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 아크 시험장의 갈무리 과정
174. 아크 시험장의 갈무리 과정
“그리고 그게 끝이 아니지.”
도현은 시선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제 아크 시험장은 완전히 격리되어 버렸다.
외부에 있는 초인들은 아크 시험장의 아바타를 모두 잃었고, 시험장을 관찰할 수 있는 통로도 막혔다.
하지만 고작 그것으로 저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
“내가 밖으로 나가면 너희는 모두 소멸의 두려움에 떨어야 할 것이다.”
으드드드득!
도현은 맹세와 함께 이를 갈았다.
= 괜찮겠습니까. 저들이 밖에서 아크 시험장에 수작을 부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뮤-지하가 걱정을 했다.
하지만 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해 주면 좋겠지.”
= 네? 해 주면 좋다니요?
뮤-지하가 도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되물었다.
“지금 아크 시험장은 차원의 근원 하나가 폭발했다. 원래는 가능한 많은 수의 근원을 폭발시키려는 의도였겠지만, 내가 그것을 막는 것이 한 수 빨랐지.”
= 짧은 시간이라면 마스터께서 아크 시험장을 의식 공간처럼 살필 수 있음을 몰랐기 때문이겠지요.
이곳은 아크 시험장.
그리고 그 아크는 본래 도현의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도현이 융합의 경지에 오르고 융합하는 차원의 수가 늘어난 후에, 도현은 본체를 이용하면 아크 시험장 전체를 살필 수 있게 되었다.
봉인되다시피 한 본체를 이용한 것이라 후유증이 있겠지만 초인들의 아바타를 모두 지워버릴 수 있었으니 성과는 충분했다.
“어쨌건 지금은 그렇게 폭발한 차원의 근원이 문제다. 그 근원에 새겨져 있던 기록들이 제 멋대로 차원을 넘나들며 뿌려졌지.”
= 그것과 외부의 간섭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외부에서 간섭해 주면 좋다는 말씀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차원의 폭발로 아크 시험장의 균형이 깨어졌다. 그래서 어차피 이대로 둬도 아크 시험장의 틀은 무너지게 되어 있어.”
= 그럼 이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것입니까?
“아크 시험장의 틀이 무너질 때까지 내가 잘 버틸 수 있으면 그렇게 되겠지.”
= 버티는 것이 쉽지 않다는 말씀이군요?
“아니. 충분히 버틸 수 있다. 다만 시간이 걸리고, 내가 융합한 차원의 일부를 희생해야 하겠지만.”
= 그런데 밖에서 아크 시험장을 건드리면······.
“틀이 조금 더 빨리 무너지고, 그렇게 되면 내가 받아야 할 압력이 밖으로 터져 나가겠지. 아마 운이 좋다면 아크 시험장에 관여한 초인들에게 적잖은 타격을 줄 수도 있을 걸?”
= 아, 그래서 밖에서 건드려 주면 더 좋은 거군요?
“가능성도 제법 되지. 놈들은 지금 아크 시험장 안쪽의 상황을 전혀 파악할 수 없는 상태니까.”
= 궁금하기도 하고, 마스터께서 뭔가 대단한 것을 얻게 되지 않을까 조바심도 나겠군요.
“문제는 나도 밖의 상황을 알 수 없다는 거지만, 그래도 아크 시험장을 유지하는 틀에 변화가 생기면 그건 곧바로 알 수 있겠지.”
= 그럼 이제······.
“놈들이 뿌려놓은 똥가루를 처리해야지.”
= 네? 또, 똥이요?
“폭발한 근원에서 뿌려진 기록의 조각들.”
= 아, 네.
* * *
근원의 폭발에서 튀어나온 조각난 기록들은 일종의 돌연변이 바이러스처럼 작용했다.
그래서 그 기록이 다른 기록 사이에 끼어들면 기록의 기이한 변형이 일어났다.
도현은 그러한 기록의 조각들이 자신이 구축한 융합 차원에 들어오지 못하게 적극적으로 막았다.
이미 암석 차원에 융합 차원의 근원이 만들어진 이상, 도현의 융합 차원은 하나의 차원으로 관리되었다.
그래서 도현은 자신의 융합 차원에 완벽한 방어벽을 두르고, 그 전에 들어온 바이러스를 찾아 퇴치하는데 공을 들였다.
- 로드, 이제 차원 내에 불완전 기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몇 년의 시간이 흘렀을 때, 에포르가 방역 완료를 보고했다.
하지만 불완전 기록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모두 박멸했지만, 돌연변이를 일으켰음에도 온전한 모습을 유지한 몇몇 기록들은 그대로 도현의 융합 차원에 남았다.
