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3화 (3/218)

< 매니지먼트사업부 3팀, 신입 매니저 (3) >

안 되지. 내가 오늘을 얼마나 준비했는데.

“형이 저보다 나이가 열세 살이 많거든요.”

내 말에 김현조가 한숨을 쉰다.

“그럼 정선우씨 완전 늦둥이네요. 막내에 늦둥이면 정말 애지중지 컸겠네. 그럼 이 일 하기 좀 힘들 텐데…….”

늘 따라오는 선입견이다.

귀하게 자랐겠다. 다들 오냐오냐했겠네. 딱 봐도 도련님 스타일이구만. 그럼 근성 없겠는데.

이런 것들 말이다. 군대에서도 귀 따갑게 들었다.

하지만 나는 억울하다.

“제가 중학생 때 형이 결혼했어요.”

“네?”

“이듬해에 형수님이 임신을 해서 산부인과에 갔다 왔는데, 배 속에 네쌍둥이가 있다고 그러더라구요.”

“헐?”

집안이 뒤집어졌던 그날을 기억한다. 늘 조용하고 건어물처럼 건조하던 형이, 웃는건지 우는건지 헷갈리는 얼굴을 하고서 말했지.

아버지, 엄마, 네쌍둥이라네요. 하하하하하……하…….

김현조와 최건영이 휘둥그런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애가 태어나면 형수님이 일 관두고 육아에 전념할 계획이었는데, 넷이나 되니 못 그만두셨죠. 맞벌이로 일해야 간신히 분윳값이라도 댈 판이었거든요.”

“그, 그랬겠죠. 애가 넷이면 분윳값이랑 기저귓값만 해도 얼마야.”

“결국 조카 넷을 저희 어머니가 떠맡으셨는데, 어머니 혼자서도 감당이 안 되더라고요.”

“아아…….”

“그래서 저도 거들다 보니, 중학교 때는 애들 똥 기저귀 갈고 우는 애들 달래면서 보냈고, 고등학교 대학교 때도 거의 베이비시터였어요. 몸에서 아기 젖 냄새가 풀풀 나서 한때 제 별명이 정줌마였다니까요. 하하하.”

“어…….”

“그래서 제가 막내에 늦둥이는 맞는데 대접은 하나도 못 받고 살았죠.”

“야아…… 고생 많이 했겠네요. 애 넷을 똥 기저귀 갈면서 키웠으면 걸그룹 여자애들 뒤치다꺼리야 일도 아니겠네.”

계획대로다.

이걸로 꿈에서처럼 첫눈에 찍히는 일은 피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천만다행이다. 만약 꿈을 꾸지 않았더라면 지금 내 머릿속엔 걸그룹이라니 망했다, 망했다, 망했다, 어떡하지, 이 생각밖에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정말 망했겠지.

걸그룹에 배정된 건 아직도 충격적이고 얼떨떨하다. 하지만 마음에 안 든다고 때려치울 수는 없다.

W&U는 내가 알아본 회사 중 가장 조건이 괜찮다.

다른 회사랑 비교하면 월급도 좋은 편이고,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해외시장을 끊임없이 개척하고 있는 회사라 배울 것도 많을 거다.

무엇보다 로드 매니저에서 관리직으로 올라가는 시스템이 체계적이고 안정적이다. 이게 제일 큰 장점이다. 주먹구구식 회사에선 몇 년씩 운전만 시키는 경우도 많다고 하니까.

여길 나간다고 지금보다 좋은 조건의 직장을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도 없고, 이렇게 된 거 가요판과 예능판을 먼저 경험해 보는 것도 괜찮을 거다. 배우들도 예능 게스트 출연은 웬만하면 다 하니까. 걸그룹 담당하면서 경력을 쌓다보면 곧 배우 쪽으로 갈 기회도 생길 거다.

생기겠지…… 젠장.

넵튠의 프로필을 들었다.

