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 합일 경지, 그 이상을 향해서
183. 합일 경지, 그 이상을 향해서
두둥! 두둥! 투후훙!
아크 차원엔 초인들만 느낄 수 있는 진동이 연일 계속 되었다.
그것은 두 상위 격의 충돌이 만들어내는 파동.
그 파동에는 수많은 기록의 파편들이 뒤섞여 있었고.
우르르르르르릉 투화황! 콰광!
때로, 그들의 싸움에 소멸되는 차원의 근원이 만들어낸 충격파가 아크 차원을 두드리기도 했다.
“또? 얼마나 지났다고?!”
도현이 아크 차원의 방어벽을 뚫고 들어오는 기록의 파편들을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어지간한 파동은 아크 차원의 방어벽으로 막아낼 수 있다.
하지만 상위 격의 충돌이 선을 넘는 경우나, 차원 소멸로 인한 근원 폭발이 더해진 경우.
지금처럼 아크 차원을 지키는 방어벽이 버티지 못하는 상황이 종종 일어난다.
그렇게 되면.
“뮤, 세이안!”
= 네, 마스터.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뮤-지하와 세이안이 할 일이 생긴다.
아크 차원으로 들어온 기록의 조각들을 찾아서 포집해야 하는 것이다.
차원 안으로 들어온 기록의 조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차원의 근원에 새겨진 기록과 결합할 확률이 늘어난다.
그것은 기록의 조각이 근원 가까이 다가가서 접촉해야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기록의 조각이 차원 안에 들어온 것만으로 이미 감염이 시작된 것이라 봐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뮤-지하와 세이안이 바빠지는 것이고.
[마스터.]
“내가 나서야 할 것들이 있는 모양이지?”
[그렇습니다. 위치와 내용을 전송하겠습니다.]
“그래.”
도현은 살짝 한숨을 쉬며 룰의 정보 전송을 허락했다.
그러자 룰의 인지 능력 일부가 도현의 의식과 동조하며 필요한 정보를 전해주었다.
원래 도현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최대한도로 룰의 인지 능력을 활용했었다.
하지만 룰이 전해주는 것은 정보 그 자체.
어떨 때에는 도현이 전혀 알지 못하는 문자로 기록된 서류를 보여주는 것 같을 때가 있었다.
물론 그 서류를 이해하려 하면, 룰이 필요한 내용을 순서대로 나열해 주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은 몇 단계의 이해를 거쳐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도현이 감당하기 어려운 경우가 종종 있었다.
아직 도현의 깨달음이 모자란 탓에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그래서 도현은 자신이 감당할 수준까지만 룰의 인지 능력을 공유하고, 나머지는 필요할 때에만 조금씩 빌려 쓰는 식으로 활용 방법을 바꾸었다.
“시간을 끌어서 좋을 건 없을 테니, 서둘러야겠군.”
도현은 룰이 보낸 정보를 확인하고 곧바로 몸을 움직였다.
지금 도현의 아크 차원은 일반 차원 삼천 개 이상을 하나로 묶어 낸 것이다.
하지만 그 넓은 차원 어느 궁벽한 곳이라도 도현의 발길을 늦추게 할 곳은 없었다.
마음을 먹는 순간, 도현의 몸은 이미 원하는 곳에 가 있게 된다.
에포르와 그를 보조하는 에고들의 도움이 있기 때문에 도현이 따로 신경을 쓸 일도 없다.
번쩍!
도현은 룰이 알려준 곳으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기록의 조각 하나를 발견했다.
“벌써 차원에 동화되고 있군.”
원래는 그저 에너지 형태였을 기록 조각이 지금은 큰 나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무척 신비로운 기운을 품은 나무였다.
[근원의 기록과 결합해서 변이를 일으키는 중입니다.]
도현이 나무를 바라보며 호기심을 가지는 순간, 룰이 도현에게 또 다른 정보를 제공했다.
눈앞에 있는 나무의 원래 형태인 기록의 조각과 그 조각이 도현의 아크 차원에 있는 어떤 기록과 결합하여 어떤 형태로 바뀌고 있는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거······.”
도현은 룰이 파악한 내용을 이해하면서 살짝 감정의 격동을 느꼈다.
오래 전의 인연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이마 드리아드의 세계수와 비슷하군.”