새로운 기록으로서 소환체의 관리를 받게 된 것이다.
“수고했어.”
도현이 에포르의 보고에 그 동안 한시도 늦추지 않았던 긴장을 풀었다.
이제 자신의 융합 차원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물론 소소하게 일어나는 기록들의 충돌은 여전하지만, 그것이 차원 전체에 영향을 끼칠 정도는 되지 않는다.
“후우, 이젠 좀 여유롭게 연구를 할 수 있겠군.”
도현의 시선이 융합 차원 밖으로 향했다.
그 동안 도현의 융합 차원은 적잖은 에너지 손실을 봤다.
융합 전의 차원으로 치자면 서른 개 정도의 차원이 가졌던 에너지가 사라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그 손해가 지금 남아 있는 융합 차원을 지킨 대가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생각보다 양호한 편이지.”
도현은 융합 차원 밖으로 의식을 펼치며 중얼거렸다.
아크 시험장에서 도현의 융합 차원을 제외한 다른 차원들은 모두가 거의 멸망의 과정을 걷고 있었다.
도현이 돌연변이 바이러스나, 불완전 기록이라 부르는 기록의 조각들이 시험장 내부의 차원들을 먹어치웠다.
도현의 보호를 받지 못한 차원들은 근원의 기록이 제 멋대로 비틀렸고, 뒤엉켰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근원 자체가 홀로 폭발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
도현은 그 이유가 궁금해서 근원들을 살폈다.
그리고 융합의 경지에 오르면서 깊어진 혜안으로 결국 그 이유를 알아냈다.
“지금껏 보지 못했던 기록이 있었지.”
이전까진 인식조차 할 수 없었던 기록.
그것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이러스성 기록에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그 이유는.
“기록에 등급이 있지. 그건 알고 있었는데, 이제보니 그 등급마다 쓰는 문자가 달랐단 말이지.”
그래서 등급이 높은 기록일수록 수가 적고, 당연히 그런 기록이 폭발로 조각이 나 봐야 그 수도 적을 수밖에 없다.
원래 수가 적은 기록, 거기에 그 중에 하나가 폭발해서 만들어진 조각.
비록 조각이 되었지만 그 수도 다른 조각들에 비해 희박하다고 할 정도로 적을 수밖에 없으니, 양쪽이 서로 만날 가능성은 더 낮아진다.
결국 등급이 높은 기록, 그러니까 기원 기록에 가까운 것일수록 돌연변이를 일으키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당연히 근원을 유지하는 기록은 등급이 높을 수밖에 없고, 폭발로 조각난 동급의 기록을 만나 돌연변이를 일으킬 일도 드물다.
“거기에 돌연변이가 된다고 해도 근원의 유지라고 하는 가장 기본적인 효과가 사라지는 경우도 없었지.”
실제로 도현은 기록의 등급에 따라서 달라지는 기록의 방식, 즉 문자의 차이를 알게 된 후, 상위 등급의 기록에 의도적인 돌연변이를 일으키기도 했다.
자신의 융합 차원이 아닌 다른 차원에서 벌인 일이었다.
어차피 이미 기록의 돌연변이 현상이 극심하게 일어난 차원이라 지성종은 멸종하고 문명도 사라진 차원이었다.
그나마 생명체라고 하는 것들도 근원의 폭주로 더 이상 존재하기 어려워져 멸종을 향해 나아가던 차원.
그곳에서 도현이 인지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등급의 기록에 억지로 돌연변이 조각을 끼워 넣었다.
그리고 변화를 지켜봤는데, 의외로 등급이 높은 기록일수록 면역력이 강했다.
억지로 끼어든 기록을 적당하게 변형시키거나 혹은 소멸시키는 방식으로 본래의 기록을 지킨 것이다.
그것을 확인한 도현은 등급이 높은 기록일수록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면역이나 자기 방어라는 그 현상만 보더라도 등급 높은 기록은 자체적인 판단이나 반응 기재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니까.
“거기서 알게 되었지. 소환체나 에고를 통해서 기록을 관리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기록 자체로도 그와 비슷한 기능을 하도록 할 수 있다는 것.”
물론 아무리 생각해도 에고나 소환체를 통해서 기록을 관리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도현은 기록을 변형시켜서 사고 능력이나 판단력을 부여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건 C언어를 겨우 배운 놈에게 인공지능 코드를 짜라는 이야기나 다름이 없을 테니까.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잠시 혼돈이나 다름없는 차원들을 보며 지난 연구 과정을 떠올리던 도현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이제 자신의 융합 차원의 안전을 확보했으니 이제는 아크 시험장 전체를 정리할 때였다.