걸그룹. 혀 위에서 굴러가는 발음이 낯설다. 내가 이름을 외우고 있는 걸그룹은 정말 유명한 몇 팀과 군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접한 애들. 그리고 드라마나 영화에 출연한 애들뿐이다.

그중에 넵튠이라는 이름은 없다.

넵튠(Neptune).

보이그룹인 블랙아웃을 단숨에 스타덤에 올린 후 W&U에서 심혈을 기울여 프로듀싱한 두 번째 아이돌. 4인조 걸그룹. 올해 데뷔 2년 차.

멤버 전원이 비주얼라인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뛰어난 외모가 강점.

프로필 사진을 보니 확실히 각각 다른 매력을 가진 미인들이다. 스치듯이라도 본 얼굴이 있나 싶어 한참을 봤지만 눈만 아플 뿐이다. 마지막 장까지 꼼꼼히 보고 프로필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다시 꿈이 떠오른다.

아무리 예지몽이래도 이렇게 용할 수 있나? 내가 신내림을 받은 것도 아닌데. 걸그룹까지는 들어맞을 수 있다고 해도, 데뷔 연차와 그룹 이름까지 맞는 건 너무 소름 돋게 용한 거 아닌가.

잠깐. 혹시 그건가?

W&U에 대한 기사를 검색했을 때 넵튠이라는 팀명이랑 데뷔 연차 같은 걸 스치듯이 봤을 수도 있다.

내 기억에는 없지만, 사실은 무의식에 남아있다가 꿈에 나온 건 아닐까. 적어도 예지몽보다는 이게 더 그럴듯하긴 하다.

그래도 출세한 내 모습을 생각해보면 예지몽도 나쁘진 않은데…….

“선우씨. 프로필 다 봤어요?”

“네, 다 봤습니다.”

네쌍둥이 조카들을 팔아치운 덕분에 김현조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누그러진 상태다.

“우리 매니지먼트 3팀이 W&U에서 제일 빡센 팀이에요. 육체적, 정신적, 감정적으로 전부. 이 팀에서 일 조금만 시켜보면 대충 각이 나와요. 쟤는 오래 하겠네, 쟤는 금방 그만두겠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자세를 바로 했다.

“이 바닥에 들어오는 사람들 전부 메이저 회사 대표가 되겠다고 거창한 꿈 꾸고 들어오는데, 대표는 개뿔, 열 명 중에 일고여덟 명은 일 년도 못 채우고 다 때려치워요. 위에서야 요즘 애들은 기본이 안 돼 있네, 나 옛날엔 더 힘들었네 하지만…… 솔직히 그럴만하죠. 요즘엔 거의 대학까지 배우고 들어오니까. 내가 어린 여자애들 운전기사하고 김밥 사다 나르려고 십몇 년을 공부했나? 그런 생각이 왜 안 들겠어요.”

“…….”

“그리고 박봉이지, 먹고 자는 거 못 챙기니까 몸 망가지지, 주변에 갑질하는 놈들은 수도 없는데 우리는 맨날 피디님, 작가님, 감독님, 굽신거리고 다녀야 되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때려치울까 하는 생각이 들죠.”

나랑 최건영은 벙어리처럼 듣기만 했다.

이 바닥 거지 같고 성공하기 힘드니까 그냥 때려치우란 소린가?

이 일이 정말 하고 싶어서 뛰어들긴 했지만 나도 무작정 환상만 좇아온 건 아니다. 매니저가 극한직업인 거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연예계 바닥 더럽고 치사하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내가 오늘 첫 출근한 두 사람한테 이런 얘길 왜 할까요?”

우리는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각자 대답했다.

“선배님이시니까, 저희한테 조언을…….”

“일단 현실을 알아야 부딪…….”

“그만둘 거면 빨리 그만두라구요.”

“…예?”

“일 다 가르쳐놨는데 그만두면 내가 뭐가 돼요. 신입 다시 뽑아서 같은 일 또 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안 될 거 같으면 하루라도 빨리 그만두고 다른 길 찾아보라구요. 어중간하게 보름, 한 달, 그렇게 해서 피곤하게 하지 말고.”

