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마수 전선으로
154. 마수 전선으로
“합격이다.”
항복 외침에 공격을 멈추고 물러나는 흑영을 지켜보다가 바트란의 등에서 벗어나 모습을 드러내는 히자르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히자르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런 히자르의 옆에는 쌍단검을 든 흑영이 시험관을 경계하는 태도로 서 있었다.
“나는 하세르라고 한다. 마수 전선에서는 통성명을 잘 하지 않는 편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니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는 통성명을 하지.”
“그런데 저에겐 일찍 이름을 알려주시는군요?”
“그야 너는 쉽게 죽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지. 투체의 종류만 봐도 그렇고.”
“그건 그렇습니다만.”
“소환 거리는 얼마나 되지? 얼마나 먼 곳까지 투체를 유지할 수 있는지, 그것도 중요한데.”
하세르는 기대감 가득한 표정으로 히자르를 보며 물었다.
“시야 거리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 정도 범위라면 투체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직접 보고 움직여야 하나?”
“그건 아닙니다. 대략적인 명령을 내리면 자의적으로 판단해서 움직입니다.”
“좋군! 대단해!”
히자르의 말에 바트란은 탄성을 터트렸다.
소환 투체가 스스로 판단해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니, 떠오르는 활용법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시험관 하세르는 기쁜 표정으로 히자르를 칭찬하고는 곧바로 정색하며 바트란을 바라보았다.
“헤카싸림 부족의 히자르는 마수 전선에 파견할 전사로서 충분한 역량을 갖추었다. 이에 헤카싸림은 부족의 의무를 다하였음을 선언한다. 이제 헤카싸림 부족은 20년 후의 파견을 준비하라.”
“알았소.”
하세르의 선언에 바트란은 짧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런 바트란의 표정에는 안도의 기색이 짙게 베어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부족 전체가 노예가 되는 것을 피할 길이 없다 싶었는데, 이제는 20년 후를 기약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자신의 비기를 뛰어넘는 소환 투체에 대한 영력 비법을 얻었으니 20년 후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히자르, 너는 너의 부대를 이끌고 따라 나서라. 준비는 되어 있겠지?”
하세르는 시험 결과를 알린 후, 히자르에게 출발을 재촉했다.
마수 전선으로의 복귀는 잠시도 미룰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준비 되었습니다.”
하세르의 말에 히자르는 그렇게 대답했고, 동시에 헤카싸림 부족들 사이에서 백 명의 젊은이들이 히자르의 뒤쪽으로 도열했다.
마수 전선으로 파견되는 사람은 전사 하나만이 아니라, 일반 전투인원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럼 가자!”
하세르는 히자르와 그 부대원이 준비되자 곧바로 몸을 돌렸다.
히자르도 그 뒤를 따랐고, 히자르의 뒤에는 백 명의 부족원이 따라붙었다.
따로 가족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는 과정 따위는 없었다.
그런 인사는 이미 시험 전에 끝낸 상태.
지금 이 순간 다시 감정을 드러내며 출정을 방해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 * *
키이이이익! 카아앗!
“막아!”
쿠궁!
“찔러!”
콰직! 콰지직! 콰콰곽!
쿠오오오오! 키이이이이!
서른 마리 가량의 벌레형 마수들을 상대로 헤카싸림의 병사들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집게발 달린 바퀴벌레처럼 생긴마수들은 사람보다 컸다.
그래서 헤카싸림 병사들은 방패를 앞세워 방진을 짠 상태로 함께 공격을 막고, 이후에 창으로 찌르는 방식으로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도현은 부대의 중앙에 우뚝 서서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고, 흑영은 방패로 짠 방진 밖에서 마수들을 빠르게 처리하는 중이었다.
도현의 시선이 저 멀리 홀로 7미터짜리 돌연변이 마수를 상대하고 있는 하세르에게로 향했다.
전선을 넘어와 자리를 잡은 마수 무리가 있다는 이야기에 시험관에서 인솔자가 된 하세르가 토벌을 결정하고 히자르의 의견을 물었다.
마수를 토벌하고 가겠느냐는 하세르의 질문에 히자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전선에 가면 매일같이 해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도현이 파악한 헤카싸림 부족의 병사들의 전투력은 그리 나쁜 편이 아니었다.
거기에 흑영의 도움이 있다면 하급 마수들 정도는 어렵지 않을 테니, 가벼운 훈련으로 나쁠 것이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토벌.
