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빚을 갚는 셈 치고 살려주기로 했다
176. 빚을 갚는 셈 치고 살려주기로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잠시 자신의 손아귀를 빠져나간 테트로에 관심을 보이던 도현이 묵직한 한 마디를 하며 회의장을 훑어보았다.
“크윽!”
“하아아.”
“······.”
초인들은 저마다 고개를 숙이며 도현의 시선을 외면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무슨 수가 나는 상황이 아니었다.
“다들, 각오는 했겠지.”
도현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는 근원 에너지를 이용해서 콜로세움 회의장 전체를 장악했다.
“으으으, 이, 이건······.”
“마치 심해에 가라앉은 느낌이군. 이런 에너지 밀도라니.”
“하, 하하하하. 이걸, 이걸 어쩌라고!”
도현의 간단한 한 수에 초인들은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도 다들 융합의 경지에 오른 초인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도현이 뿜어내는 근원 에너지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들이 쓰던 것이 안개였다면 지금 그들이 느끼는 도현의 근원 에너지 밀도는 심해에서 느끼는 바닷물의 그것과 같았다.
감히 어떻게 움직여서 활용할 엄두가 나지 않는 에너지의 폭력이 거기에 있었다.
지금 도현이 조금만 더 근원 에너지의 압력을 높이면?
심해에 맨몸으로 가라앉은 잠수부처럼 순식간에 몸이 찌그러져 죽게 될 것이다.
그들이 지금 그나마 숨이 붙어 있는 이유는 도현이 그들에게 가해지는 에너지의 압력을 막아주고 있기 때문이고, 초인들도 그런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다들 따로 할 말은 없겠지?”
도현이 절망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초인들을 보며 물었다.
“요, 용서해 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우리같은 것들을 죽여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초인들이 고개를 숙이며 사정하기 시작했다.
“너희를 굳이 죽일 이유는 없겠지. 하지만 또 살려줄 이유도 없지 않나? 아니지, 세상 돌아가는 이치대로 하자면 너희를 죽이는 것이 당연하겠지. 안 그런가?”
도현의 표정이나 음성에는 별다른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따라서 초인들을 대하겠다는 뜻이 담백하게 담겨 있을 뿐이었다.
“아아아.”
“제엔장!”
초인들의 표정에서 일말의 희망도 깨끗하게 씻겨 나갔다.
그들 역시 긴 세월을 수련하며 살아온 이들이었기에, 도현의 뜻을 바꾸게 할 방법이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줄까?”
도현이 죽음을 선고하듯 물었다.
하지만 희망을 잃은 초인들은 탁색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럼 이만 가거라. 영혼을 건드리진 않을 테니, 사후를 기약하는 것도 좋겠지.”
물론 영혼이 어디론가 빠져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도현은 모두의 영혼이 사후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끝까지 확인할 테니까.
콰지지지지지직!
“크아아악!”
“아아악!”
“끄아악!”
콜로세움 회의장을 채우고 있던 근원 에너지가 심해의 해수가 아니라 급랭하는 쇳물처럼 굳어지며 초인들을 짓뭉갰다.
단 한 수에 마흔에 가까운 초인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광경이었다.
도현의 곁에 서 있던 세이안도 그 감당하기 어려운 위압에 살짝 몸을 떨었다.
그런데.
파차차차차차창!
“크으으으윽.”
“으으으으.”
“하아아아. 아아악!”
뭉개지던 초인들, 고깃덩이가 되던 이들이 숨통이 끊기기 직전에 근원 에너지의 압력이 사라졌다.
그저 강철처럼 굳어진 근원에너지만 딱딱하게 콜로세움 회의장을 채우고 있을 뿐.
“누구지?”
도현이 눈썹을 찡그리며 회의장의 한쪽 구석을 노려봤다.
그러자 그곳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두 명의 인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명은.
“테트로?”
세이안이 의외라는 듯이 그를 불렀다.
하지만 도현은 테트로를 봤음에도 그에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도현은 테트로를 데리고 나타난 초인에게 집중했다.
“누구냐고 물었다.”
도현이 다시 그 초인을 향해 물었다.
그는 격식을 갖춘 모직 계열의 정복을 입고 있었는데, 마치 귀족의 제복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제국 황실의 무인 출신 공작이 최고 지휘관의 연회용 정식 제복을 입은 것 같은 느낌?
장년의 시니어 모델을 연상시키는 그 초인은 분명 도현과 같은 경지에 있는 이였다.
“이름이 중요한 때는 지났지. 그냥 융이라 불러라.”
그는 자신을 융이란 이름으로 불러주길 요구했다.
“꽤나 많이 들었던 이름이군. 융이라.”
도현이 못마땅한 듯이 중얼거렸다.
