐르는 바비큐 치킨에 골뱅이, 감자튀김, 그리고 속을 달래줄 뜨끈한 어묵탕까지 시켰다. 테이블 옆을 지나갈 때마다 불만스럽게 보던 사장님이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생맥주를 갖다 준다.

기포가 탁탁 튀는 맥주를 마시자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다. 순식간에 한잔을 비웠더니 김현조가 다시 벨을 누른다.

“뭐, 다시 부를 것 같진 않으니까 더 마셔요. 오늘은 좀 마셔도 돼요.”

“네?”

“잘 했다구요. 처음엔 희멀건 놈이 수트 빼입고 있는 거 보고 뭐 이런 놈이 왔나 싶었는데······ 시키지도 않았는데 피디한테 애들 소개해서 일을 다 따오고. 네쌍둥이 조카 있는 사람은 다 그렇게 행동력이 좋아요?”

진심이 느껴지는 칭찬은 술보다 몇 배나 더 기분 좋았다.

“운이 좋았어요. 화장실 앞에서 피디님이랑 레몬걸스 매니저가 하차 얘길 하더라구요.”

“물론 타이밍이랑 운이 기막히게 좋긴 했지만, 그것도 선우 씨가 피디를 붙잡고 늘어지지 않았으면 놓쳤을 거예요. 아주 열정적이었다던데요?”

나는 멋쩍게 뺨을 긁적였다. 표정관리가 힘들다. 회사에서 받는 칭찬은 집이나 학교에서 받았던 거랑은 되게 다르구나. 직장인으로서 내 존재를 인정받는 것 같아서 훨씬 뿌듯한 기분이다.

미래를 보지 못했다면 이 기회를 놓쳤겠지.

나는 고준태 피디가 누군지도 몰랐고, Knet에서 넥스트 K스타라는 프로그램을 론칭했다는 것도 몰랐으니까. 알았다고 하더라도 내가 직접 피디에게 넵튠을 소개해도 괜찮을까 하고 망설이다가 결국은 돌아섰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미래의 내가 말했던 것처럼, 회사의 복덩이는 최건영이 됐을까.

맥주를 마시며 최건영을 바라봤다. 함께 첫 출근을 한 상황에서 나 혼자 칭찬을 받고 있으니 당연히 기분이 안 좋을 텐데, 최건영은 오히려 나를 칭찬하는 김현조를 거들고 있다.

만약 내가 미래를 보지 못했다면, 고준태 피디의 이야기를 최건영에게 전달하고 물어봤다면, 최건영은 정말 나를 속였을까?

송기자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분은 그때부터 그러셨구나.’

사람 좋아 보이는 최건영. 나와는 잘 맞을 것 같다면서 웃던 최건영. 최건영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분명한 건 앞으로 경계해야 할 놈이라는 거지.

그렇다고 대놓고 밀어낼 순 없다. 어쨌든 둘 중 한 명이 옮기기 전까지는 같이 일해야 하는 상황이니까.

이유도 없이 밀어내면 나만 나쁜 놈이 되고, 최건영한테 ‘니가 나를 물 먹일 놈인 거 같아서 친하게 못 지내겠다.’라고 하면 내가 미친놈이 되고······ 어휴.

내 인생에 이보다 복잡한 문제를 맞닥뜨린 적이 없다. 내 뒤통수를 친 놈과, 아니 뒤통수를 칠 것 같은 놈과 앞으로 같이 일해야 하다니······ 적과의 동침이냐고.

게다가 문제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최건영은 겉으로 보면 정말 괜찮은 놈이라 자칫하다간 경계심이 흐려질지도 모른다는 거다.

조심해야지. 알고도 뒤통수 맞으면 그건 병신이지, 병신.

나는 최건영에 대한 경계심을 유지하기 위해 속으로라도 저놈을 배신자라고 부르기로 했다.

“건영 씨도 오늘 고생했어요. 눈치 빠르고 사교성도 좋고, 누가 보면 몇 년 일한 사람인 줄 알겠던데요. 건영 씨 덕분에 생방 때 편했어요.”

“감사합니다, 실장님.”

“한 잔씩 더 하죠. 설마 맥주 두 잔에 취하기야 하겠어요?”

두 잔이 세잔이 되고, 세잔은 네 잔이 되고. 우리는 쉬지 않고 마셨다.

“선우 씨. 지금 몇 시예요?”

“4시 반이요. 그런데 실장님, 말씀 편하게 하세요.”

“이게 편하다니까요.”

아까 화낼 땐 반말이 엄청 편해 보이시던데.

그나저나 오늘 하루 참 길다. 내가 상상했던 첫 출근 날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어떻게 새벽 3시 반에 출근해서 다음날 새벽 4시가 넘을 때까지 퇴근을 못 할 수가 있지?

세상에 나 같은 첫날을 보낸 신입사원이 또 있을까? 저 배신자 놈 말고.

대표 쪽은 아직도 감감무소식이고. 대체 이 사람들은 어디서 뭘 하는 거야. 3차, 아니 4차까진 갔을 시간인데.

넵튠이 넥스트 K스타에 합류한다는 건 분명한데, 언제, 어떻게 확정되는지 그 과정을 모르니까 엄청 답답하다. 아무리 급해도 방송인데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이 정하진 않을 테니까 이삼 일쯤 걸릴까?

한번 맥주를 마시니 그냥 먹고 마시자 판이 돼 버려서, 우리는 계속 생맥주를 시키고 안주를 추가했다.

그리고 새벽 5시. 드디어 모두가 기다리던 전화벨이 울렸다.

< 꿈이 아니라 미래 예지 (2) > 끝

ⓒ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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