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 자카트에겐 없어도 테트로에겐 쌓인 게 많아
168. 자카트에겐 없어도 테트로에겐 쌓인 게 많아
자카트는 자신이 만든 결계 안에서 리테라 피스가 쌓이는 것을 지켜보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카이테와 패엽 무리의 싸움으로 죽어가는 수련자들 중에서 리테라 피스를 흡수한 이들의 영혼은 자카트가 만든 결계로 끌려온다.
그리고 대부분의 영혼들은 빠르게 현생의 기억이 소멸되고 사후 세계로 끌려가며 리테라 피스를 남긴다.
자카트의 결계에는 영혼들이 현생에 머무는 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해 기억을 지우는 효과도 있어서 오래 기다릴 것도 없다.
몇몇 미련이 많은 영혼들이 문제지만 그조차도 시간이 조금 더 걸릴 뿐.
리테라 피스들이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가 자카트를 즐겁게 한다.
그런데.
파지지지직! 파차차창!
“으음? 누구냐!?”
갑자기 자카트의 결계를 깨트리며 나타난 낯선 이들.
자카트는 그들이 리윰 차원의 존재가 아님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누구지? 누구의 아바타냐!”
자카트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히자르와 뮤-지하를 보며 물었다.
어떻게 차원을 이동해 왔을까?
자카트로서 그게 가장 궁금한 부분이었다.
“아바타? 그게 뭔데?”
히자르의 모습을 한 도현이 자카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바타가 아니라고?”
자카트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시간 자카트의 본체인 테트로는 물론이고, 자카트를 살피던 다른 초인 몇 명도 히자르와 뮤-지하의 등장에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그들도 히자르와 뮤는 낯선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하하, 장난이다. 테트로.”
하지만 다음 순간 도현은 활짝 웃으며 테트로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의 정체를 숨길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어차피 초인들이 히자르의 모습을 본 순간, 그가 도현의 분신임을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에포르도 할 수 있는 일인데, 초인이 그보다 못할까.
그런 상황에서 굳이 자신을 감추겠다고 헛고생을 할 이유는 없었다.
“누구냐?”
테트로란 이름을 부른 것은 스스로 아크 시험장에 들어온 아바타들 중에 하나임을 드러낸 것.
자카트가 다시 한 번 정체를 물었다.
“캐슬이다. 아크의 주인.”
히자르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으음, 아바타가 아니라 빙의를 한다더니, 그런 모습이 되었군.”
자카트도 도현이 아바타가 아닌 빙의의 형태로 시험장에 들어온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인지 그렇게 대꾸했다.
“인간형이라 원래의 내 몸과 위화감이 없어서 좋더라고.”
“그런데 함께 온 놈은 누구지?”
“아, 이곳에서 사귄 친구. 아크 시험장에서.”
“친구? 아바타가 아니란 말이냐? 그런데 초인의 경지에 올랐다고?”
자카트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뮤-지하의 경지를 정확하게 알아보지 못했지만 초인의 경지 이상임은 확신한 듯 했다.
아바타는 아닌 것 같은데 차원을 넘을 정도의 경지라니.
“하하, 꼭 아바타들만 초인의 경지에 오르는 건 아니지. 이곳 리윰만 하더라도 초인의 경지에 오른 수련자가 열 명이 넘잖아.”
자카트의 놀란 모습에 히자르가 피식 웃으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특수한 경우긴 하지만, 리윰 차원에는 자카트 이외에도 열 명이나 되는 초인들이 있었다.
그런데 뮤-지하를 이상한 눈으로 보다니.
“그래, 그건 그렇군.”
자카트도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렸는지 곧바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데 지금 뭐 하는 짓이야?”
그 때 갑자기 도현이 리테라 피스가 떨어져 쌓이는 결계의 중심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자카트에게 물었다.
“봤으니 알 텐데? 리테라 피스를 모으는 중이지.”
훅 하고 들어온 질문에도 자카트는 숨길 것이 없다는 듯이 가볍게 대답했다.
“내가 궁금한 건, 왜 이런 짓을 벌이느냐 하는 거야. 리테라 피스가 많다고 좋은 것도 없을 텐데?”
리테라 피스를 모으고 있는 것을 누가 모르나?
궁금한 것은 왜 리테라 피스를 모으느냐 하는 것이지.
“그야 경쟁자를 줄이기 위해서지.”
“음?”
“보아하니 너도 대사부의 수련법을 알고 있는 모양인데, 그 수련법에는 리테라 피스가 꼭 필요하지. 그럼 리테라 피스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초인이 등장할 수 없다?”
