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니지먼트사업부 3팀, 신입 매니저 (4) >
방금 씻었는지 축축하게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덮은 여자, 소녀, 여자, 뭐가 됐든.
순수함과 섹시함이 공존하는 분위기. 예쁘면서도 흔하진 않은 매력적인 이목구비.
감탄이 절로 나온다. 내가 지금까지 실제로 본 사람 중에서 제일 예쁘다. 두 번째랑 격차도 어마어마하다.
쟤는 가수가 아니라 배우를 해야 되는 앤데.
“오늘도 막내가 제일 일찍 일어났네. 어제 연습하느라 늦게 잤잖아. 안 피곤해?”
“피곤해도 해야지······ 오랜만에 방송 스케줄인데.”
“이송하 다 컸네.”
넵튠의 막내 이송하.
프로필에 따르면 올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전원이 비주얼 담당이라는 넵튠 멤버 중에서도 우월한 비주얼. 아무 생각 없이 멍때리고 있어도 사색하는 것처럼 보이는 분위기 깡패.
포지션은 서브보컬에 서브댄서라는데, 이 포지션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좀 더 공부해야 할 것 같다. 축구나 야구 포지션은 알아도 걸그룹 포지션은 처음이라서. 이렇게 세분화 되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문화충격 수준이다.
“오빠. 우리 언제 출발해?”
“4시 반엔 나가야지. 30분 남았네.”
“알았어.”
목소리까지 좋다. 노래하는 애니까 발성은 기본적으로 좋을 거고, 딕션도 또렷하고, 무엇보다 리듬이 느껴진다. 듣는 사람 귀에 그냥 꽂히는 중독성 있는 목소리.
저거 귀한 건데.
배우였으면 지금까지 한 작품 다 모았을 텐데 눈물 나게 아깝다.
이송하가 졸린 눈을 비비며 내 쪽으로 다가온다. 수건을 덮어 놨을 뿐인 머리카락에서 물이 한 방울씩 떨어진다. 닦아주고 싶어서 손이 움찔거렸다. 이송하는 내 코앞까지 와서 멈췄다.
이거 인사 할 타이밍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이송하가 고개를 꾸벅한다. 그리고 내가 인사를 돌려주기도 전에 하얗고 긴 목을 기울여 내 뒤를 본다.
“조금만 비켜주세요.”
“예? 아, 네.”
용건은 내가 가리고 있던 냉장고에 있었나 보다. 내가 비켜서자 냉동실 문을 연 이송하가 아이스크림 통을 꺼낸다. 두꺼운 매직으로 ‘이송하 거’라고 써 있다.
저런 건 네쌍둥이가 있는 집에서나 하는 줄 알았는데······.
“다들 일어나자!”
김현조가 다시 소리를 친다.
“막내는 벌써 깨서 준비하고 있는데 언니들은 뭐하고 있어!”
그의 모습이 애 넷을 깨워서 유치원에 보내고 등교해야 했던 내 옛 모습과 겹쳐진다.
하아······ 전쟁이었지. 하나 깨워놓으면 하나가 소파에 엎어져서 자고, 또 하나 깨워놓으면 다른 놈이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가는 끝이 없는······ 젠장. 애들 소환 좀 그만하자. 파릇파릇한 신입사원이 아니라 육아에 찌든 워킹대디 같잖아!
“굿모닝······.”
공룡 스티커가 붙은 방문이 열린다. 헝클어진 곱슬머리. 노란색 원피스 잠옷을 입은 여자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눈을 비비며 나온다.
쟤가 임서영.
나이는 스물하나. 포지션은 서브보컬. 리드댄서. 프로필에는 러블리한 베이비 페이스에 볼륨 넘치는 반전 몸매라고 써 있었다.
정말 그대로다. 모르고 보면 이송하가 아니라 쟤가 막내다. 꼭 고등학생 같다.
넵튠의 예능담당이기도 하다. 들어본 적 없는 케이블 프로에서 잠깐 객원 리포터도 했고. 무명이나 다름없는 넵튠의 인지도를 올리려고 동분서주하는 소녀 가장.
