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매니지먼트-1화 (1/218)

< 프롤로그 >

어렸을 때 난 문제집을 사면 맨 뒤에 있는 답안지부터 뜯어내야 하는 애였다.

그러지 않으면 문제를 풀다가 조금만 막혀도 답안지를 훔쳐봤다. 풀이과정과 정답. 그 달콤한 유혹을 나는 이기지 못했다.

오히려 그걸 참는 애들이 신기했다.

어떻게 참지?

어쨌든 그건 어렸을 때 일이다. 나는 이제 문제집이 필요 없는 나이가 됐고, 내가 앞으로 부딪쳐야 할 인생에는 훔쳐볼 답안지가 없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내 눈에 인생의 답안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 프롤로그 > 끝

ⓒ 장우산#

< 매니지먼트사업부 3팀, 신입 매니저 (1) >

어어…… 내가 지금 꿈을 꾸나?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나는 지금 처음 보는 사무실에 앉아있으니까.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크고 좋은 사무실에.

눈은 즐겁지만 있으면 안 되는 곳에 와 있는 느낌이라 부담스럽다. 드레스코드가 있는 고급 호텔 레스토랑에, 목이 늘어나서 잠옷 아니면 걸레로밖에 못 쓸 티셔츠랑 욕실 슬리퍼 차림으로 앉아있는 것 같은. 그런 심정이다.

꿈이겠지?

저기 탁자 위에 홀로그램 같은 게 둥둥 떠 있는데, 당연히 꿈이겠지.

희한하네. 요즘 SF영화를 많이 본 것도 아닌데 왜 이런 꿈을 꾸지?

어라. 창밖에 구름이 보인다.

운동장처럼 넓은 사무실은 한쪽 면이 통째로 유리창인데, 바깥에 구름이 흘러가고 있다. 꼭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은 풍경인데…… 저거 진짜 구름인가? 아니면 영상? 진짜라면 이 사무실 대체 몇 층인 거야?

아냐, 오버테크놀로지 세계관이라면 아예 사무실이 날고 있을지도 모르지.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할 수 없다.

내가 이걸 꿈이라고 생각하는 두 번째 이유.

지금 내 몸은 꼭두각시처럼 내 통제를 벗어나 움직이는 중이다. 저절로 고개를 돌려 창밖의 구름을 한 번 봤다가, 손목시계도 한번 봤다가.

“흠…… 슬슬 2시네요.”

입이 저 혼자 움직이면서 말까지 한다.

내가 통제할 수는 없지만, 감각은 확실하게 느껴진다. 시각. 청각. 후각. 피부감각. 미각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침을 삼키는 게 텁텁한 걸 보면 이것도 느껴지는 것 같고.

좀 소름 끼친다. 이게 자각몽이라는 거구나.

“그러네요. 정대표님 준비되셨으면 슬슬 인터뷰 시작할까요?”

사근사근할 말투. 내 고개가 돌아간다. 맞은편에 앉은 여자를 바라보고 있다.

사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여자다. 목소리만 듣고 푸근한 얼굴을 상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밝은 금발에 숏커트. 잔주름 위에 뾰족하게 그린 눈화장이 까다롭고 도도한 인상을 풍긴다. 포인트는 잉크처럼 선명한 검은색 입술.

음? 검은색 입술?

립스틱 취향 참 특이하네.

그런데 내가 이 여자를 어디서 본 적이 있나? 꿈속에 나오는 등장인물은 현실에서 본 얼굴로 조합된다고 하던데.

“그러시죠.”

내 입이 또 움직인다.

“그런데 뭐하러 박국장님까지 오셨어요.”

“정대표님 독점 인터뷴데 당연히 직접 와야죠. 그래야 대표님이 시간도 좀 더 빼 줄 거고. 안 그래요? 우리가 그럴만한 사이는 되잖아요.”

“하하, 그럼요. 인터뷰도 박국장님이 하실 거예요?”

“인터뷰는 송기자가 하고 저는 중간중간 간섭이나 하려구요. 저야 정대표님 스토리를 알 만큼 아니까, 아예 어린 친구가 하는 게 고정관념도 없고, 새로운 소스 뽑아내기에도 더 좋을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박국장 옆에 젊은 여자가 함께 앉아있다. 작은 얼굴 안에 다양한 인종이 보이는 혼혈미인이다. 몸매도 끝내준다. 그런데도 박국장의 존재감이 워낙에 세서 눈이 잘 안 간다.

“인사드려, 송기자.”

“네! 안녕하세요, 정대표님. 송송입니다.”

이 순간만큼은 다행이다. 내가 몸을 통제했다면 웃었을지도 몰라.

“송기자님. 반갑습니다.”

내 몸은 특이한 이름을 가진 혼혈미인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눈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으니, 나는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눈에 보이는 것들도 꼼꼼히 보고. 자각몽을 꾸는 건 처음이라 모든 게 신기하다.