“그렇지. 그리고 지금 있는 놈들도 더 높은 경지에는 오를 수 없고.”
“그래서 리테라 피스를 회수하고 있다는 거군?”
“맞아.”
“보아하니 너, 이미 링크 경지 직전까지 간 모양이네?”
도현은 자카트와 대화를 하는 동안에 자카트의 경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자카트가 다루는 결계의 수준이나 품고 있는 근원 에너지의 양과 밀도를 봤을 때, 그 경지는 링크 직전이었다.
“그렇지. 대사부보다 내가 앞서 있지.”
“뭐? 대사부보다? 내가 알기로 대사부도 링크 직전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긴 하지만, 대사부는 링크에 올라설 리테라 피스, 진옥을 찾지 못했지만, 나는 링크 경지에 오를 수 있는 진옥을 이미 확보한 상태란 말이지. 그러니 내가 대사부보다 앞서 있는 거지.”
“링크 경지에 오르는데 필요한 진옥을 확보했다고?”
도현은 자카트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원래 경지가 높아질수록 거기에 필요한 리테라 피스의 수준도 높아진다.
하나의 리테라가 산산조각 난 것이 리테라 피스다.
그러다보니 구형의 리테라에서 중심부에 해당하는 것일수록 담고 있는 기록의 수준이 높다.
“운이 좋았지. 나에게 딱 맞는 진옥을 구할 수 있었으니까.”
자카트가 도현을 보며 자랑하듯이 말했다.
하지만 도현은 그런 가식에 속지 않았다.
“알맞은 진옥을 찾은 것이 아니라, 가장 등급이 높은 리테라 피스에 맞춰서 흡수 순서를 정한 건 아니고?”
“뭐? 너······.”
도현의 말에 자카트가 누가 듣는 이들이 없는지 주위를 살피는 몸동작을 했다.
그러다가 천정을 한 번 보고는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이미 도현의 말을 아크 밖에 있는 다른 초인들이 들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뭐? 다른 놈들이 이런 정도도 생각을 못했을 거 같아?”
도현이 그런 자카트를 보며 피식 웃었다.
대사부의 수련법은 리테라 피스의 종류를 가린다.
그래서 처음에 어떤 리테라 피스를 흡수했느냐에 따라서 다음에 흡수할 수 있는 리테라 피스가 한정된다.
그런 식으로 단계를 거듭할수록 흡수할 수 있는 리테라 피스의 범위가 좁아지게 되니, 패엽이나 다른 초인들처럼 어느 순간부터 흡수할 수 있는 리테라 피스가 없어서 성장이 막히는 일이 생긴다.
이에 자카트는 초인의 지식을 이용해서 가장 등급이 높은 리테라 피스를 먼저 구한 후에 거기에 맞춰서 하위 리테라 피스들을 채워갔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자카트도 다른 수련자들처럼 운에 맡긴 상태로 리테라 피스를 흡수한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해서는 높은 경지에 오르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중간에서 경지를 포기하고 새로 시작한 것이다.
아크 밖에 있던 초인들이 테트로의 아바타가 리윰의 다른 초인들에 비해서 경지가 낮다는 소리를 들었던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제대로 테크트리를 만들어 링크에 오를 준비를 마친 상태.
이제 링크 경지에 오르게 되면 곧바로 차원 이동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그 전에 리윰 차원에서 리테라 피스를 모두 확보해서 후환을 없애려는 것.
하지만 그런 자카트도 생각지 못한 아주 간단한 문제가 있었다.
“대사부의 수련법, 솔직히 나도 여기 와서 그걸 확인하고는 정말 놀랐거든. 그래서 테트로 네가 진짜 운이 좋은 놈이란 생각을 했지.”
“그런데 아니란 말이냐?”
“맞아. 운이 좋은 놈이 너 하나만 있지는 않을 거란 생각이 들더라고.”
“음?”
“초인들 중에서 이곳 리윰 차원에 관심을 가진 놈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그 놈도 대사부의 수련법을 알아차리지 않았을까?”
“······.”
“자, 이제 무슨 실수를 했는지 알겠지? 물론 나도 리윰에서 리테라 피스를 수거하는 것에는 찬성이야. 하지만 굳이 모든 리테라 피스를 모을 필요는 없지. 하급은 그냥 두고, 초인의 경지에 오르는데 필요한 것들만 정리하면 그만이야. 그것만 해도 리윰에서 초인은 등장할 수 없으니까.”
대사부의 수련법이 가진 명확한 한계였다.
물론 그것을 돌파할 방법이 없지는 않지만, 그것까진 자카트에게 알려줄 의리 따위는 없는 도현이다.