하지만 세상일은 항상 생각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설마하니 전선 후방에 있는 소규모 마수들 사이에 중급 마수가, 그것도 돌연변이가 있을 줄이야.
“차아앗!”
콰직! 콰드득!
츠츠츠츠츳! 츠츠츳! 촤악!
“빌어먹을!”
푸스스스스스!
히자르와 그 부대원들은 하급 마수를 상대로 차근차근 승기를 잡아간 것에 비해, 하세르는 돌연변이 마수를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이는 중이었다.
머리와 집게발은 가재를 닮았고, 가슴에서 배는 뱀의 몸통, 그 밑으로 세 갈래로 갈라진 꼬리는 전갈의 것을 달고 있는 돌연변이.
길이가 7미터나 되는데 영력을 가득 머금은 하세르의 메이스가 그 마수의 갑각을 제대로 깨지 못하고 있었다.
메이스에 맞은 부분이 움푹 파이긴 해도, 곧바로 회복해 버리니 공격 효과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돌연변이는 집게발이나 꼬리독침의 공격에 더해서 독을 뱉어내는 공격까지 할 수 있었다.
가까이 붙으면 집게발의 공격이 들어오고, 조금 떨어지면 꼬리독침이 내리 꽂히는데, 멀리 떨어지려 하면 독액을 뱉는다.
문제는 이 독액을 자그마치 수십 미터를 날릴 수 있어서 자칫하면 병사들이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 하세르는 거리를 벌리지 못하고 근접전을 지속하느라 빠르게 지쳐가는 중이었다.
“도와줘야겠군.”
도현이 한동안 하세르의 전투 상황을 지켜보다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곧바로 의식이 연결된 흑영에게 하세르를 도울 것을 명령했다.
스슥! 스르륵! 콰직! 콰과곽!
그 순간 흑영의 모습이 허공에 녹아들 듯 사라지더니 다음 순간 흑영이 돌연변이 마수의 가슴 밑 그림자에서 솟아났다.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흑영은 곧바로 도약한 후 돌연변이 마수의 집게발을 발판으로 삼아 몸을 띄워 마수의 머리에 닿아 단검을 찔렀다.
흑영의 단검은 마수의 더듬이 밑단을 찍어냈고, 이어서 갑각에 박은 단검을 붙들고 몸을 띄운 흑영이 마수의 머리 위에 올라서서 단검을 빠르게 내리 찍었다.
“차아앗!”
하세르도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마수가 흑영을 떼어내기 위해서 집게발을 머리 위로 휘두르는 순간, 하세르가 비기를 이용해서 단숨에 마수의 턱 밑으로 이동해 메이스를 휘둘렀다.
콰작! 콰작! 콱콱콱콱!
영력까지 더해서 빠르게 두드리는 메이스의 움직임에 마수의 머리 갑각이 분쇄되었다.
잠깐 사이에 중첩된 충격에 마수도 갑각을 회복하지 못하고 머리의 절반이 짓뭉개진 것이다.
퍼벙!
그런데 그 순간 돌연변이 마수의 집게발이 흑영을 타격했다.
갯가재가 집게발 펀치를 때리는 것처럼 한 순간에 흑영을 타격한 집게발.
흑영은 그 순간 허공에서 조각조각 나뉘어 영력으로 흩어졌다.
“으음.”
그 모습에 하세르가 낮은 신음 소리를 냈다.
집게발을 가진 마수들 중에서 일부가 이와 같이 강력한 펀치 공격을 한다.
하지만 하세르도 이 돌연변이 마수가 그런 공격을 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그저 만약을 생각해서 펀치가 날아올 거리를 가늠하며 최대한 그 궤적을 피해서 움직였는데, 히자르의 소환 투체는 그것을 고려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기회가 생겼으니!”
하세르는 돌연변이 마수의 펀치 공격이 터진 순간, 곧바로 집게발을 향해 달려들었다.
한 번 강력한 공격을 날린 집게발은 짧은 시간이지만 움직임에 제약을 받는다.
이것은 강력한 펀치를 날리는 집게발 마수들의 공통된 약점이었다.
연속으로 같은 공격을 하지 못하고, 도리어 집게발의 힘이 빠진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때에 관절 사이를 공격하면 의외로 쉽게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콰직! 콰직! 콰지지직! 콰직!
하세르는 맥이 빠진 집게발을 집중 공략했다.