융이 이름을 숨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융은 내가 가진 많은 이름들 중에 하나지만 그렇다고 내 이름이 아닌 것도 아니지. 그러는 너는? 너 역시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을 텐데? 그 중에 진짜가 아니라고 느끼는 이름도 있겠지만, 복수의 이름이 진짜라고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 그것도 그러네. 그래서 융, 왜 내 일을 방해하는 거지?”
도현은 융이란 이름에 대한 불쾌감은 가볍게 털어냈다.
하지만 자신의 일을 방해한 것은 이름 따위에서 느끼는 불괘감과는 전혀 다른 무게였다.
“일단 사과하지. 내가 조금 늦는 바람에 차근차근 설명할 틈이 없었다.”
“그래서 일단 저들의 죽음을 멈추고 봤다는 건가?”
“그렇다.”
“어쨌거나 결국 내가 저들을 죽이겠다는 뜻을 꺾어 놓겠다는 말이군.”
도현은 못마땅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이만한 경지에 오른 자신이 방해를 받다니.
홀로 유아독존하며 상대가 없는 경지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첫 공식 행동부터 방해를 받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결론은 그렇지. 하지만 마냥 캐슬 너의 일을 방해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뭔가 이유가 있다는 말이겠지.”
“그렇다.”
“이유가 있다니, 일단 들어보겠다. 하지만 그 이유가 나를 설득할만한 가치가 있어야 할 거다.”
도현은 일단 이유를 들어보기로 했다.
자신이 이룬 경지, 그 정도가 되면 절대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법이다.
마음 한 번 먹는 것으로 도현이 할 수 있는 일의 규모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지금만 보더라도 융합 경지에 오른 마흔에 가까운 초인들의 숨통이 끊어지던 상황이 아닌가.
그러니 한 번 움직이는데 그만큼 고려해야 할 것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런 도현의 행사를 막았으니 융 또한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캐슬, 우리는 최대한 일반 차원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묵계가 있다.”
“암묵적인 약속? 그건 우리와 같은 경지에 오른 이들 사이에서 만들어진 거냐?”
“그렇다. 융합 위의 경지. 여러 차원의 근원을 하나로 융합시키는 경지를 넘어서 시스템의 간섭까지 막을 수 있는 경지를 우리는 합일의 경지라고 부른다.”
“합일이나 융합이나.”
“그렇긴 하지만, 하나로 모았다는 것에는 독립성이 포함되어 있다.”
“시스템의 간섭을 최소한으로 하면서 내 뜻대로 하나의 차원을 운영할 수 있게 되었으니 독립성이 제일 중요하긴 하지.”
도현이 아크 시험장의 모든 차원을 아우르고 에포르와 리테라 에고, 거기에 소환체의 사고능력까지 더해서 만들어낸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시스템의 간섭 없이 차원을 운영할 수 있게 된 것.
물론 아직도 근원의 뼈대를 이루는 시스템이 남아 있긴 했다.
그것까지 빼버리려면 기록 자체를 대체할 수 있는 뭔가가 있어야 했다.
지금의 도현도 건드리지 못하는 기록, 그 기원에 해당하는 그것을 어찌하지 못하는 이상 시스템을 완전히 걷어낼 수는 없는 것이다.
어쨌거나 삼백 개가 넘는 차원을 하나로 묶어서 자신의 의지로 운영할 수 있다는 것보다 시스템의 간섭을 뿌리친 것이 더 중요했다.
그것은 곧 도현이 시스템과 싸울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물론 시스템은 따로 초인들에게 간섭하는 일이 없다.
하지만 시스템이 정해 놓은 틀은 분명히 존재하고, 그것을 어긴다는 것은 곧 시스템의 제약을 받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런 시스템의 제약에 맞서며 도리어 시스템의 틀을 벗어난 일들을 할 수 있는 존재.
융이 말한 합일의 경지란 바로 그런 경지를 뜻했다.
그래서 시스템으로부터의 독립성이 중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니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독립성을 지닌 내가 왜 저런 놈들을 처리하면 안 되는 거지? 설마 합일 경지의 초인들이 약속했으니 나에게도 그것을 지키라고 강요하는 건가?”
도현이 여전히 반쯤 고깃덩이가 된 상태로 멈춰 있는 초인들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그건 아니지. 새로 경지에 오른 너에게 이전에 우리끼리 합의한 것을 강요할 수는 없지.”
“그럼?”
“대신에 우리가 왜 그런 약속을 했는지 설명을 해 줄 수는 있지.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고도 네 뜻이 바뀌지 않으면.”
“바뀌지 않으면?”
“내가 너의 일에 끼어든 것을 사과하고 물러나야지.”
“싸우는 것이 아니라?”
“굳이?”
“뭐?”
