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아크 영역의 시험장 밖과 연결되는 공간
156. 아크 영역의 시험장 밖과 연결되는 공간
네임드는 네임드다.
호르니어를 상대하는 도현은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수 전선 전반에 걸쳐서 아베트 종족을 압박하는 실체인 네임드 마수.
리테라 피스를 흡수하는 가장 극적인 순간에 실패하고, 그 충격을 고스란히 받게 된 상태에서도 호르니어는 만만치 않았다.
흑영이 바트란의 비기로 관통 효과를 부여한 창을 꽂아 넣은 것이 서른 개가 넘어서야 호르니어는 그 두꺼운 앞다리를 꿇었다.
하지만 두 무릎이 땅에 닿은 상태에서도 어떻게든 뿔을 치켜들어 흑영을 향해 휘둘렀다.
원래 자신의 몸보다 길었던 호르니어의 뿔은 개체 하나를 공격하기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었다.
호르니어의 뿔은 다수의 밀집 대형을 꿰뚫기 위한 돌격창의 역할을 했다.
물론 돌격창이라고 한 것은 가장 이해하기 쉽게 표현한 것일 뿐.
마력을 가득 품은 뿔로 돌격을 하거나 원거리에서 쐈을 때의 위력은 전사 수십 명과 병사 수 천 명이 뭉친 집단 방어를 단숨에 박살낼 정도였다.
호르니어는 지금 그런 뿔을 검처럼 휘둘러 흑영을 공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포기하지 않은 공격 의지의 표현일 뿐, 코뿔소가 휘두르는 뿔 따위가 흑영에게 닿을 수는 없었다.
‘끈질긴 놈!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다.’
도현은 호르니어의 지구력에 진저리를 치며 다시 창을 들어 호르니어의 미간을 노렸다.
처음 한 번의 타격 이후로는 지금껏 한 번도 공격에 성공하지 못했던 호르니어의 미간.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도현은 이번 공격을 호르니어가 막아내지 못할 것임을 직감했다.
그리고 호르니어 역시 그것을 느꼈는지 휘두르던 뿔의 움직임을 멈추고 흑영을 노려보았다.
‘보긴 뭘 봐!’
도현은 호르니어의 눈빛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그의 관심은 오직 호르니어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리테라 피스.
호르니어가 흡수에 실패한 후, 하나의 수정 조각으로 변해서 호르니어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그것을 손에 넣고 싶을 뿐이었다.
콰곽! 쿠우우우우우우! 푸후후!
흑영은 간결한 움직임으로 관통 효과가 부여된 창을 호르니어의 미간 깊이 박아 넣었다.
영력으로 구현된 창은 호르니어의 뇌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서 창촉을 폭발시켰다.
호르니어는 뇌가 곤죽이 되는 화끈한 느낌에 낮은 포효를 흘리며 땅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쓰러진 호르니어의 입에서는 마지막 숨결이 길게 흘러나왔다.
‘끝났군.’
도현은 호르니어가 죽은 것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흑영을 머리 위로 옮겼다.
그리고 미간에 박힌 창을 영력으로 바꿔서 흩어버리고, 그 구멍을 향해 영력을 쏟아넣었다.
그리고 잠시 후.
뽀옥!
미간의 구멍 속에서 주먹 크기의 수정기둥 하나가 뽑혀 나왔다.
쉬이이이잉 쉬이이이잉!
수정기둥은 호르니어의 머리에서 뽑혀 나오자 기이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도현은 흑영을 통해서 그 소리가 수정 기둥이 진동을 하면서 나오는 것임을 알았다.
‘이런!’
도현은 급히 의식을 집중했다.
이번에는 흑영을 통해서 의식 공간에 물건을 수납하는 능력을 써야 했다.
원래는 쉽게 쓸 수 있는 능력이었지만 히자르의 몸에 빙의한 후에는 품에 들어올 크기의 상자도 버거웠다.
그런데 지금은 히자르가 아니라 흑영을 통해서 그 능력을 써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리테라 피스의 공명을 따라서 어떤 놈들이 들이닥칠지 알 수 없었다.
에포르가 알아낸 바에 따르면 산산조각으로 흩어진 리테라 피스들은 주인이 없는 상태에서는 서로 공명하는 특성이 있다고 했다.
리테라 피스를 얻어서 흡수를 시작하면 그 공명이 사라지지만, 그 전까지는 이렇게 진동을 통해서 일정 파장을 내보내는 것이다.
‘흑영을 통해서 리테라 피스를 흡수할 방법은 없다. 그렇다고 흑영이 리테라 피스를 들고 여기까지 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마수 전선에는 히자르보다 뛰어난 전사들이 많이 있다.
