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6화 (6/218)

< 음악방송이라는 건 (2) >

방송사 앞에는 여전히 팬들이 바글거린다. 인기 많은 아이돌이 도착했는지 펜스 뒤에서 꺅꺅대는 함성이 터진다.

누구야, 오늘도 힘내. 굶지 말고 맛있는 거 먹어. 응원할게······.

세상에 명암이 없는 직업은 없겠지만, 연예계는 빛을 받는 부분이 유난히 화려해서 그런지 그림자도 더 짙은 것처럼 느껴진다.

뭐, 쟤들은 쟤들이고. 우린 커피숍을 찾아 방송국 주변을 돌았다.

와이셔츠 안으로 찬바람이 비집고 들어온다. 양 손으로 팔뚝을 쓸어도 별 효과는 없다. 젠장. 내가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정장을 입고 왔을까. 이왕 예지몽 비슷한 걸 꿀거면 정장 입고 가지 말라는 말도 해줄 것이지.

“으으······ 춥다. 시월인데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네.”

“그러게. 이제 겨울 옷 꺼내야겠다.”

최건영이 어깨를 움츠리며 내 옆에 딱 붙는다. 생긴 것도 착해 보이는 놈이 행동거지도 살갑다. 오늘 새벽에 만났는데 벌써 오래 알고 지낸 사이 같다.

뭐, 서로 견제하면서 에너지 소모하는 것보단 친한 게 낫지. 같이 일하면서 스트레스 받게 할 타입은 아닌 것 같아서 다행이다.

“너 일 계속 할 거야?”

느닷없이 최건영이 묻는다.

“왜?”

“기왕이면 같이 오래 하고 싶어서. 너랑은 좀 잘 맞을 거 같고. 블랙아웃 알바 했을 땐 다른 매니저들이랑 안 맞아서 좀 피곤했거든.”

이렇게 사교성 좋아 보이는 놈도 안 맞는 사람이 있구나.

나는 바로 대답을 못 하고 망설였다. 생각이 복잡하다. 사실 아직도 얼떨떨하니까. 그래도 멤버들 성격도 좋은 것 같고, 사수인 김현조나 최건영도 같이 일하기에 나쁠 것 같지 않다. 더 겪어봐야 알겠지만, 첫 느낌은 그렇다.

먼저 취업한 애들 말을 들어보면 어느 회사나 또라이들이 넘쳐서 힘들다는데, 그런 걸 생각하면 분명 안 좋은 환경은 아니지.

“일은 계속 해야지. 그런데 사실 난 원래 배우 맡고 싶었거든.”

“배우?”

“어. 아이돌 매니저는 관심도 없었고, 아는 것도 없어서··· 배우 팀으로 옮길 기회가 생기면 바로 옮길 거야.”

“아······ 아쉽네. 그럼 그때까지라도 잘 해보자.”

“그래.”

“하다 보면 너도 아이돌 팀이 더 재밌어질 수도 있어.”

“하하. 나 지조 있는 놈이거든.”

“얼른 커피숍이나 찾읍시다, 지조 있는 정줌마.”

“야! 좀, 그거 나 중딩 때 별명이야.”

웃고 떠들다 보니 금방 커피숍을 발견했다. 인기 있는 가겐지 야외 테라스가 만석이다. 커피 종류 말고도 여자애들이 좋아할 것 같은 빵이나 쿠키, 샌드위치 같은 것들도 있어서 종류별로 주문했다.

계산하고 기다리는데 옆 테이블에서 남자 둘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린다.

“BYG 얘기 들었어? 타이틀 곡 중간에 퍼포먼스를 넣겠다고 1분 더 달라고 했다던데?”

“헐. 뭐야. 걔네 이번에 K팝콘에서 제일 먼저 컴백무대 하는 조건으로 자기네 회사 신인 걸그룹이랑 스페셜 무대도 하나 한다면서.”

“슈가캣?”

“어, 걔들. 근데 그걸로도 모자라서 1분을 또 달라고 했다고?”

“그렇다니까. 그래서 신인 한 팀 섭외됐다가 까였잖아. 시간 부족해서.”

“진짜?”

“그 까인 신인, 매니저가 한 달 내내 피디한테 기프티콘 날리고 부탁해서 잡은 거였다던데.”

“와. 상도덕도 없는 놈들. 얼마나 잘 먹고 잘사나 보자.”

“잘 먹고 잘살겠지.”

오늘 왜 이러냐. 아주 날 잡았네. 출근 첫날인데 연예계 약육강식의 생리는 벌써 다 배운 거 같다. 한 시간짜리 음악방송, 그것도 시청률 1, 2프로 나오는 방송인데 뒤에선 별의별 일이 다 생기는구나 싶다.

오늘 방송 나갈 기대에 부풀어 있던 그 신인 애들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내가 그 매니저였으면··· 소주나 까고 있겠지.

