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헥카몰의 선택
159. 헥카몰의 선택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냐?”
헥카몰이 감찰대 대장을 보며 물었다.
“탐사대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전사 히자르가 탐사대의 움직임을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움직임을 보여주다니?”
“저 소환 투체가 보고 듣는 것을 그대로 옮기는 방식입니다. 하얀색의 평평한 면에 시야에 들어오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마력을 이용해서 음성까지 들려줬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아파카 협곡 전체에 퍼져?”
“히자르가 소환 투체를 여럿 만들어서 아파카 협곡의 주둔지마다 하나씩 보냈습니다.”
“소환 투체를 여럿? 그게 무슨?”
헥카몰은 소환 투체를 여럿 만들었다는 말에 깜짝 놀라며 흑영을 노려봤다.
그 사이에 흑영은 제법 몸을 회복한 상태였다.
“그 소환 투체들이 탐사대의 활동을 낱낱이 보여줬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특별한 소일거리가 없었던 전사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즉시 히자르를 잡아 감금하려 했으나, 이미 상황이 여의치 않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급히 대전사님을 쫓아왔습니다만.”
감찰대장은 그렇게 말을 하며 포위당한 전사들과 전사들을 포위한 수타림 부족원들을 보며 말 끝을 흐렸다.
게다가 자신이 도착했을 때, 히자르의 소환 투체는 거의 소멸될 정도로 상태가 심각하지 않았나.
그렇다는 것은 이미 감찰대장이 우려했던 일이 벌어진 후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니까, 나와 우리 부족의 전사들이 이곳에서 벌인 일을 아파카 협곡의 모든 전사들이 지켜봤다고?”
헥카몰이 확인하듯이 감찰대장을 보며 물었다.
감찰대장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한 마디를 더했다.
“지, 지금도 이곳의 모습이 협곡 전선의 모든 주둔지로 전해지고 있을 것입니다.”
“끄응.”
감찰대장의 말에 헥카몰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며 흑영을 노려보았다.
“네 계획이었더냐?”
흑영을 보고 있지만 실제론 히자르에게 묻는 것이다.
흑영은 아무 대답없이 조용히 헥카몰의 시선을 받고 있을 뿐이었다.
계획이라 물으니 그렇다는 대답은 하지 않는 모양새다.
그저 히자르는 탐사대를 통해서 호르니어 둥지의 상황을 협곡 방어선의 전사들에게 알리려 했을 뿐이다.
그렇게 호르니어의 죽음을 확인한다면 방어선의 전사들이 얼마나 기뻐할 것이며, 사기 또한 크게 오를 것이 아닌가.
적어도 도현이 탐사대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방송하기 시작한 표면적인 이유는 그것이었다.
물론 도현은 헥카몰이 어떤 짓을 벌일지 짐작하고 있었지만 대외적으로는 절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우연히 헥카몰의 비위를 알게 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크하하하하하. 크하하하하하.”
갑자기 헥카몰이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그의 웃음에는 대전사의 영력이 가득 담겨 있어서, 호르니어 둥지에 있는 모든 전사들이 괴로워하며 비틀거렸다.
그것은 수타림 부족의 전사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크흐흐. 이건 뭐, 변명의 여지도 없군. 이미 모두 지켜봤다면 내가 무슨 변명을 할 수 있을까.”
“사, 사령관 각하.”
헥카몰의 혼잣말에 라페올이 다급한 목소리로 헥카몰을 불렀다.
“네가 나설 때가 아니다.”
헥카몰이 그런 라페올을 향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라페올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최소의 손해로 덮을 수 있을까.
헥카몰의 머릿속은 그 생각만으로도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사령관 각하, 이왕 이렇게 된 것······.”
그런데 그 때, 라페올이 헥카몰에게 뭔가 조언을 하려 했다.
그리고 그 순간 헥카몰의 눈썹이 날카롭게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감히! 끼어들지 말라고 하지 않았더냐! 네 따위가 나설 곳이 아니라고!”
퍼벙!
“크악!”