그들이라면 흑영이 전선 가까이 다가오면 리테라 피스의 진동과 공명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니 안전하게 의식 공간에 리테라 피스를 넣어 둬야 했다.
지이잉!
흑영을 통해서 물품을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을 여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융합의 경지에 오른 도현의 정신력은 그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겨우 리테라 피스가 들어갈 정도의 크기로 공간의 입구를 연 도현.
흑영을 움직여 리테라 피스를 그 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투우우우웅!
“크윽!”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마수 전선의 거처 지하에 있던 히자르가 신음소리를 내며 앉아 있던 몸이 흔들렸다.
- 로드! 괜찮으십니까!
에포르의 다급한 목소리가 그런 히자르의 정신을 두드렸다.
“끄응. 이게 무슨 일이지?”
도현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 로드, 리테라 피스가 시험장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에 에포르가 도현이 의아하게 여긴 부분을 확실하게 확인해 주었다.
흑영을 통해서 의식 공간을 열고 거기에 리테라 피스를 넣었는데, 그 리테라 피스가 아크 밖에 있는 도현의 공간으로 이동된 것이다.
‘어떻게 된 거지? 히자르가 물건을 보관할 때와 다른 이유가 뭐지?’
도현은 스스로도 그 이유를 궁리하는 한편, 에포르에게도 질문을 던졌다.
- 로드, 공간이 이상하게 꼬였습니다. 로드의 물품을 책임지는 관리로서 말씀드리면.
‘그래, 말해 봐.’
- 흑영은 로드의 본체와 연결된 공간을 만들어 낸 것으로 보입니다.
‘아니, 원래 히자르가 소환한 흑영인데 왜 그 놈이 내 본체와 연결된 통로를 만들어?’
- 히자르의 능력으로는 흑영이 의식 속의 공간을 만들지 못하는 상황이라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히자르가 못하니까 본체가 했다?’
- 그렇습니다. 히자르를 통해서 흑영을 부리는 것이 로드이시니, 결국 부족한 부분을 로드에게서 채운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고 본체 쪽에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원래 쓰던 공간은······. 아, 그건 아크 공간의 일부였는데, 그걸 지금 시험장으로 쓰니까······.’
- 맞습니다. 그 때문에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내게 된 것 같습니다.
‘이거 좋은 건가?’
도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시험장에서 만들어진 리테라 피스가 지금 시험장을 벗어났다.
이렇게 되면 결국 시험장 안에서 리테라 피스를 하나로 모아서 융합한다는 계획은 시작부터 일그러진 상태다.
- 어쨌거나 로드가 아니면 그 누구도 리테라의 완성은 불가능해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좋은 일이 아닐까요?
‘이걸 들키면 초인 새끼들이 모두 달려들어서 나를 찢어 놓으려고 할 텐데?’
- 어차피 리테라 피스를 이곳에서 꺼내지만 않으면 될 일입니다. 그러면 누구도 로드께서 리테라 피스를 아크에서 꺼낸 것을 모를 것입니다. 아, 로드께선 이곳에서 리테라 피스를 꺼낼 수도 없는 상태군요. 그럼 걱정할 게 없지 않겠습니까?
도현의 정신은 시험장인 아크 방벽 안쪽에 있다.
그러니 밖에 있는 본체로 리테라 피스를 꺼낼 일은 없은 것이다.
‘으음. 대신에 나도 리테라 피스를 활용하지 못하는 거 아닌가? 본체가 리테라 피스를 가지고 있으면?’
- 로드의 공간인데 그곳에서 열지 못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흑영도 열었던 공간이니 로드께서도 열 수 있지 않을까요?
‘음, 하긴 내가 못 열면 흑영으로 열면 되니까 문제될 것은 없겠군.’
- 아, 흑영으로 여는 방법도 있군요.
‘이러면 나쁜 상황은 아닌 것 같군. 앞으로도 리테라 피스를 구하는 족족 밖으로 빼돌리고, 흡수하거나 연구할 것만 들고 있으면 되니까.’
- 다른 초인들의 아바타를 만난다고 해도 흡수하거나 가지고 있는 리테라 피스의 수가 적다면 견제도 덜 받겠지요.
‘글쎄? 얕보고 빼앗으려고 들지 않을까? 나같으면 그렇게 할 거 같은데?’
- 그야 로드께서 빠르게 경지를 올리시면 되겠지요. 일단 렉아베트 차원에는 다른 초인의 아바타가 없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부지런히 초인의 경지까지 오르면서 렉아베트 차원에 있는 리테라 피스를 모두 취하셔야죠.
‘그 다음에 다른 차원으로 옮겨갈 정도가 되어야 아바타를 걱정할 의미가 있다는 거냐?’