“오빠······.”
“그래. 잠 깨, 얼른.”
비틀비틀 걸어오던 임서영이 갑자기 눈을 번쩍 뜬다.
“이송하. 너 살찐다. 그거 칼로리 얼만 줄 알아?”
선 채로 아이스크림을 퍼먹던 이송하가 임서영을 힐금 보고 등을 돌린다. 아이스크림 통을 숨기듯 끌어안고 계속 숟가락질을 한다.
“그러고 먹으면 안 보이니?”
“언니가 안 보면 되잖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데 어떻게 안 봐!”
“그럼 한입 줄까?”
“유혹하지 마! 살쪄!”
“새벽부터 떽떽떽떽 잔소리······.”
“언니한테 떽떽? 와, 오빠 쟤 말하는 것 좀 봐. 한마디를 안 져. 너 다른 팀 같았으면 어린 게 버릇없다고 매일 욕 먹고 어디 숨어서 질질 짜다가 못 버티고 그만뒀을걸. 성격 나쁜 애들 얼마나 많은 줄 알아? 넌 우리 팀 들어와서 진짜 호강하는 줄 알아라.”
러블리하다는 임서영은 알고 보니 이 집의 바가지 담당이었다. 잔소리가 길어지자 김현조가 임서영의 어깨를 욕실로 민다.
“다른 애들 깨울 동안 얼른 씻고 나와. 간단하게 뭐··· 사과라도 먹을래?”
“응응! 고마워, 오빠.”
겨우 임서영을 욕실로 들여보낸 김현조가 한숨을 쉰다.
“둘은 됐고, 난 나머지 둘 깨워야 하니까 누가 사과 좀······.”
“제가 할게요.”
손을 들었다. 이건 자신 있다. 냉장고 신선실에서 큼직한 사과 두 개를, 싱크대 구석에서 과도를 찾았다. 곧 내 손에서 종이처럼 얇은 껍질이 줄줄 벗겨진다.
이거 봐라, 이거. 내가 봐도 감탄을 안 할 수가 없는 솜씨다.
구경하던 최건영도 박수친다.
“예술이네.”
“내가 지금까지 깎은 과일 다 합치면 과수원 하나 나올걸.”
네쌍둥이 간식을 매일 챙기다 보면 저절로 과일 깎기의 달인이······ 그만 좀 하자. 지나치다, 진짜.
사과 두 개를 깎아서 접시에 담고 포크를 콕콕 박는다. 때마침 넵튠의 나머지 두 멤버도 기상했다. 금발 혼혈의 메인래퍼 엘제이. 그리고 팀의 맏언니이자 메인보컬. 카리스마 있는 리더 이태희.
프로필에 의하면 그런데······.
이태희는 티셔츠 안으로 손을 집어넣고 배를 벅벅 긁는다. 김현조가 재촉하는데도 아주 태연히 소파에 앉아서 다시 졸고 있다. 엘제이는 내 앞에서 스트레칭하면서 사과를 먹고 있고.
“이거 맛있어요. 달다.”
“많이 먹어요. 먹고 모자라면 또 깎아줄 테니까.”
왜 마트의 시식담당 알바가 된 것 같지.
그래도 바비인형의 시식 담당이라면 할 만하다. 이태희가 모델처럼 길쭉길쭉 늘씬한 몸매라면, 엘제이는 혼혈답게 완벽한 콜라병이다. 볼륨감 넘치는 가슴과 에스라인을 따라 흐르는 허리, 골반, 짧은 트레이닝팬츠 아래로 시원하게 뻗은 다리는 비현실적으로 보일 정도다.
걸그룹 담당은 좋구나. 엄청 좋은 거였어.
“야, 사과 내 거 남겨놔!”
“싫은데?”
씻고 나온 임서영이 다급하게 말하자 엘제이가 마지막 사과조각을 들고 약 올린다. 둘이 티격태격하는 건 흔한 일인지 김현조는 말리지도 않고 한숨만 쉬고 있다. 결국 내가 사과를 더 깎았다.