송기자를 보고 있던 눈이 움직인다. 컴퓨터나 TV의 모니터가 아닐까 싶은 화면이 스치듯 보였다. 까맣고 반들반들한 화면 위로 떠오른 얼굴도. 잠깐이었지만 똑똑히 확인했다.

내 얼굴은 이십 년쯤 늙은 모습이었다.

어쩐지 중년 나이인 박국장이랑 너무 편하게 대화한다 싶었지.

몸이 또 움직인다. 이번엔 아래를 내려다보며 옷차림을 단정하게 고친다. 영국에서 비밀요원으로 활동 중인 신사들이 입을 것 같은 클래식한 정장. 넥타이. 손목에 착 감기는 가죽 시계. 명품을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한두 푼 하는 물건들은 아닌 것 같다.

나 돈 좀 버나 본데?

국장씩이나 되는 기자가 정대표님, 정대표님, 하며 비위를 맞추는 걸 보면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모양이고.

꿈은 무의식의 발현이라더니…… 나 혼자 꾸는 꿈이라 망정이지 누가 알면 이불킥감이다.

“자, 그럼…….”

송기자가 잔뜩 긴장한 티를 내며 인터뷰를 시작한다.

“정선우 대표님 하면 아무래도 성공 스토리를 빼놓을 수가 없는데요. 밑바닥에서 시작해서 칠전팔기의 노력 끝에 이렇게 글로벌 매니지먼트사의 대표가 되셨으니까요. W&U에서 처음 일을 시작하셨는데, 처음 출근하던 날 혹시 기억하세요?”

“그럼요. 오래전인데도 그 날은 기억이 생생해요. 첫 출근이라 잠이 안 와서 뒤척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새벽 4시까지 회사로 오라고 연락을 받았거든요. 한숨도 못 자고 형 차 얻어타고 바로 출근했었죠.”

“사회인으로서의 첫날은 어떠셨어요?”

“아, 그날 정말 다이나믹했어요.”

“어떤 점이요?”

“매니지먼트 사업부에 지원할 때까지만 해도 저는 당연히 배우를 담당하게 될 줄 알았어요. 워낙 영화랑 드라마를 좋아했고, 제 손으로 직접 세계적인 배우를 키우는 게 꿈이었으니까. 면접 때도 그걸 강하게 어필했었는데…….”

그런데?

“막상 출근하고 보니까 데뷔 2년 차 걸그룹 팀으로 배정된 거예요.”

얼씨구?

혹시 내가 첫 출근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나?

그래서 이런 꿈을 꾸나?

나는 실제로 W&U에 입사면접을 봤고, 합격통지를 받았고, 첫 출근을 앞두고 있다. 배우를 담당하고 싶은 것도 맞다.

내가 W&U에 지원한 이유도 배우풀이 넓고 탄탄하기 때문이다. 그 중엔 충무로 흥행보증수표나 한류스타 같은 타이틀을 달고 있는 톱스타도 여럿이고, 작은 배역이지만 할리우드로 진출한 배우도 있다.

W&U에서 합격통보를 들은 이후부터는 어떤 배우에게 배정될지에 대한 기대와 걱정으로 밤잠도 설쳤다.

그런데 난데없이 걸그룹?

이름은 모르지만, W&U에 걸그룹이 있다는 건 안다. 설립 이후 쭉 배우들의 매니지먼트만 담당하다가 몇 년 전부터 아이돌 기획으로 영역을 확장했다고 들었다.

아이돌 산업이 레드오션이라고들 하지만, 그래도 일단 띄우기만 하면 수익성이 좋으니까.

처음 기획한 건 11인조 보이그룹인데 전생에 나라를 구했는지 1집 앨범을 발매하자마자 빵 떴다. 괴물 신인이라고 불리며 그해 신인상이란 상은 다 휩쓴 효자그룹이라고, W&U의 기사에서 봤다.

그룹 이름은 가물가물한데 별명은 기억난다. 초등학생들이 환장한다고 초통령.

데뷔한 그 해에 투자금 회수, 흑자로 돌아서며 돈을 갈퀴로 쓸어담았댔지.

그 성공에 고무된 W&U는 걔들이 벌어온 돈을 그대로 다시 투자해 본격적으로 아이돌을 키우기 위한 인하우스 시스템을 구축했고, 새로운 걸그룹을 시장에 내놓았다.

내가 아는 건 딱 여기까지다. 내가 읽은 W&U 기사들에는 걸그룹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았으니까 뭐, 망했나 보지. 그 이상은 관심이 없어서 알아보지도 않았다.

난 걸그룹이 아닌 배우를 담당할 거니까.

“그때부터 넵튠이랑 정대표님의 인연이 시작된 거네요.”

넵튠?

한때 유행했던 TV 만화의 미소녀전사가 생각나는 팀명인데.

“당시에는 아주 당황스러우셨겠어요.”

“듣자마자 망했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결과적으로도 망하긴 했죠. 출근 첫날부터 완전히 찍혔거든요.”