커피를 담은 박스와 간식 봉투를 나눠 들고 편의점에도 들렀다. 소시지, 샐러드, 푸딩, 과일, 가격도 안 보고 여자애들이 좋아할 것 같은 건 다 담았다. 이 정도면 센스 있게 산 건가······.

대기실로 돌아가자 넵튠 멤버들은 어느새 다 일어나 있었다. 몇 명은 휘적휘적 손짓 발짓을 한다. 안무연습 중인가? 아까는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더니 지금은 다들 에너지가 넘친다.

“커피랑 간식 사왔습니다!”

이송하가 제일 먼저 다가온다. 아침에도 혼자 아이스크림 통 안고 있더니 얘는 먹는 걸 좋아하는 거 같다.

“맛있는 냄새 난다. 간식 뭐뭐 있어요?”

“베이글이랑, 샌드위치랑, 편의점도 싹 쓸어왔어.”

좋아한다. 좋아해. 뭐지, 이 뿌듯함은. 왠지 먹을 걸로 길들이는 기분인데.

이태희랑 엘제이도 따끈따끈한 커피를 마시면서 간식거리를 뒤진다. 그런데 셋뿐이다. 셋이 햄이랑 치즈가 든 샌드위치를 먹고, 빵에 크림치즈를 듬뿍 발라먹는 동안 임서영은 커피만 쭉쭉 빨고 있다.

쟤는 아까 샵에서 다른 애들이 도시락 먹는 동안에도 샐러드만 먹던데, 배 안 고프나?

나는 봉지 안에서 일부러 임서영 때문에 사온 걸 꺼냈다.

“이거 저지방 요거트랑 제로칼로리 푸딩이라는데 이런 것도 못 먹어?”

“제로칼로리요?”

임서영이 관심을 보인다. 요거트랑 푸딩의 칼로리를 꼼꼼히 살피더니 얼굴이 확 밝아진다.

“이거 괜찮네. 새로 나왔나?”

“신제품이라고 써있더라.”

“진짜 맛있겠다. 잘 먹을게요, 오빠.”

요거트를 뜯은 임서영이 허겁지겁 퍼먹는다. 그 모습을 최건영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쳐다본다.

“다이어트 안 해도 될 거 같은데······.”

“제가 네 명 중에 키는 제일 작고, 바스트는 제일 크잖아요.”

“어?”

최건영이 임서영 가슴을 쳐다보다가 아차 하고 고개를 든다. 나도 그랬다. 임서영이 바스트 얘기를 꺼내는 순간 저절로 내 눈이 그녀의 가슴으로 내려갔다.

이건 본능이다. 무릎반사 같은 거지.

어쨌든 임서영의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엘제이도 볼륨감은 비슷하지만, 저쪽은 팔다리도 길쭉길쭉 탄탄해서 균형 잡힌 몸매라면 임서영은 체구가 아담하고 가느다란데 가슴만 크다. 그래서 더 커 보인다.

근데 그게 뭐가 문제지.

보는 입장에선 가장 큰 매력 포인트인데 당사자는 또 다른가?

“바스트가 있으니까 살이 조금만 붙어도 TV로 보면 둔해 보이는데, 저는 물만 마셔도 찌는 체질이에요. 그러니까 다이어트 해야 돼요.”

그러면서 작은 주먹을 꽉 쥔다. 최건영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말처럼 들린다.

엘제이가 임서영의 정수리를 누르며 비웃는다.

“니가 키가 제일 작은 건 맞는 말인데, 가슴이 제일 큰 건 아니지. 이게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사기를 치네?”

“야, 너랑 나랑 유전자가 다른 건 참작해야지!”

둘은 금방 고양이랑 개처럼 으르렁거린다. 그래도 엘제이 덕분에 임서영이 다시 기운을 차린 것 같다.

“마저 먹고 대기실 돌면서 인사하자. 슬슬 다 도착했을 거야.”

김현조가 목을 좌우로 꺾어 스트레칭하며 말했다. 잠깐 간식을 우물거리던 멤버들이 금방 손을 떼고 일어난다. 나도 샌드위치를 먹다가 덩달아 일어났다. 아직 간에 기별도 안 갔는데······.

“안녕하세요, 넵튠입니다!”

‘인사’라는 건 진짜 인사였다.

멤버들은 대기실을 싹 훑으면서 허리를 구십 도로 굽히고 인사한다. TV예능에 출연한 아이돌들이 시청자들에게 하던 그런 자기소개다.

대기실 안에 있는 가수가 넉살 좋고 오지랖 넓고 심심한 양반이면 화기애애하게 덕담이 오가는데, 아닌 경우가 더 많았다. 대부분 힘내라고 한마디가 오면 멤버들이 감사하다, 열심히 하겠다고 쏟아 붓는 게 대화의 전부다.

가끔 모가지에 철심을 심었는지 건성건성 턱만 까딱거리는 놈도 있고, 한번 슥 쳐다보고 무시하는 개매너도 있다. 저놈 이름은 써놔야지.