헥카몰은 선을 넘은 라페올의 행동에 버럭 화를 냈다.
그 결과 라페올은 피를 토하며 하세르의 발치까지 날아가 나뒹굴었다.
“사, 사령관 각···쿨럭! 울컥! 울컥! 크으으.”
라페올은 몸도 가누지 못하고 그저 헥카몰을 향해 손을 뻗어 자비를 호소했다.
하지만 헥카몰은 그런 라페올에게서 시선을 돌려버렸다.
“크으으.”
털썩!
라페올은 헥카몰의 시선이 돌려지는 순간 정신을 잃고 흙바닥에 퍼지고 말았다.
“모두들 모여라.”
헥카몰이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그 명령을 따르는 이들은 당연히 수타림 부족의 전사들 뿐.
“일이 참으로 난감하게 되었다. 감찰대장의 말에 따르면 아파카 협곡 전선의 모든 이들이 내가 이곳에서 벌인 모든 일을 지켜봤다는구나. 그리고 지금도 지켜보고 있겠지.”
헥카몰의 시선이 흑영에게 닿았다.
흑영은 그 눈빛을 받고 가만히 있다가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하는구나.”
헥카몰은 흑영의 답을 보더니 자신의 뒤쪽에 모여 있는 부족원들을 돌아보았다.
“모두 알겠지만 지금 우리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우리들은 아베트 종족을 배신한 것이다.”
헥카몰의 말에 수타림 전사들의 고개가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알겠지만 이로 인해서 여기 있는 우리뿐만이 아니라 수타림 부족 전체가 질타를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이 상황은 헥카몰 개인의 일탈로 볼 수가 없었다.
그가 수타림 부족의 전사들을 사병처럼 부렸으니 책임은 헥카몰 개인이 아니라 수타림 부족에게 전가되었다.
게다가 라페올.
재능이 뛰어나 헥카몰이 후계로 삼으려 했던 놈의 가벼운 언행이 더 문제였다.
헥카몰은 탐사대가 출발한 이래로 라페올의 언행이 어떠했는가를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라페올의 언행에서 드러났던 선민사상은 아무리 생각해도 덮을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하여 묻겠다.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
헥카몰이 고개 숙인 부족 전사들에게 물었다.
하지만 누구도 고개를 들고 의견을 내는 이가 없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여기 있는 모두를 죽이고 우리들이 부족으로 돌아갈 길쯤은 열 수 있을 것이다.”
헥카몰이 하나의 방법을 제시했다.
계획대로 함께 온 다른 부족의 전사들을 모두 죽이자는 것.
다만 그 후에는 수타림 부족의 영역으로 도망가 숨어 살아야 할 것이다.
이후로는 어디서도 고개를 들고 살아갈 수 없으리라.
어쩌면 수타림 부족에서도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 정도는 모두 짐작할 수 있었다.
잠시 고개를 들었던 수타림 부족원들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이전보다 고개가 더 깊이 내려갔다.
“크흐흐흐. 그래, 그렇게 살아봐야 구차할 뿐이지. 그렇다면 이런 것은 어떠냐? 우리 모두가 죽는 것은.”
헥카몰이 또 다른 제안을 했다.
이번에도 부족원들이 고개를 들고 헥카몰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들은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지은 죄가 크니, 우리 모두가 마수 전선 너머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모두 죽을 때까지 마수 전선 안쪽에서 마수와 싸우는 것이지.”
“죽을 때까지 말입니까?”
감찰대장이 물었다.
“그렇다.”
“그럼 보급은······.”
“받아야지. 조금이라도 더 오래 버티며, 한 마리라도 더 많은 마수를 잡아 죽이기 위해서.”
“그렇군요.”
“한 달을 버티든, 두 달을 버티든, 1년을 버티든. 우리는 절대 살아서 마수 전선을 넘어 돌아가지 않는다. 그리 약속하고 떠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부족에게 죄가 돌아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조금이라도 줄여보자는 것이지. 그리고 우리가 전선 안에서 선전할수록 부족의 죄는 가벼워 질 것이 아니냐.”