그리고 결국 집게발을 몸통에서 떼어내는 쾌거를 이뤄냈다.
“끝장이다 놈!”
한쪽 집게발이 없어진 것은 단순히 전력 약화로만 볼 수 없다.
집게발이 떨어져 나간 쪽은 방어가 그만큼 허술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도 돌연변이 마수는 남은 집게발과 꼬리독침, 독액으로 저항했지만 승리는 하세르의 것이었다.
집게발이 막아주던 방어벽이 사라진 곳을 집중적으로 노리니 돌연변이 괴수도 결국 버티지 못한 것이다.
쿠구궁!
“후우.”
하세르는 돌연변이 마수가 쓰러지는 모습에 깊은 숨을 내쉬었다.
쉽지 않은 마수 하나를 잡아냈다는 안도의 한숨이었다.
그리고 히자르와 그 부대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이미 그 쪽도 하급 마수들을 모두 처리하고 전장 정리를 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음? 소환 투체가?”
히자르의 옆에 쌍단검을 든 흑영이 호위를 서고 있었다.
조금 전에 돌연변이 괴수의 펀치 공격에 산산조각 난 것을 봤는데, 벌써 새로운 투체를 만들어 냈다는 이야기다.
“벌써 소환이 가능했나? 단검은 몰라도 소환체는 좀 걸릴 줄 알았는데?”
원래 장구류 투체들은 소환 대기 시간이 짧은 편이다.
하지만 사역 가능한 소환체 투체의 경우엔 한 번 소멸하면 다시 불러내는데 적잖은 시간이 걸린다.
못해도 영력을 회복할 시간은 필요하다.
그런데 고작 십 여 분 사이에 다시 소환했다고?
“제가 영력이 좀 많은 편입니다. 필요하다면 소환 투체를 연이어서 셋 까지는 불러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조만간 한 번에 다수의 소환 투체를 불러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허어. 사역 가능한 소환체를 여럿? 놀랍군.”
오랜 역사에서 그런 예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대부분 대전사의 경지에 올랐던 경우였다.
“수도 늘리고, 아울러서 개체도 강화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조금씩 성과가 있으니 전선에서 크게 활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세르가 놀라거나 말거나, 도현은 자신의 성장 가능성을 부각시켰다.
“히자르 전사, 너의 말처럼 된다면 정말 좋겠지. 그렇게만 된다면 히자르 전사는 마수 전선의 영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세르는 정말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마수 전선은 아베트 종족의 피를 먹으며 겨우 버티는 중이었다.
그런 곳에 강력한 전사가 더해지는 것은 축복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서 저 돌연변이를 갈무리하고 움직이지요. 전선으로 갈 길이 바쁘지 않습니까.”
“그래, 부탁하지.”
“알겠습니다.”
히자르는 부하 병사들을 시켜 하세르가 잡은 돌연변이 마수의 부산물을 갈무리하게 했다.
체액을 뽑고, 갑각을 해체하고, 꼬리의 독침과 몸 안의 독샘과 독낭을 떼어냈다.
그리고 남은 살을 발라냈다.
오랜 세월 마수와 싸우다보니 아베트 인들은 마수의 살을 식량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등급이 높은 마수들의 살은 곧 수련에 도움이 되는 보조제의 역할도 했다.
“하급 마수들은 가는 길에 마을을 만나면 넘겨주도록 하고, 돌연변이는 전선으로 가는 동안 식량으로 삼지.”
“감사합니다. 하세르 전사님.”
“나도 도움을 받았는데 모르는 척 할 수는 없지. 부산물도 적당히 챙겨줄 테니, 그렇게 알고.”
“배려를 해 주시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이제 전선으로 가는 몸이라 가진 것이 없어서 말입니다.”
“하하하하. 부족한 것이 있으면 내게 말을 하게. 힘 닿는 데까지 도와주지. 어차피 오래지 않아서 위로 올라갈 테니, 그 때는 도리어 내가 도움을 받겠지.”
“저도 받은 호의는 잊지 않을 겁니다.”
“하하. 그래, 그렇다면 나도 고마운 일이지. 하하하.”
하세르는 히자르가 크게 출세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선지 하세르는 히자르와 그 부대가 마수 전선에 닿을 때까지 많은 편의를 봐 주었다.
그리고 몇 달 후.
“저기가 마수 전선.”
중간에 몇 번 더 마수 토벌을 하며 워밍업을 마친 히자르와 그 부대가 드디어 마수 전선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