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아파카 협곡 전선에 모두 전해지고 있습니다
158. 아파카 협곡 전선에 모두 전해지고 있습니다
헥카몰이 이끄는 탐사대가 호르니어의 둥지까지 반나절만에 주파했다.
원래는 달려드는 마수들 때문에래도 그렇게 빠르게 갈 수 없었겠지만, 대전사인 헥카몰의 기세에 대부분의 마수들이 숨을 죽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끄응. 정말로 죽었군.”
그리고 호르니어의 둥지가 있는 언덕 위에 올라섰을 때, 일행들의 눈앞에는 둥지 안에 쓰러져 있는 호르니어가 보였다.
“붉은 색의 피부라니, 정말 히자르 전사의 말이 맞았습니다.”
하세르가 죽어 있는 호르니어를 보며 말했다.
“그렇군.”
이에 헥카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짧게 대꾸했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하세르 뒤에 있는 흑영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호르니어의 뿔은 어디에 있지?”
호르니어는 쓰러져 있었지만, 그 몸체만큼 길었던 뿔은 사라지고 없었다.
실제로 네임드 마수인 호르니어의 기운이 응축되어 있는 부분이 그 뿔이었다.
그런데 죽은 호르니어의 사체에 그것이 없으니 의혹을 보내는 것이다.
“뿔은 전사 히자르가 갈무리하지 않았겠습니까? 호르니어를 잡은 것이 전사 히자르니 말입니다.”
하세르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느냔 듯이 대답했다.
흑영은 음성이나 사념을 이용한 대화가 아직 불가능했기에 하세르가 대신 나선 것이다.
“네가 뿔을 챙긴 것이 사실이냐?”
헥카몰이 흑영을 노려보며 물었다.
이에 흑영이 도현의 의지를 받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헥카몰은 뿔의 행방을 확인한 것으로 볼 일을 마쳤다는 듯이 등을 돌렸다.
그리고 그 뒤로 호르니어에 대한 해체 작업이 시작되었다.
탐사대의 전사들이 모두 달려들어 호르니어의 가죽을 벗기고, 뼈를 뽑았다.
그리고 몇몇은 내장 기관과 피 따위를 따로 갈무리하기도 했다.
그 작업이 끝날 무렵에 호르니어의 둥지에는 날이 저물고 어둠이 깔렸다.
“사령관 각하, 정리가 끝났습니다.”
탐사대의 부관 역할을 하는 상급 전사가 헥카몰에게 보고했다.
근처에서 나무를 잘라와 의자와 탁자를 만들어 앉아 있던 헥카몰은 그 보고를 듣고 탐사대를 훑어 보았다.
“아무래도 날이 저물었으니 귀환은 내일 아침에 하는 것이 좋겠군. 숙영지를 세워라.”
“네, 사령관 각하!”
헥카몰의 결정에 이의는 없었다.
곧바로 호르니어의 둥지 안에 숙영지가 만들어졌다.
헥카몰은 제대로 만들어진 천막 안으로 들어갔고, 다른 전사들은 근처에서 수급한 나뭇가지와 잎으로 자리를 만들었다.
* * *
삐이이이이이이이익!
외곽을 지키는 불침번 네 명만 어둠을 노려보는 이른 새벽.
동이 트기 전, 가장 깊은 잠에 빠져 있던 탐험대 숙영지에 날카로운 경적이 울렸다.
“뭐? 뭐냐?”
“이게 무슨 소리야?”
“저거, 소환 투체잖아. 호르니어를 잡았다던.”
귀를 찢을 것 같은 날카로운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이들이 소리의 근원을 찾았다.
그러자 숙영지 모닥불을 등지고 입에 대롱을 물고 있는 흑영이 보였다.
날카로운 경적 소리는 그 대롱에서 나오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하세르가 흑영에게 달려가 대롱을 빼앗으며 소리쳤다.
그러자 흑영이 손가락을 뻗어 한 쪽을 가리키며 그 상태로 몸을 한 바퀴 돌렸다.
즉 주위를 한 바퀴 돌면서 뭔가를 가리킨 것이다.
“어엇? 뭐야? 왜 다들 깨어 있지?”
“씨발, 깨어 있는 것이 아니라 포위하고 있는 거다.”
“포위, 우리를 왜?”
“이게 무슨 일이야?”
“수타림 부족 놈들이 우리를 포위한 거잖아.”