그 후로 멤버들이 씻고, 옷 갈아입고, 나갈 준비를 하는 동안 나와 최건영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기다렸다.
그래도 나는 넵튠 멤버들에게서 익숙한 조카들의 모습을 보고 긴장이 좀 풀렸는데, 최건영은 아직도 뻣뻣하게 굳어있다.
“이거 진짜 적응 안 되네.”
“그러게. 첫날이니까 뭐.”
최건영이 입을 가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나 남중, 남고, 공대 나왔거든. 누나나 여동생도 없고.”
“그럼 적응 안 될 만 하네.”
“그렇다니까. 그래도 좋긴 좋다.”
“완전 좋지.”
우리는 올라가는 입 꼬리를 열심히 가렸다.
거실에 여자애들 넷이 다 모이자 김현조가 박수 친다.
“이제 다들 정신 차렸으면 인사 좀 하자. 한동안 같이 일할 식구들이야.”
“뭐야, 매니저 오빠 또 바뀌는 거야?”
“철형오빠는?”
“그놈 잠수 탔어. 전화번호도 바꿨더라.”
“진짜? 너무한다. 말은 좀 하고 그만두지.”
“짜증 나니까 그놈 이름도 꺼내지 마.”
“그런데 난 그럴 거 같았어. 뚱해서 맨날 다리만 쳐다보고 좀 그렇더라.”
임서영이 투덜거리자 엘제이가 임서영의 다리를 훑어본다.
“네 다린 걱정하지 마. 여기 다리가 몇 갠데 굳이 네 다리까지 봤겠어?”
“뭐?”
동갑내기 둘이 틈만 나면 다투는데도 리더인 이태희는 간섭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방목형 리더다. 그리고 이송하는 아까부터 사과 심을 들고 남은 살을 꼼꼼히 갉아 먹고 있다.
“얘기가 또 산으로 가네. 인사하라니까. 우리 시간 없어.”
김현조가 내 등을 두드린다. 침을 삼키고 최선을 다해 웃었다.
“안녕하세요, 정선웁니다.”
“나이는······ 너희보단 훨씬 많고, 별명은 정줌마래.”
“실장님. 그건 옛날 별명···.”
임서영이 손을 든다.
“질문이요! 별명이 왜 정줌마예요?”
“조카가 네쌍둥이라 베이비시터 했대.”
“우와아.”
의도한 건 아니지만, 네쌍둥이 조카는 여기서도 통했다. 멤버들이 나를 우러러본다. 내 이미지 이대로 괜찮은 건가.
“그리고 여긴 최건영. 블랙아웃하고 잠깐 같이 일했대.”
“큼, 안녕하세요. 최건영입니다.”
넵튠 멤버들도 줄줄이 인사한다. 그냥 평범한 인사다. 연예인 중에는 매니저한테 욕하고 짜증 내면서 스트레스 푸는 애들도 있대서 걱정했는데, 얘들은 전혀 그럴 것 같지 않다.
아직 안 떠서 그런가? 얘들도 뜨면 변할까?
애들이 어린 만큼 말은 놓기로 했지만 마음의 준비가 좀 필요하다. 이런 미인을, 그것도 네 명이나 되는 미인들을 코앞에서 보는 건 평생 처음이라. 적당히 예쁘면 모를까 너무 넘치게 예쁘니까 아직 부담스럽다.
차차 익숙해지겠지.
잠깐. 익숙해져서 눈이 너무 높아져도 문제 아닌가?
“새 식구랑 인사도 했고. 이제 가자. 일어나.”
김현조가 시계를 보며 재촉한다. 우리는 모두 엉덩이를 떼고 일어났다.
“밖에 추워, 오빠?”
“좀 춥더라. 위에 뭐라도 입고 나와.”
멤버들은 가녀린 어깨 위에다 겉옷이나 담요를 한 장씩 걸치고 나왔다.
바깥은 그때까지도 깜깜했다.