와. 이건 역대급 첫 출근이다.

세상 모든 신입사원이 다 이런 소리를 듣진 않겠지.

“할거면 잘 하구요. 오케이?”

“알겠습니다.”

“네.”

일은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기가 다 빨렸다. 가슴에 묵직한 돌이 들어앉은 것처럼 속이 답답하다. 우리는 말 한마디 없이 5분 정도를 더 달렸다.

“다 왔네요, 저 빌라예요.”

승합차가 빌라 앞에 선다. 아이돌 숙소는 뭔가 특별한 점이 있을 줄 알았는데 겉보기엔 별거 없다.

최건영이 차에서 내리며 묻는다.

“블랙아웃 숙소랑은 되게 다르네요.”

“걔들이랑 비교하면 안 되죠. 걔들은 사생들이 있잖아요. 이렇게 보안 시스템 허술한 데서 살면 난리 나요.”

“하긴… 요즘 사생들 무서우니까요.”

“소름 끼치죠. 저번에 누가 그랬더라, 스케쥴 끝내고 집에 들어갔더니 사생이 옷장 속에 숨어있었대요. 사이코들 많아요.”

나도 두리번거리며 하나 물었다.

“넵튠은 그런 팬은 없나 봐요?”

“없죠. 그냥 팬도 없는데 사생팬이 어딨어요. 그런데 걸그룹은 뜨고 나서도 보이그룹처럼 사생 때문에 피곤하고 그런 건 없어요. 가끔가다 팬싸나 행사 때 한번 만져보려고 달려드는 미친놈들은 있지만. 변태 새끼들.”

질색하면서 김현조가 빌라 안으로 들어간다. 나와 최건영은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옆을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어색함과 함께 아주 약간의 동지애가 느껴진다. 우리는 동시에 웃었다. 최건영의 뺨에 보조개가 깊게 팬다. 첫인상도 그랬지만 성격 좋다고 써 있는 얼굴이다. 내 인상은 어떻게 보이고 있을까. 재수 없는 놈처럼만 안 보였으면 좋겠는데.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저 스물일곱 살이에요.”

“어? 저도. 08학번이요. 동갑인데 말 놓을까요?”

“그러자.”

더 봐야 알겠지만, 지금까지는 괜찮은 놈 같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갔다. 김현조는 벨을 누르지 않고 바로 도어락을 열어 비밀번호를 누른다.

철컹.

거실은 아직 깜깜하다. 더듬더듬 구두를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걸그룹 멤버들만 사는 숙소라서 그런지 낯선 세계를 침범하는 기분이다.

사실 좀 긴장된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뒤따라오는 최건영도 긴장한 티가 역력하다.

김현조가 불을 켜자 거실이 환하게 밝아진다.

집은 그렇게 크지 않다. 내 원룸보다야 훨씬 낫지만 넷이나 모여 살기엔 북적북적할 것 같은 느낌. 동글동글 귀엽게 생긴 소파. 그 위에 늘어놓은 캐릭터 쿠션과 인형. 크림색 러그. 여자애들의 공간이라는 게 확 와 닿는다.

“얘들아! 일어나서 준비하자! 다섯 시까지 샵 가야 돼!”

쾅쾅!

김현조가 방문을 두 번씩 두드린다.

가장 먼저 열린 건 베란다 왼쪽에 있는 문이었다.

“오빠, 일찍 왔네.”

와.

와…….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 보면 갑자기 화면의 때깔이 화사해지면서 여주인공이 끝내주게 예뻐 보일 때가 있다. 연출자가 힘을 빡 주려고 비장의 필터를 장착하거나 보정을 때려 넣은 화면…….

지금 내 눈앞에 그런 화면이 보인다.

< 매니지먼트사업부 3팀, 신입 매니저 (3) > 끝

ⓒ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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