숙영지의 모닥불 근처로 모인 전사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흑영이 무엇을 알려주려 했는지 곧 알아차렸다.
“다들 깨어났군.”
그 때, 헥카몰이 자신의 천막에서 걸어나왔다.
갑옷과 양손검을 완전히 갖춘 모습으로.
“헥카몰 사령관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중앙으로 모인 전사들 중에 하나가 헥카림을 향해 물었다.
“굳이 물어봐야 할 정도로 상황 판단이 안 되나?”
그런 전사를 힐끗 바라보며 헥카몰이 물었다.
“그럼, 정말로······.”
질문을 던졌던 전사가 절망스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표정은 곁에 있던 다른 전사들에게도 그래도 전염되었다.
“호르니어 토벌의 공을 빼앗으려는 것입니까?”
하세르가 헥카몰을 보며 물었다.
“그것도 있고, 내가 호르니어의 종적을 놓쳤던 것도 덮어야 하고. 겸사겸사지.”
헥카몰은 숨길 것도 없다는 듯이 뻔뻔하게 대꾸했다.
이미 주위를 완전히 포위하고 있었고, 그 안에 있는 전사들이라고 해 봐야 고작 중급과 하급이었다.
부관으로 따라온 상급 전사마저도 같은 수타림 부족의 전사이니 이 정도 전력만 하더라도, 눈앞에 있는 놈들은 어떤 경우에도 빠져 나갈 수 없었다.
그런데 거기에 대전사인 자신까지 있는 마당이 아닌가.
여기서 어떤 놈이 빠져 나갈 수 있단 말인가.
“사령관 각하, 지금 이곳의 상황을 전사 히자르가 모두 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것 같습니까?”
“크하하하. 지금 상황을 열심히 떠든다고? 정말 그게 가능할 것 같으냐?”
“그게 무슨······.”
“지금쯤이면 히자르 그 놈은 부대 감찰대에 잡혀서 수감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놈이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이냐?”
“감찰대?”
“내가 아무 생각없이 일을 벌였을 것 같으냐? 이미 출발할 때부터 새벽 시간에 맞춰서 감찰대를 출동시키라 해 뒀단 말이지. 하하하하.”
“그, 그런······.”
헥카림의 웃음소리가 커질수록 포위된 전사들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함께 마수를 막아 온 것이 몇 년인데, 우리를 이렇게 대할 수가 있느냔 말입니다!”
포위된 전사들 중에 하나가 억울하다는 듯이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헥카몰의 뒤쪽에서 라페올이 불쑥 튀어 나왔다.
“너희 따위가 뭐? 마수를 상대하다보면 잠깐 사이에 수십 명이 죽어 나가기도 하는 곳이 마수 전선이다. 이런 곳에서 너희 몇 명의 죽음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냐?”
“저, 저런 피도 안 마른 것이!”
“헥카몰 사령관을 믿고 너무 철없이 설치는군.”
“저런 것을 후계자로 점찍은 사령관의 안목도 한심스럽군.”
“그런 사령관을 지금까지 굳게 믿어온 우리 눈은 더 쓸모가 없는 거지.”
“네임드 마수를 잡았다는 명예를 얻기 위해서 동료를 죽일 생각을 하다니,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군. 어찌 저리 몰염치하단 말인가.”
“내 오늘 여기서 죽겠지만 부끄럽지 않게 죽으리라!”
“마수가 아닌 동료에게 죽다니······.”
“헥카몰! 너와 너희 수타림을 저주하겠다.”
“조상들께서 굽어보신다면 오늘의 이 일이 알려져서 너와 너희 부족인 수타림이 그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될 것이다.”
“자, 모두들! 무기를 들자!”
“우와아아아아아!”
“와아아아!”
죽음을 각오한 전사들이 무기를 뽑아들고 영력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수타림 부족의 전사들은 침묵을 지켰다.
그들 역시 이 일이 떳떳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부족을 위한 일이기에 양심의 거리낌을 억누르는 것이다.
“그래, 다들 마지막 유언은 끝났느냐?”
전의를 불태우는 전사들을 보며 헥카몰이 물었다.
사실 그 혼자만 나서도 눈앞에 전사들은 단번에 쓸어버릴 수 있었다.
상급이나 최상급도 없이 고작해야 중급과 하급의 전사들이 아닌가.
그랜드 마스터 경지의 실력자가 익스퍼트 수준을 상대하는 일과 비교할 정도나 될까.
