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최선을 다해야 할 거야
136. 최선을 다해야 할 거야
티라헤티피는 무척 협조적이었다.
도현은 그녀를 통해서 뮤-지하와 쿠소유차의 근거지 차원에 대한 좌표를 확보할 수 있었다.
쿠소유차는 거인족인 용병왕의 이름이었다.
물론 그것이 진명은 아니었다.
같은 발음을 하고 같은 문자로 쓴다고 해도, 그것이 진명이 되기 위해서는 차원의 근원에 기재된 기록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
“이건 학술원에도 몇 안 되는 최상급 탐사 일지예요.”
“이걸 쓰면 뮤-지하의 차원에 들키지 않고 들어갈 수 있다는 건가?”
“그래요. 적어도 당신이 그곳에 도착하는 것은 알 수 없을 거예요. 하지만 당신이 뮤-지하를 자극할 어떤 행동을 한다면 그가 당신을 찾을 수 있겠죠.”
“조심하기만 하면 놈이 나를 찾을 수 없다는 건가?”
“작정하고 차원 전체를 감시하고 있다면 들킬 수도 있겠죠.”
“그래도 그런 무식한 짓은 하지 않겠지. 피곤하기도 하지만, 그 상태를 오래 유지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맞아요. 괜히 감시에 힘을 쓰다가 진짜 싸움이 벌어졌을 때, 쓸 힘이 없다면 곤란하겠죠.”
“좋아. 그럼 뮤-지하는 그렇게 하기로 하고.”
“그 탐사 일지는 쿠소유차의 차원에도 쓸 수 있어요. 그건 1회용이 아니거든요.”
“대신에 차원 포인트가 많이 들겠지?”
“그건 어쩔 수 없죠. 서비스에 따라서 요금이 다른 거니까요.”
“정말 궁금하단 말이야. 이 차원 회랑을 누가 운영하고 있는지.”
“호호호. 그건 저도 몰라요. 혹시 알게 되면 저에게도 알려주세요.”
“그럴 수 있다면 그렇게 하지.”
차원을 묶어서 관리하는 주체가 있다.
그것이 지성체일 수도 있고, 시스템적인 체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초인의 존재를 알게 된 후, 도현은 차원 회랑이나 차원을 관리하는 시스템 역시 그것을 주관하는 존재가 있을 거란생각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런 존재 역시 하나가 아니라 여럿일 것으로 짐작되었고.
“고마워요. 그런데 곧바로 움직일 건가요?”
그렇게 묻는 티라헤티피의 눈빛 속에는 가벼운 흥분이 담겨 있었다.
“도박, 적당히 해라.”
도현은 그 질문에 대한 답 대신에 이렇게 충고를 던지고는 몰티 차원으로 통하는 차원 회랑을 열었다.
* * *
뮤-지하는 용인족 초인이다.
용인족은 다른 종족에 비해서 긴 수명과 높은 마력 재능을 지니고 태어난다.
그래서 다른 종족에 비해서 초인이 탄생할 가능성이 높다.
뮤-지하는 그런 종족적인 혜택을 제대로 받은 용인족이었다.
용인족의 초인 중에 하나가 실험적으로 키워 낸 초인이 바로 뮤-지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뮤-지하는 초인이 된 후, 자신을 키운 용인족 초인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향을 떠나 수많은 차원을 떠돌았다.
용인족은 태생적으로 개인주의의 성향이 강했다.
그런 용인족이 후손 중에서 초인을 길러낸 이유는 오직 하나.
초인을 이용해서 여러 가지 실험을 해 보기 위해서였다.
뮤-지하도 그것을 알았기에 스승의 품에서 도망친 것이다.
그 후, 고향에서 아득하게 먼 곳까지 도망친 뮤-지하는 옴파로에 도착했고, 차원 의회를 만들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옴파로의 차원 의회는 일종의 지부와 비슷한 성격이었다.
뮤-지하는 수많은 차원을 떠돌면서 몇몇 차원에서 차원 의회를 본 적이 있었다.
일정 영역에 속한 차원을 묶어서 관리하며 차원 시스템의 혜택을 받는 단체.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뮤-지하는 당시 차원 의회가 없었던 옴파로 영역에서 차원 의회를 만들어 시스템에 등록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하지만 뮤-지하는 차원 의회를 만들기 전에 먼저 자신의 근거지가 될 차원을 정해야 했다.
차원을 떠돌던 상태의 뮤-지하는 제대로 된 초인이라 하기에는 부족한 것이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옴파로 영역에 속한 차원들을 탐색하여 근거지로 삼을 차원을 찾았고, 결국 톨루사라고 하는 차원을 찾아냈다.
“후우, 근원 에너지가 굉장히 풍부한 곳이군.”
- 그렇습니까?
“몰티보다 30% 정도는 더 많은 거 같아. 알케이네스로 따지면 두 배에 가깝고.”
- 역시 초인이 선택한 차원은 남다른 면이 있군요.
“이건 좀 부러운데? 근원 에너지가 이렇게 많다니.”
- 원래부터 근원 에너지가 그렇게 많았던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다른 차원에서 흡수해서 이곳으로 가지고 왔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 그랬을 수도 있겠지.”