청담동에 있는 미용실까지 차로 30분. 아티스트들이 달라붙어서 머리하고 화장하는 동안 또 두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매니저들이 하는 일은 담요와 가방들을 지키면서 기다리는 게 전부다.
김현조는 자고, 최건영은 졸고, 나는 하품을 하면서 핸드폰을 만졌다. 넵튠의 자료를 수집하는 중이다. 잘 나온 사진을 저장하고 음악 방송에 출연한 영상을 찾아 모니터링도 했다. 노래도 음원을 다운로드해서 계속 듣고 있다.
지난 2년 동안 넵튠이 낸 앨범은 모두 네 장. 하나는 꽉 찬 정규앨범, 하나는 네 곡짜리 미니앨범이고 나머지 둘은 달랑 한 곡씩 있는 디지털 싱글이다.
몽땅 망했다. 곡 개수가 열곡이 넘는데도 내가 들어본 노래가 하나도 없다.
타이틀곡들은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특히 이번 싱글 같은 경우는 후렴구가 귀에 쏙쏙 박힌다. 앨범 정보를 보니 작곡가 이름이 익숙하다. 내가 익숙할 정도면 유명한 사람인 거다.
안무도 3분을 멍하니 볼 만큼 좋고, 뮤직비디오도 돈을 좀 들인 티가 난다. 그런데 음원 사이트를 다 뒤져봐도 차트 안에서 노래를 찾을 수가 없다.
얘들 왜 못 뜨는 걸까?
노래 괜찮고 얼굴 예쁜 것 말고 뭐가 더 필요한 거지? 역시 운인가?
예전에 전국을 들었다 놨다 했던 그 걸그룹. 무명의 중고 신인이었는데, SNS를 타고 퍼진 동영상이 화제가 돼서 차트에도 없던 곡이 1위까지 치고 올라갔었지.
곡이 그만큼 좋았다, 뜰만 한 그룹이었다, 뜰 애들은 결국엔 뜬다고 얘기하지만 그거야 떴으니까 할 수 있는 얘긴 거고.
이런 사례가 한둘이 아니다. 역시 노래와 비주얼 말고도 운이 필요한 건가. 그건 참······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노력만으로 가능한 것도 아니고. 아이돌 기획하는 사람들도 참 골치 아프겠다.
아니 생각해보면 아이돌만 그런 것도 아니지. 배우들도 얼굴 예쁘고 잘생기고 연기까지 잘하는데 못 뜬 배우들이 수두룩할 테니까. 지금 흥행보증수표라고 불리는 탑배우들만 봐도, 사실 아무도 모르는 무명세월이 길었던 사람들 많고······ 흠. 그런 사람들이 뭘 계기로 떴는지 자료조사 좀 해놔야겠다.
7시쯤엔 밥심부름을 했다. 편의점에 가서 먹을 만한 걸 사오라길래 도시락이랑 샐러드 같은 것들을 잔뜩 쓸어왔다. 그게 아침식사다. 꼴을 보니 이 일 하면서 끼니를 제대로 챙기긴 글렀다.
멤버들 분장을 마치고나서 다시 승합차에 구겨져 들어갔다. 오늘 스케줄은 케이블 방송사의 음악방송이다.
K팝콘서트. 줄여서 K팝콘.
조카들이 애청자라 나도 덩달아 몇 번 같이 봤다. 우르르 나와서 노래하고 들어가고, 우르르 나와서 춤추고 들어가고 그런 거. 내가 보기엔 얘나 쟤나 똑같은데 조카들은 이름을 줄줄 대서 깜짝 놀랐지······.
차는 올림픽대로를 타고 상암동으로 달렸다. 출근하는 차들로 도로가 복잡하다.
나는 창밖을 보면서 하품을 하다가 세상이 밝아진 걸 알아차렸다.
아침이었지, 참.
체감으론 출근하고 반나절은 지난 것 같은데, 이제 막 하루가 시작되는구나.
< 매니지먼트사업부 3팀, 신입 매니저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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