“사령관 각하,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헥카몰이 손을 쓰려는 순간, 라페올이 나섰다.
“음? 네가?”
헥카몰이 탐탁치 않은 눈빛으로 라페올을 보며 물었다.
마수가 아닌 동료를 죽이는 일이다.
그런 지저분한 일에 굳이 나설 이유가 있나 싶었던 것이다.
“수타림을 책임져야 할 제가 아닙니까.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라페올은 공손하게, 그러면서도 적극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이 노옴! 라페올, 언젠가는 해야 할 일?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것이냐? 도대체 너희 수타림은 지금껏 이런 짓을 얼마나 벌여왔다는 것이냐!”
하세르가 그런 라페올을 향해 분노의 고함을 질렀다.
“쯧! 아까부터 주제를 모르고!”
그런 하세르의 모습이 눈에 거슬렸는지 헥카몰이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한 줄기 영력이 창처럼 날아가 하세르를 찔렀다.
그런데 그 속도가 너무나 빨라서 하세르는 손에 들고 있던 대검을 제대로 들어 올리지도 못했다.
콰광!
“허억!”
그런데 그 위험한 순간 하세르의 뒤쪽에서 흑영이 튀어나와 헥카몰의 영력 창을 쳐 냈다.
“허어, 제법이군.”
그 모습에 헥카몰의 눈이 살짝 커졌다.
설마 자신의 공격을 막아내는 일이 벌어질 것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그래봐야 저렇게 망가졌으니 막았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라페올은 헥카몰의 영력 창을 막아낸 후, 한쪽으로 날아가 처박힌 흑영을 보며 비웃었다.
하세르를 구하기 위해 헥카몰의 창을 막았던 흑영은 팔과 함께 어깨의 일부가 날아간 상태였던 것이다.
“감히 내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너는 그것을 비웃을 자격이 없다.”
하지만 헥카몰은 흑영의 방어를 얕잡아 보지 않았다.
어쨌거나 대전사의 공격을 막았다.
그 말은 대전사의 영력에 담겨 있는 특별한 기운을 버텨냈다는 이야기다.
헥카몰이 주목하는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네? 그게 무슨······.”
하지만 라페올은 대전사의 특별한 기운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그래서 헥카몰이 한 번의 공격을 막은 소환 투체에 보이는 관심을 이해하지 못했다.
“시끄럽다! 너는 물러나 있거라!”
그래서 결국 헥카몰에게 한 소리를 듣고 마는 라페올이었다.
“안타깝구나, 너 같은 놈에게 대전사의 재능이 담겨 있다니.”
헥카몰은 비척비척 일어나는 흑영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는 탐사대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대전사의 재능이라고?”
“지금 대전사라고 한 거야?”
“그 작은 부족의 전사가 대전사의 재능을 지녔다고?”
“하아, 그런 인재를 살려둘 생각이 없다는 말이군.”
“어떻게 그럴 수가······. 아무리 부족을 위한다고 하지만, 종족 전체에게 큰 힘이 될 인재를······.”
“그런 것을 따졌으면 저 헥카몰과 수타림 전사들이 이런 짓을 벌이지도 않았겠지.”
“정말, 아베트의 앞날이 어찌 되려고······.”
대전사인 헥카몰이 마음을 먹었으니 소수 부족인 헤카싸림 부족의 히자르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죽음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탐사대의 전사들은 흑영을 보는 눈빛에 안타까운 기색이 역력했다.
“길게 끌 것 없겠지. 이제 그만 다들 죽······. 음?”
헥카몰이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직접 손을 쓰려고 할 때였다.
그의 기척에 멀리서 달려오는 부족 전사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는 사령부의 감찰대 대장으로 지금은 히자르라고 하는 놈을 잡아 가두고 있어야 할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곳에?
“대, 대전사님!”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에 감찰대장이 언덕 위로 솟구쳐 오르며 헥카몰을 불렀다.
“네가 어쩐 일이냐? 어떻게 여길 왔어?”
헥카몰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전사님,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일이 그대로 아파카 협곡 전선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뭐? 뭐가 어쨌다고?!”
대전사의 정신은 굳건하고 이해력은 뛰어나다.
그러니 감찰대장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알아들었어도 믿기 어려운 것은 사실.
헥카몰의 목소리가 그의 심경을 대변하듯 갈라지며 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