“뮤!”
= 부르셨습니까. 마스터.
“내가 부탁한 근원은 어떻게 되었어?”
= 말씀하신 기록을 새겨 넣기는 했지만 성공과 실패는 제가 판단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 안 되는 거야?”
= 죄송합니다. 마스터의 의식 공유로 그나마 복사해서 새겨 넣는 것까지는 가능하지만, 그 의미를 파악하거나 기록을 구현하는 것은 아직 불가능합니다.
“음, 알았어. 나중에 과외 좀 하자.”
= 감사합니다. 마스터.
“일단 기록을 새겨 넣기는 했다니 한 번 봐야겠네.”
도현은 곧바로 뮤-지하가 작업중인 차원으로 이동했다.
아크 시험장 내에서는 차원 이동이 자유로워진 도현이었다.
도현이 도착한 차원은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는 곳이었다.
있는 것이라곤 공간과 그 공간의 중심에 있는 차원의 근원, 그리고 뮤-지하뿐이었다.
= 오셨습니까.
도현의 등장에 뮤-지하가 인사를 했다.
그런 뮤-지하의 옆에는 5미터 크기의 수정 기둥이 하나 서 있었다.
팔각형의 수정 기둥은 두 사람이 마주 안아야 손이 닿을 정도의 굵기였는데 그것이 이곳 차원의 근원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근원에는 몇 가지의 기록만 새겨져 있을 뿐, 다른 기록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하위 기록은 존재하지 않고 차원의 존재, 근원의 유지 정도의 기본적인 기록만 남아 있는 상태인 것이다.
다른 기록들이 없었던 것은 아닌데, 도현이 최소한의 기록만 남기고 모든 기록을 뽑아낸 것이다.
도현은 정신을 집중해서 그 근원을 세심하게 살폈다.
제법 긴 시간이 흐른 후, 도현이 눈을 뜨며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 잘 새겨졌네.”
= 그렇습니까?
“곧바로 발현이 가능하겠어.”
= 휴우, 다행입니다. 저는 또 이번에도 재료만 날릴까봐 조마조마 했습니다.
“얼마 안 남았지?”
= 네, 마스터. 같은 기록이라면 한 번 정도 새겨 넣을 정도만 남았습니다.
“고생했어. 나였으면 실패했을 가능성이 더 높았을 걸? 재료를 허공에 날리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지.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 감사합니다 마스터.
도현의 치하에 뮤-지하가 고개를 숙였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도현이 자신에게 성장의 기회를 준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뮤-지하가 기록의 설계나 구축에 남다른 재주가 있다곤 하지만, 보고 베끼는 수준인 뮤-지하와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도현의 차이는 컸다.
“알고 있겠지만 나는 저렇게 세밀하고 정교한 작업에 약한 사람이야. 너의 도움이 커. 빈 말로만 고맙다고 하는 게 아니야.”
= 그렇다고 해도 제가 얻는 것에 비하면 이런 수고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마스터 덕분에 저도 이제는 융합의 초급 경지는 올랐으니까요.
“그거야 내가 도움을 받으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해서 그런 거지.”
= 네, 그런 거겠지요 마스터.
뮤-지하는 같은 주제로 이야기하기를 꺼려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나저나 기록 재료가 부족하단 말이지.”
= 네, 마스터.
“뭐, 어쩔 수 없지. 다른 차원의 근원에서 뽑아내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
= 네.
“그래도 융합 차원에서 조금씩이라도 자체 생산이 되니까 어떻게든 연구를 하거나 실험을 이어갈 수는 있겠지.”
= 다른 차원에서 뽑아오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까?
“그거 뽑으면 그만큼 그 차원의 근원에서 중요한 기록이 사라지는 거야. 그렇게 되면 결국 차원 꼴이 여기처럼 변해버리는 거지.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공간으로.”
= 그 공간까지 없애면 차원 자체가 붕괴되어 사라지겠지요. 그게 아니라도 마스터께선 멀쩡한 차원의 근원을 건드리는 건 싫어하시고 말입니다.
“그런 건 잘 뒀다가 융합을 해야지. 그래서 그런 거야.”
= 네. 그렇겠지요.
“자, 그럼 이제 이걸 발현을 해 보자. 공간에 물질을 존재하게 하는 기록이라니, 이런 걸 직접 해 보게 될 줄은 몰랐네.”
도현은 수정 기둥에 뮤-지하가 정성껏 새겨 넣은 기록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이제 그 동안의 연구 성과를 확인할 차례였다.
융합 이상의 경지에서 다룰 것이 분명한 기록의 제작과 발현.
그 순간을 앞두고 긴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