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근원의 기록을 조율하는 신박한 발상
164. 근원의 기록을 조율하는 신박한 발상
‘쉽지 않네.’
도현은 깊은 명상에서 깨어나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 마스터, 어떻습니까?
뮤-지하가 먼저 깨어났는지 도현의 표정을 보며 물었다.
“실패다.”
= 그, 그렇습니까?
“처음부터 불가능한 거였지. 서로 상반되는 기록을 어떻게 하나로 묶어 넣어 활성화를 시키나? 적용 영역을 나눠서 하는 것은 말도 안 되고.”
= 그건 차원을 나누는 것이나 같은 것이니까 의미가 없지요.
“리테라 피스의 융합, 이거 쉽지 않네.”
도현은 다시 한 번 고개를 흔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 그래도 마스터께서 가장 앞서 계신 것은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확보한 리테라 피스의 숫자만 따져도 마스터에 근접할 경쟁자는 하나도 없을 겁니다.
뮤-지하가 도현을 위로했다.
그 말처럼 도현은 무척 많은 리테라 피스를 확보하고 있었다.
이유는 도현이 사용한 탐사일지.
처음 도현이 탐사 일지를 사용해서 도착한 곳은 도현이 링크했던 차원으로 생명체가 없는 곳이었다.
당연히 경쟁이나 방해 없이 리테라 피스를 확보할 수 있었다.
리테라 피스의 공명 현상을 이용해서 뮤-지하가 발품을 파는 것으로 끝이었다.
그런데 그 뒤에 다시 탐색일지를 사용했을 때에도 도현은 자신이 링크했던 차원으로 갈 수 있었다.
황량하기 짝이 없는, 그러면서 아직 생명체가 탄생하지 않은 차원이었다.
당연히 이번에도 그 차원의 리테라 피스는 도현의 차지가 되었다.
그리고 세 번째로 탐사일지를 사용했을 때, 도현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번에 도착한 차원 역시 척박하기 짝이 없는 차원이었던 것이다.
[탐사일지는 차원간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는 하급 차원으로 회랑을 연결한다. 그러므로 이곳 시험장에서도 그런 조건에 맞춰서 회랑을 여는 것이다.]
몇 번의 경험 끝에 도현은 그와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결론에 이르기까지 거쳐온 차원에 있던 모든 리테라 피스가 도현의 것이 되었다.
뮤-지하가 도현이 가장 앞서 있을 것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도 그것이었다.
“운이 좋은지 나쁜지는 모르겠다만, 일단 내가 가장 많은 리테라 피스를 가지고 있긴 하겠지. 에포르가 놓친 경쟁자가 없다면 말이야.”
- 로드께 덤비다가 죽은 아바타를 제외한 다른 초인의 아바타는 이미 특정했습니다. 적어도 초인의 아바타 중에서 제 감시를 벗어난 것은 없습니다.
도현의 말이 섭섭했는지 에포르가 끼어들었다.
도현이 탐사일지를 이용해서 차원을 옮겨 다니는 동안, 에포르는 할 일이 없었다.
어차피 리테라 피스를 취할 정도의 생명체가 없는 차원이라도 에포르가 그곳을 감시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에포르는 도현과 뮤-지하가 리테라 피스를 확보하는 동안, 다른 차원들을 살피며 초인들의 아바타를 찾았다.
삼백육십 개의 차원을 하나씩 살피며 그 차원에서 가장 높은 경지에 있는 이들을 찾았다.
그런 식으로 각 차원의 실력자 열 명 정도씩을 특정하고, 이후 그들을 감시하는 동안에, 초인들의 아바타로 확신할 수 있는 이들을 특정했다.
그리고 지금 에포르는 초인의 아바타를 모두 찾았다고 자신할 정도가 되었다.
= 특정하기는 무슨. 초인들이 시험장 안에 있는 아바타와 소통하는 것을 걸러낸 거지.
- 그걸 할 수 있었다는 것이 대단하지. 내 성과를 깔보지 마라.
= 그것도 결국 마스터께서 제시한 방법이었지. 에포르 너는 그냥 마스터가 시키는 대로 했던 것 뿐이고.
- 내가 없었으면······.
‘그만. 에포르가 초인과 아바타의 연결을 모두 파악해 낸 것은 분명 대단한 성과다. 시험장 안에 있는 우리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지.’
= 그건 그렇습니다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그리고 이 안에서 내 수련을 돕고 있는 뮤, 너의 공도 충분히 크다. 그러니 서로 비교하며 질시 하지 마라.
- 알겠습니다. 로드.
= 죄송합니다. 마스터.
“그나저나 그 놈은 어때? 에포르?”
- 누구 말씀입니까?
“나한테 아바타가 소멸당한 놈.”