“그렇겠네.”
역시 자카트는 겉으로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던지 곧바로 긍정했다.
“그런데 다른 차원에 아바타를 보낸 놈들 중에서 대사부의 수련법을 확보한 다른 초인들은 어떨까?”
“혼자서 리테라 피스를 독식하면서 빠르게 성장하겠군. 운이 좋다면 링크 입문용보다 더 높은 수준의 리테라 피스를 얻어서 역설계로 테크트리를 짰을 수도 있겠어. 그랬다면 링크를 넘어 융합까지도 빠르게 경지를 올릴 수도 있겠지.”
“맞아. 어때? 이런 생각을 하니까?”
“기분이 좋지 않군. 지금 내가 할 일은 여기 리윰에서 경쟁자가 될 놈들을 어찌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빠르게 앞으로 달려 나가는 것이었어. 진정한 경쟁자는 리윰이 아니라 다른 차원들에 있는 거니까.”
“와우! 바로 그거지!”
짝! 짝! 짝!
홀린 듯이 중얼거리는 자카트의 말에 도현이 칭찬이라도 하는 듯 탄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놀리는 건가?”
이에 자카트는 곧바로 반발을 했다.
하지만.
“놀리긴! 그냥 이제야 좀 머리가 돌아가는구나 하는 거지.”
“끄응.”
돌아오는 대답은 놀림 그 자체였고, 자카트는 앓는 소리를 내며 인상만 찌푸렸다.
화를 낸다고 해도, 현실은 도현과 뮤-지하를 한꺼번에 상대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좋아, 제법 눈치는 있네. 그런데 자카트.”
“뭐냐?”
“너, 테트로잖아.”
“뭐?”
“내가 자카트 너에겐 아무 감정이 없는데, 테트로에겐 쌓인 것이 많단 말이지.”
“그, 그건······.”
사실은 캐슬이란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속으로 조마조마한 느낌을 숨기고 있던 자카트였다.
아크의 시험장을 완성하는 최후의 순간에 테트로가 캐슬에게 부렸던 못된 수작을 어떻게 잊을까.
자카트도 캐슬이 언제 그 이야기를 꺼낼까 마음을 졸이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드디어 그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뭐, 나는 대범하니까 꼬치꼬치 따지진 않겠다. 대신에.”
“대신에?”
“리윰의 리테라 피스는 모두 내가 가지는 걸로. 물론 자카트 네가 링크 경지에 오르는데 필요한 것까지는 빼앗지 않을 게. 어때?”
“끄응.”
“자카트 너는 계획대로 리윰의 리테라 피스를 모두 모은다. 그리고 나는 그걸 받고 이전에 있었던 사소한 오해는 깔끔하게 잊어준다. 이런 건데, 싫어?”
“아니다. 그렇게 하자. 어차피 다른 리테라 피스가 나에게 꼭 필요한 것도 아니니까.”
대사부의 수련법에는 많은 리테라 피스가 필요하지 않다.
물론 새로 테크트리를 짜려면 리테라 피스가 많을수록 좋겠지만, 그건 나중에 확보해도 된다.
어차피 아크 시험장에는 삼백육십 개의 차원이 있고, 아바타는 마흔 정도에 불과하다.
아직까지 기회는 차고 넘친다는 이야기.
더구나 현 시점에서 차원 이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놈은 자카트가 알기론 눈앞에 있는 캐슬 일행뿐이다.
자카트도 이제 곧 링크 경지에 오를 수 있으니 늦었다고 할 것도 아니다.
“이야, 빠르고 올바른 선택! 좋아! 그럼 하던 일 마저 해. 오늘은 이 정도로 만족하고 돌아갈 테니까.”
도현은 결계 중심에 떨어져 쌓이는 리테라 피스를 자신의 의식 공간에 밀어 넣었다.
자카트는 복잡한 표정으로 그런 도현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알겠지만 내가 뒤끝은 없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서로 얼굴 붉힐 일은 만들지 말자고. 남은 건 다음에 받으러 올 테니까 그렇게 알고.”
리테라 피스를 챙겨 넣은 도현은 다시 허공을 찢고 뮤-지하와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동시에 복구되는 자카트의 결계.
자카트는 그것이 캐슬의 무력 시위임을 알아차리고 짧게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결계를 마음대로 깨고 들어오더니, 떠날 때에는 자신도 모르게 복구시켰다.
수준의 차이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무력 시위인 것이다.
“휴우.”
자괴감인지 안도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자카트의 한숨이 결계 공간 안에서 길게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