내가 울컥할 정돈데 넵튠 멤버들은 눈썹 하나 까딱 안 한다. 멘탈이 정말 대단하다.

나라고 멤버들 뒤를 졸졸 쫓아다니기만 한 건 아니다. 김현조가 앞장서서 명함 뿌리면서 인사하는데 가만 있을 수가 있나.

아까 목 스트레칭한 이유를 알겠다. 가수한테 인사하고, 매니저한테 인사하고, 스텝한테 인사하고, 기자한테 인사하고. ‘우리 넵튠 잘 부탁드립니다.’만 몇 번짼지. 목 아파 죽겠다.

그런데 인사는 차라리 괜찮다. 더 큰 문제는 인사하고 난 다음의 어색함이다. 최건영은 능숙하게 대화를 이어가는 것 같은데 나는 아까부터 등에 진땀이 나고 있다. 진짜 할 말이 없다.

그러다 보니 상대방을 관찰하게 된다. 내 인사를 받은 사람들은 처음엔 어려워한다. 임서영 말처럼 내가 입은 정장이 나를 높은 사람처럼 보이게 하나보다.

뒤늦게 내가 신입 매니저라고 밝히면 그제야 하하하 웃으며 편하게 대한다. 그중엔 얼굴론 웃고 있지만, 눈으론 깔아보는 놈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한 가지 좋은 건······ 연예인은 실컷 보고 있다는 거다.

여자건 남자건 모두 풀 메이크업을 하고 있어서 반짝반짝하다. 만화책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애들도 있다. 아이돌 홍수 속에 나도 아는 유명한 솔로 가수들도 보여서 몇 번이나 정신이 팔렸다.

옛날에 노래방 가면 저 형 노래 많이 불렀는데······ 사인 받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연예계 더럽고 치사하다 싶다가도 에이프런 스커트를 팔랑거리며 지나가는 여자애들을 보면 여기가 천국인가 싶기도 하고··· 잠깐, 근데 저 에이프런 안에 입은 거 설마 교복인가?

쳐다보지 말자.

“야.”

최건영이 내 발을 툭 찬다.

“왜?”

말없이 턱짓을 한다. 그쪽을 쳐다보니 섹시한 여가수가 수영복 같은 무대의상을 입고 걸어가고 있다.

여기는 천국이야.

나는 길 잃은 미아처럼 왔다 갔다 하다가 잠깐 복도 벽에 등을 기댔다. 김현조는 저 쪽에서 누군가와 얘기중이고, 최건영도 어디서 얘기중인지 화장실에 갔는지 안 보인다.

대기실 인사도 다 돌았으니까 잠깐만 쉬자. 불쌍한 내 허리.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아작나겠네.

목과 허리를 주무르고 있는데 누가 어깨를 톡톡 친다. 최건영인가 하고 돌아보니 이태희다. 깜짝이야. 얘는 처음엔 되게 털털해 보였는데 무대 화장을 하고 나니 완전 딴판이다. 리더라 그런지 묘한 박력 같은 게 있어서 아직 제대로 대화도 못 해봤다. 리더라고 해봤자 나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앤데도 풍기는 분위기가 그렇다.

“왜? 무슨 일 있어?”

“저기 서영이 잡혀 있는 거 보이세요?”

이태희의 어깨너머를 보자 임서영이 한 대기실 앞에서 여자애들 세 명에게 둘러싸여 있다.

“보여.”

“가셔서 서영이 좀 빼 와 주세요. 현조 오빠한테 얘기하려고 했는데 그쪽도 지금 다른 팀장님한테 잡혀 있어서요.”

설마 괴롭힘의 현장인가?

놀라서 유심히 봤는데 아닌 거 같다. 애들은 다 방긋방긋 웃고 있고 분위기도 화기애애하다.

그럼 뭐지?

“쟤들 슈가캣이라고, 서영이 옛날 연습생 때 동기들이에요.”

슈가캣? BYG소속사 후배그룹이라 오늘 스페셜 무대 같이 한다던 걔들?

“자기들은 점점 인지도 올라가는데 서영이는 이 년째 제자리걸음이니까 무시하거든요. 모르는 척하시고 데려와 주셨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가면 쟤 자존심 상하잖아요.”

옆에서 엘제이까지 거든다.

“알았어. 내가 데려올게.”

그 쪽으로 다가가면서 더 유심히 살펴봤다. 임서영도, 둘러싸고 있는 세 명도 하하호호 웃으면서 오랜만의 만남을 반가워하고 있는 걸로밖에 안 보인다.

내 눈은 동태눈인가. 왜 모르겠지. 여자 눈에만 보이는 뭔가가 있나.

“음······ 서영아?”

어색하게 부르자 임서영이 휙 돌아본다.

< 음악방송이라는 건 (2) > 끝

ⓒ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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