- 아, 마흐라바 말씀입니까?
“그래. 전에 뭔가 준비하는 것 같다고 했잖아.”
- 마흐라바는 지금 새로운 아바타를 시험장에 들여보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음? 새로운 아바타?”
- 그렇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마흐라바는 시험장을 만드는 과정에서 뒤늦게 참가한 십여 명의 초인들 중에 하나다.
당연히 도현도 그와는 별다른 교류가 없었다.
그저 아크 시험장을 만들고 활용한 동료이자 경쟁자, 그 정도가 끝이었다.
그런데 도현이 네 번째로 탐사 일지를 사용해서 다른 차원으로 넘어갔을 때, 그곳에 그 마흐라바의 아바타가 있었다.
아무런 생명체도 없는 차원에 홀로 머물며 리테라 피스를 모두 독차지하고 있던 마흐라바의 아바타.
마흐라바는 도현의 등장에 위기의식이 생겼는지 곧바로 도현을 공격했다.
홀로 한 차원의 리테라 피스를 독차지하고 그것을 나름의 방법으로 흡수해서 힘을 길렀던 마흐라바였기에 도현을 이길 자신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미 도현은 네 개의 차원을 거치며 리테라 피스를 모았고, 그 기록들 중에서 전투에 도움이 될 것들을 카피해서 소환체들을 키워 놓은 상태였다.
마흐라바의 아바타가 이미 초인의 경지에 올랐다고 해도, 결국 숫자의 횡포를 이기진 못했다.
결국 마흐라바의 아바타는 산성병사와 흑영, 레인져의 합공에 소멸을 맞이하며 리테라 피스를 토해 내고 말았다.
“마흐라바가 벼르고 있겠군.”
= 마스터께서 서로 도우며 리테라 피스를 연구하자는 제의를 하셨을 때, 그것을 거부한 것은 마흐라바입니다. 그가 끝까지 싸움을 고집한 것을 마스터께서 마음 쓰실 일은 아닙니다.
“뭐, 그렇게 마음을 쓰는 건 아니야. 다시 덤벼오면 또 눌러주면 그만이니까. 다만, 놈이 밖에서 다른 초인들과 거래를 했을 거란 사실이 문제지.”
= 거래 말씀입니까?
“나에 대한 정보를 던져주고, 힘을 합치기로 했을 수도 있잖아. 뭐, 그 놈들 자존심에 쉽지는 않은 일이지만.”
= 그 자가 마스터를 과대포장해서 다른 초인들의 경각심을 키웠다면 그럴 수도 있겠군요.
“하아, 아니다. 일단 그 이야긴 그만하자. 당장 마흐라바가 내 앞에 나타날 것도 아니니까.”
= 그럼······.
“생각을 좀 바꿔야겠어.”
= 무슨 생각을 말입니까?
앞뒤 잘려진 도현의 말에 뮤-지하가 되물었다.
“예전부터 생각을 했던 건데.”
= ······.
“근원의 기록은 결국 힘이고 의지란 말이지.”
= 힘과 의지라니 무슨 뜻입니까?
“그것이 힘인 이유는 기록이 품은 내용을 어떻게든 실현하기 때문이지.”
= 어떻게 한다는 것은 힘이 아니라 의지가 아닙니까?
“의지만 있어선 아무것도 하지 못하지. 그것을 이룰 힘이 있어야 하는 거잖아.”
= 그래서 힘과 의지라는 말씀이군요?
“그래. 나는 근원의 기록이란 것이 결국 의지를 실현할 힘이라고 생각해. 물론 그 속에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내용들이 있겠지만 그건 빼 놓자고.”
= 힘이 있는 의지. 마스터께선 그렇게 보셨군요.
“그런데 문제는 그 의지가 서로 상반된 내용을 품고 있어서 함께 둘 수가 없다는 거지. 그게 근원에서 기록을 융합시키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고.”
= 맞습니다.
뮤-지하는 대답을 하면서도 누구나 알 수 있는 그런 단순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에 의아한 표정이었다.
“자, 그럼 이런 생각을 해 보자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도 그렇게 상반된 것들이 넘쳐나지. 안 그래?”
= 예를 들어주시면······.
“예를 들 것까지도 없지. 기록들 중에서 함께 할 수 없는 극과 극의 것들, 그것이 사실 대부분의 차원에는 함께 존재한다는 말이지. 비록 때와 장소는 다를 지언정. 빛과 어둠, 삶과 죽음, 호(好)와 불호(不好). 있는 것과 없는 것 등등.”
= 아, 그건 그렇습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들은 같은 차원에 있어도 동시에 함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근원에 기록을 새겨 넣을 때에는 그런 것을 조율하는 것이고 말입니다.