“네? 찍혀요?”

“그때야 저도 사회초년생이었고, 배정이 마음에 안 든다는 티가 확 났을 텐데 첫인상이 좋았을 리가 없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고생문이 활짝 열렸던 거죠. 제 인생을 칠전팔기라고들 하지만, 첫날 첫 단추를 잘못 끼우지만 않았으면 그렇게까지 넘어지진 않았을 거예요.”

“……우야, 정선우!”

머리는 무겁고 가슴은 답답하다. 오랫동안 잠수를 하다가 수면 위로 떠오른 기분이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안전벨트가 가슴을 짓누르고 있다. 벨트를 풀고 기침을 했다.

옆에 앉은 사람이 내 어깨를 두드린다.

누구지?

아, 형. 두꺼운 뿔테안경과 심심한 얼굴. 형이 맞다. 주위를 둘러보자 크고 멋진 사무실은 온데간데없다.

여긴 형의 차 안이다.

“뭐야?”

“뭐긴 뭐야. 다 왔어. 첫 출근하는 놈이 정신 번쩍 차려야지. 너 선배들 앞에서도 멍때리고 그러면 안 된다. 내가 매니저는 잘 모르지만, 어떤 직업이든 신입은 무조건 빠릿빠릿해야 돼.”

“멍때린 게 아니라 깜빡 졸았나 봐.”

“졸긴, 너 십 초 전에도 나랑 얘기하고 있었는데? 눈도 뜨고 있었고.”

뭐라고?

“무슨 소리야. 나 꿈도 꿨는데?”

“십 초 만에 잠들어서 꿈까지 꿨다고?”

형이 비웃는다. 내가 생각해도 그렇다.

그런데 난 분명 꿈을 꿨다. 그것도 자각몽. 꿈속에서 보고들은 게 생생하게 기억난다.

커다란 사무실. 좀 늙은 내 모습. 박국장. 송기자. 2년 차 걸그룹 넵튠이라는 이름까지.

그런데 십 초 전까지 멀쩡하게 얘기 중이었다고? 기면증도 아닌데 그렇게 갑자기 잠드는 게 가능한가?

별일이 다 있네.

“피곤해서 기절했나…… 꿈도 되게 희한한 꿈 꿨어.”

“무슨 꿈?”

“내가 매니지먼트 회사 대표였어.”

“그거 길몽이네!”

“아냐, 딱 거기까지만 좋았어. 인터뷰하면서 옛날 얘기를 하는데 기가 차서… W&U에 첫 출근을 했는데 배우가 아니라 2년 차 걸그룹 팀으로 배정됐대. 그리고 선배한테 찍혀서 고생문이 열렸다고…… 에이 씨. 개꿈이야, 이거.”

형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는다.

“걸그룹? 그것도 괜찮잖아. 재밌을 거 같은데.”

“재밌긴 뭐가 재밌어.”

“너 애 보는 거 잘하잖아. 비슷하지 않을까?”

“무슨 헛소리야. 그리고 난 아이돌 매니저는 별로야.”

아이돌이 싫다는 건 아니다. 걸그룹 좋지. 예쁘고, 귀엽고, 섹시하고. 얼마나 좋아. 하지만 아이돌 매니저를 하는 건 싫다. 아이돌을 키우는 사람이 되는 건, 거대한 공장 시스템의 부품 중 하나가 되는 것처럼 느껴질 것 같아서. 아이돌은 그 공장에서 찍어내는 규격화된 제품이고.

그에 반해 배우는 내 손으로 직접 만드는 수제품 같다. 대중에게 작품성을 인정받든 못 받든 어쨌든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작품.

물론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이왕이면 너 좋아하는 여배우한테 배정됐으면 좋겠네. 행운을 빈다.”

“제발.”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차 문을 열었다.

“나 이제 출근한다. 첫날인데 일찍 들어가서 상황파악부터 해야지.”

“그래. 끝나면 연락해. 밤에 한잔해야지?”

잔을 꺾는 시늉을 하는 형에게 물었다.

“지금 몇 시지?”

“새벽…… 3시 반?”

“첫날부터 이 시간에 출근하는데 과연 퇴근은 제시간에 할 수 있을까?”

나와 형은 사이좋게 하하 웃었다.

밖은 아직 깜깜하다. 먹구름이 끼었는지 별빛도 달빛도 없는 우중충한 하늘. 날 밝으려면 한참 남았다. 이 바닥이 출근 시간 퇴근 시간 대중없다는 거야 알고 있었지만, 첫 출근을 새벽에 하게 될 줄이야.

“어쨌든 상황 봐서 연락할게. 태워다줘서 고마워, 형.”

“그래. 화이팅!”

차에서 내리자 차갑고 텁텁한 새벽공기가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

나는 기지개를 켜고 청담동 빌딩 숲으로 들어갔다.

< 매니지먼트사업부 3팀, 신입 매니저 (1) > 끝

ⓒ 장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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