도현이 떠올린 기억은 바로 하이마 드리아드 종족이었다.
지금 도현의 아크 차원에도 세계수를 중심으로 하는 드리아드 종족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들의 세계수는 도현이 아는 하이마 드리아드의 세계수와 달랐다.
그런데 지금 도현의 눈앞에 하이마 드리아드의 세계수와 거의 같은 세계수가 자라고 있는 것이다.
“세계수를 만들어 내는 돌연변이라.”
도현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세계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세계수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도현은 사실 룰이 보내준 기록의 변이를 살피는 중이었다.
차원 밖에서 들어온 기록의 파편은 꽤나 등급이 높아서 뮤-지하나 세이안이 간섭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도현이 직접 나선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 높은 등급의 기록 조각이, 아크 차원의 근원 기록 중에 하나와 결합해서 세계수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성질이 다른 또 다른 세계수. 이게 문제가 될 건 없겠지?”
도현은 룰의 인지 능력을 통해서 기록 조각에 의한 돌연변이 현상의 마지막 변이까지 확인하고 중얼거렸다.
[현재 차원 내에 존재하는 두 종류의 세계수는 서로 충돌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새로운 세계수에서 태어날 종족 또한 기존의 드리아드 종족과 우호적인 관계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도현의 물음에 룰은 그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룰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토대로 한 객관적인 판단이었다.
“그거야 봐야 알겠지. 같은 종족 내에서도 분쟁이 생기는데, 비슷하지만 다른 종족이라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지. 하지만, 나쁘진 않아.”
도현은 차원 내에서 일어나는 분쟁이나 경쟁을 억지로 막지 않았다.
그 때문에 간혹 종족 자체가 멸종을 하는 경우도 생겼지만, 그조차도 결국 차원 내에서 일어나는 순환의 일부로 보았다.
지금만 하더라도 새로운 세계수가 생겼고, 그 세계수에서 새로운 드리아드 종족이 태어날 것이다.
이처럼 극적인 변화는 자주 일어나지 않지만, 삼천 개가 넘는 일반 차원이 하나가 된 아크 차원 아닌가.
언제 어떤 변화가 일어나더라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이건 이대로 두는 것이 좋겠군. 다만 장소를 좀 옮겨 놔야겠어.”
도현은 새로운 기록 조각이 일으킨 돌연변이를 인정해 주기로 했다.
“에포르, 이거 적당한 곳에 옮기고, 한동안 보호 대상으로 지정해 줘. 새로운 드리아드 종족이 일정 수준 번성할 때까지. 가능하겠어?”
- 네, 로드. 그렇게 하겠습니다.
“여유가 있는 모양이지?”
- 차원 안정화가 많이 진행되었습니다. 덕분에 그 정도를 조율할 여력은 있습니다.
“그거 다행이네.”
- 저희의 관리 능력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만 로드께서 조금 더 빨리 경지를 올리실 것은 권하고 싶습니다. 이제는 가능하시지 않습니까.
에포르가 도현에게 합일 위의 경지로 오를 것을 권했다.
게다가 에포르는 도현이 그렇게 경지를 올리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시도해 볼 정도는 되겠지. 하지만 밖에서 저렇게 난리를 치고 있는데, 내가 불쑥 끼어드는 것은 내키지 않아. 그냥 언제든 할 수 있도록 준비만 해 두자.”
- 로드의 뜻이 그러시다면.
도현의 말에 에포르는 고집을 피우지 않고 가볍게 물러났다.
그것은 언제라도 도현이 상위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에서 나오는 행동이었다.
도현의 생각도 그런 에포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때가 되면, 그리고 필요한 상황이라면.
도현은 상위 경지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 * *
“어때?”
“좋습니다.”
“뮤는?”
= 저도 이젠 가능할 것 같습니다.
“모두 마스터께서 기록의 조각을 모으도록 해 주신 덕분입니다.”
= 에포르나 에고를 통해서 수준 이상의 기록 조각을 추적하게 해 주신 것도 있고, 룰의 도움을 받은 것도 컸습니다.
“역시 룰의 도움이 가장 컸다고 해야겠습니다. 감히 제 수준에서는 감당하지 못할 기록을 인지하고 해석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니 말입니다. 모두 마스터의 은혜입니다.”