- 렉아베트에 다른 아바타가 없다면 지금은 그런 것을 고민하는 것은 괜한 심력 낭비일 뿐인 것 같습니다.
‘하긴, 그러네. 자, 그럼 어떻게 할까? 그 리테라 피스를 여기서 다시 꺼내야 하나? 아니면 그건 보험용으로 그냥 거기 둬야 하나.’
시험장 밖으로 나간 리테라 피스.
도현은 그것을 다시 시험장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아니다. 그건 그냥 거기에 두자. 다음에 새로운 리테라 피스는 얻게 되면 그 때, 그걸 흡수하는 걸로 하지.’
결국 도현은 최초로 아크 공간 밖으로 나간 호르니어의 리테라 피스는 그대로 밖에 두기로 했다.
- 로드께서 본체의 공간에 들어 있는 리테라 피스를 살펴보실 수 있다면, 흡수는 못해도 거기에 새겨진 기록은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리테라 피스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록이 중요한 것이라면······.
‘굳이 꺼내지 않아도 연구를 하는 것은 가능하다는 말?’
- 네, 로드.
‘그럴 수도 있겠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크 밖에 있는 공간을 느낄 수가 없어. 그러니 거기에 들어 있는 리테라 피스를 살피는 것도 불가능해.’
- 의식을 전부 아크 공간으로 들여보내니 그런 문제가 있군요. 그럼, 이 에포르가 리테라 피스의 기록을 살펴서 로드께 전해 드리겠습니다.
‘응? 에포르 네가? 근원의 기록을 읽을 수 있어?’
- 근원의 기록을 활용하지는 못하지만 그저 보는 것만이라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리테라 피스는 일반적인 기록이 아니라 특별한 기록인데 가능할까 모르겠네. 일단 해 봐. 성공하면 좋은 일이지.’
- 네, 알겠습니다 로드.
도현의 허락에 에포르는 의욕적으로 대답했고, 이후 도현은 흑영을 불러내어 공간의 입구를 여는 연습을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흑영이 히자르 보다는 밖에 있는 본체에 더 가깝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영력을 이용해서 투체를 만드는 것은 히자르였지만, 그 의식의 주인이 밖에 있는 본체여서 그런지 영력 사용의 많은 부분이 본체에 의지하고 있었다.
히자르의 영역이 도현이라는 본체를 통해 걸러지고 변형되어서 쓰이는 것이다.
그러니 히자르가 만든 의식 공간의 많은 부분이 본체인 도현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일곱 성과 관련된 의식 공간의 대부분은 도현이 중심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하지만 어차피 어느 쪽이든 도현일 뿐이고, 뜻하지 않게 밖에 있는 본체의 도움을 더 많이 받을 수 있게 된 부분은 긍정적이었다.
‘이러면 일곱 성을 의식 세계에 구현하는 것이 한결 더 쉬워지겠네.’
도현은 자신의 상태가 나쁘지 않다고 판단하고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본체의 영향력이 히자르의 영력에 플러스 요소가 되고 있어. 이걸 이제 알았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야. 이렇게 되면 내 성장은 몇 배는 더 빨라질 수 있지.’
히자르가 영력을 쓰는 것과 도현의 본체를 통하는 것은 그 효율이 달랐다.
이제 본체의 영향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면 히자르의 성장은 더 빨라질 것이다.
‘아, 그 전에 리테라 피스를 구해야지. 에포르!’
- 네, 로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리테라 피스를 찾아봐. 호르니어의 것은 그대로 밖에 둬야 하니까 다른 것이 있어야지.’
- 지금 가장 가까운 리테라 피스는 아베트 종족 전사의 손에 있습니다만. 괜찮겠습니까?
‘뭐, 종족 전사의 손에?’
- 조금 전에 상급 마수를 처리하고 리테라 피스를 손에 넣었습니다.
‘상급 마수를? 그럼 일반 전사는 아니겠네?’
- 아직은 일반 전사입니다. 이를테면 기대주 정도 되는 위치입니다.
‘그런 놈이 상급 마수를 잡았다고? 혼자 잡은 게 아니었던 모양이지?’
- 수타림 부족입니다.
‘아, 수타림.’
도현은 수타림 부족이라는 에포르의 한 마디에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수타림 부족은 아베트 종족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세력이 큰 부족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같은 부족 출신의 전사들도 많고, 그 중에는 중급, 상급 전사는 물론이고 대전사까지 세 명이나 있었다.
그런 부족의 유망주.
그렇다면 다 잡아 놓은 상급 마수의 마무리를 양보해서 어린 전사를 키워주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놈이 내 리테라 피스를 가지고 있단 말이지?’
아직 도현의 것은 아니지만, 어쨌건 도현은 자신의 것을 탐한 수타림 부족의 유망주가 못마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