도현이 알기로 뮤-지하는 기록의 설계에는 무척 뛰어난 존재였다.
그래서 그런지 상반된 내용들을 하나의 근원에 새겨 넣고 그것들의 발현을 조율하는 데에도 능숙했다.
뮤-지하는 그런 경험을 토대로 도현에게 조언을 하는 것이었다.
“맞아, 맞는데. 그걸 조율하는 것이 쉽지 않잖아. 그래서 한계가 분명하고. 그런데 지금 우리는 리테라 피스의 기록 모두를 하나로 묶어내려는 시도를 하는 중이고.”
= 그렇지요.
“자, 단순하게 생각을 해 보자고. 여기 서로 부딪히면 깨지고 폭발하거나 소멸할 것들이 잔뜩 있어. 이걸 한 공간에 와르르 쏟아 넣을 거야. 그럼?”
= 폭발하고 깨지고, 소멸하겠지요.
“그런데 이것들이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있어서 위험한 것들을 피해서 움직일 수 있다면?”
= 그럼 문제될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어? 그럼······.
“근원의 기록은 힘과 의지라고 했잖아. 그런데 그 의지가 너무 단순한 거지. 그냥 기록을 실현하는 의지만 있으니까.”
= 마스터께선 그 단순한 의지를 고등하게 바꾸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냥 이렇게 생각하자고. 일꾼들을 부리는 거야. 기록의 숫자만큼의 일꾼을 고용해서 그 일꾼들에게 하나씩의 기록을 맡기는 거지.”
= 그렇게 되면······.
“내가 할 일은 정말 기본적인 규칙만 정해주면 된다는 거지. 기록을 받은 고용인끼리는 서로를 해칠 수 없다는 것만 정해 줘도 상반된 기록을 지닌 고용인들이 서로 부딪히지 않을 테니까.”
= 하지만 기록은 그 내용을 실현하려는 의지가 있지 않습니까.
“우선 순위의 문제지. 기록을 실현하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상대를 소멸시키거나 내가 소멸되는 상황은 피해야 한다는 기본이 있다면?”
= 거기에 더해서 그 기록을 담당하는 고용인들이 조금 더 고등한 존재라면 마스터께서 신경 쓸 것 없이 그들끼리 알아서 조율을 하겠군요?
“그렇지. 결국 그렇게 되면 기록만큼의 절대자가 생겨나는 거라고 할까? 뭐, 고용인 하나가 하나의 기록만 담당할 필요도 없겠지?”
= 정말 재미있겠습니다. 결국 고용인들도 부여받은 기록에 따라서 상하 관계가 생길 수도 있겠군요?
“결국 근원의 기록이라는 권력을 지닌 상태로 서로 뭉쳤다가 흩어지고, 흩어졌다 뭉치기를 반복하겠지. 하하하하.”
= 그렇군요. 그런데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모르지.”
= 네?
“갑자기 떠오른 발상일 뿐, 아직 실험도 안 해 봤으니까. 그런데 사실 이미 실험을 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어.”
= 실험을 하고 있다니요? 제가 마스터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있었습니까?
뮤-지하는 섭섭하다는 표정을 숨지기 못했다.
“그게 아니라. 의식 공간에 있는 소환체들 말이야.”
= 소환체가······.
“그 중에 기록을 부여한 놈들이 있잖아. 그리고 그 기록 중에는 서로 상반된 효과를 지닌 것도 있고.”
= 아, 그렇군요. 각기 다른 기록을 부여받은 소환체들이 있군요? 더구나 그 소환체들은 나름 판단력도 뛰어난 편이고 말입니다.
“그래 그거지. 어때? 소환체들에게 기록을 부여하고 그 기록의 실현을 맡기면?”
= 대단하십니다 마스터. 그런 방법이라면 어떤 기록이라도 한 곳에 모아 둘 수 있겠습니다.
뮤-지하는 크게 흥분한 듯이 몸을 들썩였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겠지만, 제법 재미있는 발상인 건 분명하지. 다만 그렇게 기록을 부여한 소환체들을 어떻게 근원으로 만들 수 있느냐 하는 거지. 한 곳에 모아둔다고 끝이 아니지. 전부를 하나로 묶어서 근원으로 만들어야 하거든.”
= 으하하하하. 마스터, 시작이 반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이건 정말 대단한 발상입니다. 일단 시작을 해 보시지요. 시행착오가 있겠지만 그 또한 성공을 위한 과정이 아니겠습니까.
도현의 조심스러운 태도에 비해서 뮤-지하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후우, 그래, 어차피 직접 실험을 해 봐야 결과를 알겠지. 당분간은 여기 머물면서 이게 가능한 건지 확인을 해 보자.”
도현은 결국 뮤-지하의 기대에 맞춰서 그런 결정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