“부족엔 다른 대전사분들도 계시니······.”
“그들 조차 어쩌면 크게 희생을 해야 하겠지. 그렇지 않으면 부족 전체가 위험할 수도 있으니.”
헥카몰과 감찰대장은 그렇게 대화를 나누었다.
하세르를 비롯한 다른 부족 전사들은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볼 따름이었다.
어차피 싸워봐야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
그러니 좋은 쪽으로 결론이 나기를 바라며 기다릴 수밖에.
“그렇다면 그렇게 하는 것으로 하지. 여기에 이의가 있는 놈이 있느냐?”
감찰대장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 헥카몰이 부족 전사들을 보며 물었다.
이의가 있느냐고 물었지만 그것은 그냥 따르라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수타림 부족의 전사들은 누구하나 입을 열지 않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에 헥카몰이 몸을 돌려 흑영을 바라보았다.
“들었느냐? 아파카 협곡 전선의 모든 전사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을 마수 전선의 모든 전사들, 더 나아가 아베트 종족 전부에게 알린다.”
헥카몰은 흑영의 눈이 자신의 모습을 전해주리란 사실을 안다는 듯이 흑영을 향해 말했다.
“여기 있는 수타림의 모든 일족은 마수 전선으로의 귀환을 포기한다. 아울러 우리 모두가 죽을 때까지 마수들과의 싸움을 이어갈 것이며, 그것은 우리들이 지은 죄에 대한 사죄이며 속죄이다.”
헥카몰은 그렇게 말을 하고는 다시 몸을 돌려 뒤쪽에 있는 부족원들을 훑어보았다.
아마도 흑영의 시선이 그를 따라 움직여 줄 것을 바란 모양이었다.
“나와 여기 일족의 이런 행동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우리의 이런 사죄와 속죄가 가치를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이것뿐이다. 아울러서 부족의 영광에 눈이 멀어 소인배처럼 행동했던 과거가 부끄럽다는 말로 내 사죄를 마무리한다. 고작 말 따위 보다는 목숨을 바치는 모습으로 진심어린 사과를 전할 것인 즉. 아베트여 우리를 용서하라.”
헥카몰은 흑영을 향해 그렇게 말하고는 부족원들을 이끌고 호르니어의 둥지 밖으로 떠나갔다.
이제 호르니어의 둥지에 남은 것은 하세르를 비롯한 중하급 전사들 뿐이었다.
“우리도··· 돌아가자. 호르니어의 부산물도 챙기고.”
하세르가 남은 전사들을 이끌었다.
그 때.
“이, 이런 제엔자앙!”
헥카몰과 수타림의 전사들이 모두 떠난 후에야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라페올이 상황을 파악하고 고함을 질렀다.
헥카몰에게 맞아서 깊은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부족원들에게 버림받은 상황.
혹시라도 이대로 아파카 협곡 전선으로 끌려가도 좋은 꼴을 못 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인지 라페올은 고함을 지르더니 곧바로 허리에서 단검을 뽑아 제 목을 그어 버렸다.
“크윽!”
털썩!
“쯧!”
“퉤엣!!”
“잘난 척은 다 하더니, 고난이 다가오자 자살을 해?”
“전사가 자살이라니! 차라리 마수에게 몸을 던지는 한이 있어도 자살은 아니지.”
“그런 정신머리를 가졌으면 동료를 그렇게 대하진 않았겠지.”
“그것도 그렇군. 퉤엣!”
라페올의 죽음에 전사들은 침을 뱉었다.
라페올에게 직접 침을 뱉은 것이 아니라 못 볼 것을 봤다는 듯이 그렇게 부정을 털어내는 것이다.
스스슥! 스슥! 슥!
그런 중에 흑영이 죽은 라페올을 끌고 전투 중에 파인 구덩이에 던져 넣었다.
그렇게 호르니어 둥지에서의 이변이 마무리 되었다.
물론 흑영이 라페올의 품 속에서 뭔가를 챙겼다는 것은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