뮤-지하와 세이안은 입을 모아 도현에게 감사를 표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경지 상승.
이제 뮤-지하와 세이안은 합일 경지를 앞두고 있었다.
언제든 도현의 허락만 있다면 합일 경지에 도전할 수 있고, 높은 확률로 경지 돌파에 성공할 것이다.
이미 뮤-지하와 세이안은 그 준비를 완벽하게 갖춘 상태였다.
“그럼 이제 경지를 올려 보는 게 어때?”
도현이 둘의 의사를 물었다.
의지만 있다면 곧바로 허락을 해 줄 생각이었다.
= 저는 마스터께서 경지를 올리신 후에 시도를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뮤-지하는 곧바로 도현의 권유를 거절했다.
“네가 합일 경지가 된다고 해도, 영혼의 금제를 벗어나긴 어려울 텐데?”
그게 걱정이라면 그럴 필요가 없다는 뜻.
다시 말하면 뮤-지하가 합일의 경지에 오르더라도 도현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는 없다는 말이다.
= 그보다는 만의 하나라도 문제가 생겼을 때, 마스터의 도움을 받으려면, 마스터께서 경지를 올리신 후가 더 좋을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그런 뜻이라면 저 역시 마스터께서 경지를 올리신 후에 하고 싶습니다.”
뮤-지하의 말에 세이안 역시 경지 상승을 미루겠다는 의사 표현을 했다.
“그거 나한테 더 미루지 말고 경지를 올리라고 등 떠미는 거지?”
도현이 눈을 가늘게 뜨고 뮤-지하와 세이안을 쳐다보았다.
= 하하하. 아무래도 마스터께서 저희를 지켜주시면 좋지 않겠습니까.
“저희는 마스터의 권속인데, 경지가 비슷하다는 것도 불경인 것 같고······.”
슬쩍 도현의 시선을 피하는 뮤-지하와 세이안.
도현은 살짝 한숨을 쉬며 차원 전체로 의지를 펼쳤다.
순간 도현은 자신의 차원 전체를 의식할 수 있었다.
아주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매우 안정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차원이었다.
다만 그렇게 안정되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성장이 멈춰 있다는 이야기기도 했다.
과거 삼백육십 개의 차원으로 묶어 아크 시험장을 만들었고, 그 중에 삼백 여 개의 차원을 묶어서 합일의 경지에 올랐다.
그리고 그 뒤로 아크 차원을 성장시키기 위해서 여러 번 리테라를 만들어 냈고, 그 과정에서 다수의 차원을 다시 아크 차원에 더했다.
그렇게 삼천 개에 이르는 차원을 흡수한 것이 지금의 아크 차원이다.
당연히 그렇게 많은 차원을 합일시키느라 다양한 문제가 생겼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한 것이 에포르와 에고들이었고, 그들을 보조한 것이 룰이었다.
어쨌건 차원이 매우 안정적인 이유는 그 동안 아크 차원에 새로운 차원을 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시간이 꽤나 길었기에 이제는 어찌 보면 역동적이었던 과거에 비해서 심심한 차원이 되기도 했다.
“그래, 아직은 여기서 멈출 때가 아니지.”
도현은 스스로를 다독이듯 중얼거렸다.
삼천 개의 차원을 하나로 묶어 낸, 아크 차원.
이 정도면 정말 엄청난 규모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더 욕심을 부리는 것은, 본능이 그렇게 하라고 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멈추는 순간 뭔가 큰 문제가 생길 것이 분명하다는 확실한 감이 있었다.
“치고받던 상위 격도 요즘은 조용해졌으니 때가 되기도 했지.”
아직 완전히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니다.
그리고 경지 상승을 노린다면 싸움이 끝나기 전이어야 한다.
승패가 결정되거나 혹은 무승부로 갈라지더라도, 싸움을 끝내고 힘을 회복하면 도현에게 좋을 것이 없으니까.
“그럼?”
= 드디어!
“그래, 이미 준비는 끝났으니, 해 보자꾸나!”
도현은 마침 두 상위 격의 싸움이 지지부진하고 있으니 때가 잘 맞았다고 생각하며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 로드, 룰과 함께 마지막 점검을 하겠습니다.
도현이 큰 결심을 하자, 조력자인 에포르까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