“어차피 일을 벌이면 그 책임은 캐슬 네가 지는 건데, 굳이 싸워서까지 말릴 이유가 없다는 거다.”
“설명을 들을 수밖에 없게 말하는군.”
도현은 자신이 책임을 지게 될 거라는 말을 듣고도 끝까지 고집을 피울 정도로 막무가내는 아니었다.
“좋아. 그럼 간단하게 말을 해 주지. 우리는 합일의 경지에 있어. 그런데 이게 끝은 아니거든?”
“그렇겠지. 이게 끝이었으면 같은 합일의 경지가 여럿 있어선 안 되는 거겠지.”
“아, 너는 최고는 하나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구나?”
“아닌가?”
“동격이 여럿 있을 경우도 생각할 수 있지.”
“그런가, 나는 생각이 전혀 다른데.”
“그래 캐슬 너처럼 생각하는 이들도 있지. 뭐 어쨌거나 합일 경지 위에 또 다른 경지가 있는 것은 분명하니까 그것만 이해하자고.”
“그래서? 그 상위 경지가 합일 경지는 다른 차원의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의지라도 가지고 있는 건가? 이를테면 더 강력한 시스템의 제약처럼?”
도현은 융에게 그렇게 물어보며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겨우 시스템의 제약을 벗어나서 자유를 얻었는데, 시스템을 닮은 또 다른 제약이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비슷해.”
그런데 융은 도현이 바라지 않았던 대답을 했다.
정말로 상위 존재가 제약을 걸었다는 말이 아닌가.
“그래서 내가 저들을 죽이면, 그 상위 존재의 의지를 거역한 것이 되고, 그렇게 되면 결국 뭔가 불이익을 당하는 건가?”
“거기다가 우리들에게도 불똥이 튈지 모르지.”
“뭐?”
“그런 존재가 굳이 너 하나를 찍어서 이런 저런 제약을 내리진 않지. 너도 알잖아. 네 의지가 네가 합일한 차원에서 어떤 파급력을 지니고 있는지.”
“······.”
절대적.
융은 합일 경지의 위에 있는 경지가 지금 도현이나 다른 합일 경지의 초인들에게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의 작은 결정 하나가 도현이나 다른 합일 경지 전체에 영향을 줄 거라는 뜻도 포함해서.
“하! 기가 막히네. 이제 겨우 합일? 뭐 그런 경지에 올라서 목에 힘을 좀 줘볼까 했더니, 첫 판부터 더 쎈 놈이 나와서 깽판을 친다고?”
도현은 허탈한 표정으로 허공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그 기분 나도 알지. 뭐든 못할 거 없이 최고인 것 같았는데, 결국 우물 안 개구리 같다는 생각이 들지?”
“······.”
“하지만 너는 운이 좋은 거야. 처음부터 위에 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우리 중에 어떤 놈은 자신의 합일 차원이 최곤줄 알고 억겁의 세월을 지냈어. 그러다가 어느 순간 상위 존재의 제약을 경험했지. 그보다는 낫지 않나?”
“그거야 도전 의지가 생길 때에나 그런 거겠지. 이건 뭐, 끝이 있기나 한 건가 싶으니······.”
“그래서 포기할 건가?”
“그런 놈이 있기나 한가? 합일의 경지에 올랐다는 놈 중에서 이만한 일로 향상을 포기할 놈은 없을 텐데.”
“하하하. 뭐, 그야 그렇지.”
도현의 반응에 융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크게 웃었다.
그러더니 빙긋 웃으며 도현을 보며 말했다.
“그리고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라. 그런 상위 존재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초인, 링크, 융합 뭐 이런 경지에서 피바람이 덜 부는 거니까.”
“음?”
“알게 모르게 상위 격의 의지가 전 차원에 퍼져 있어서 수련을 통한 경지 상승의 길이 유지되고 있다는 거야. 나름 수련 환경이 좋은 편이란 거지. 다른 쪽에 비해선.”
“다른 쪽?”
“합일 경지 위의 존재가 하나가 아니니까.”
“끄응.”
까도 까도 끝이 없다.
게다가 융의 말대로면 도현 자신도 어쨌거나 상위 존재의 배려로 괜찮은 수련 환경이 유지된 세상에서 살아온 것이다.
그러니.
“좋다. 지금의 경지에 오르는데 빚을 진 것이 있다면 갚아야지. 갚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일단 저들을 죽이지 않는 것으로 조금이라도 빚을 탕감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
도현은 빚을 갚는 마음으로 콜로세움에 끌고 온 초인들을 살려주기로 결정했다.
‘혹시라도 나중에 싸울 일이 있을지 모르는데 마음의 부채는 없어야지.’
언제가 되더라도 상위 존재를 만나게 되었을 때, 떳떳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