- 그런데 어떻습니까? 차원의 근원에 접속할 수는 있겠습니까?
에포르가 가장 중요한 점을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차원의 근원은 여러 형태로 존재한다.
초인은 그 근원을 인식할 수 있고, 또 그것에 간섭할 수 있는 힘이 있다.
하지만 때로 차원의 근원은 꼭꼭 숨어 있어서 찾기 어려운 경우도 많았다.
“존재감 확실한 근원이야. 찾는 것은 어렵지 않겠어.”
- 다행이군요. 물론 그곳에 뮤-지하가 있겠지만요.
“그건 상관없지. 뮤-지하는 그것을 지키고, 나는 그것을 공격하는 방식이면 내가 손해볼 것은 별로 없으니까.”
도현은 그렇게 말을 하고는 오랜만에 와이번을 소환해 올라탔다.
“여긴 이런 용종들에게 더없이 좋은 곳이야. 봐, 이 녀석 능력이 두 배는 증폭된 거 같군.”
도현은 와이번의 등에 올라서서 등을 가볍게 밟으며 감탄했다.
- 차원의 근원에 용종에게 도움이 될 기록들이 많이 있는 모양이군요.
“그래. 종 자체가 받는 혜택이 어마어마하네. 활력이나 생명력이 늘어나는 것은 물론이고, 지력의 상승이나 신체 능력의 상승은 기본으로 깔려 있어. 차원 자체가 용종에게 엄청난 혜택을 주는 곳이야.”
도현은 차원 전체에 작용하고 있는 시스템의 일부를 해석하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런 식으로 종족에게 유리한 차원 설계를 할 수도 있군. 뮤-지하가 이곳에 굉장히 많은 투자를 한 모양이야.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였을지 상상도 안 되는군.”
도현은 와이번의 등에 앉아서 느긋하게 차원에 적용된 기록들을 살펴나갔다.
그러자 뮤-지하가 이룩한 업적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뮤-지하는 자신의 차원을 용종들에게 특화된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해 왔던 것이다.
“이러면 코무니가 이곳의 기록에 흠을 낸 것에 화를 낼 만 한데?”
도현은 문득 코무니가 이곳 차원의 근원에 기록 추출과 이식 실험을 하다가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 후, 코무니가 다른 차원에서 같은 기록을 가지고 와서 덮어씌웠다고 했지만.
“어떤 기록인지 몰라도, 기록을 추출하고 다시 이식하는 도중에도 문제가 있었을 거고, 거기서 실패해서 시간이 지나는 동안에 본 피해는 진짜 장난이 아니었겠는데?”
도현이 보기에 이곳 차원에서 뮤-지하가 이룩한 업적은 굉장한 것이었다.
하지만 뮤-지하가 손을 댄 부분이 많은만큼 위태로운 부분도 많아 보였다.
“정말 대단해. 이렇게 정교하게 기록을 짜맞춰 놓다니.”
- 그렇게 대단합니까?
“그래. 그야말로 장인의 솜씨라고 해야 할까? 한 땀, 한 땀, 오류를 수정해 가면서 쌓아놓은 예술작품 같아. 그런데······.”
- 왜 그러십니까?
“역시 뮤-지하가 화를 낼만 했네.”
- 네?
“기록에 어긋난 부분이 많아. 간신히 땜질을 해 뒀지만 곳곳에 기워 놓은 흔적이 보여.”
- 그게 코무니의 탓이란 말입니까?
“그렇겠지. 그래서 그렇게 화가 났던 거고.”
- 그럼······.
“하지만 그건 뮤-지하와 코무니 사이의 문제지. 그 화풀이를 나한테 한 건 실수한 거지.”
- 그야 당연합니다.
“어차피 내가 힘이 없었으면 당했을 거야. 그러니 뮤-지하도 최선을 다해서 내 공격을 막으면 되는 거고.”
도현은 그렇게 말을 하고는 와이번을 움직여 차원의 근원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 * *
“너, 어떻게? 아, 그래. 방법이야 찾으면 많겠지.”
뮤-지하는 다급하게 자신의 레어 앞으로 뛰어 나왔다.
그리고 레어 앞에 떠 있는 도현을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내가 왜 왔는지는 알겠지?”
“누구지? 누가? 설마 조페라쿰인가? 아니면 티라헤티피?”
“알고 싶으면 능력껏 알아봐. 내가 답을 해 줄 문제는 아닌 거 같으니.”
“담이 크구나. 아무리 아크 마스터라고 하더라도 내 영역으로 들어왔다니. 게다가 숨지도 않고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
뮤-지하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일 뿐, 이 순간에도 그가 움직인 근원 에너지가 도현을 포위하며 소멸의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도현이 일곱 성 차원에서 근원 에너지를 끌어내어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았다면 벌써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제법 견디는구나.”
“이 정도는 버틸만 하네.”
“그래봐야 오래 가지는 못할 것이다.”
“못 견딜 정도가 되면 후퇴하면 그만이지.”
“올 때는 쉽게 왔겠지만 갈 때는 그렇지 않을 거다. 너는 떠나지 못해!”
“그거야 두고 보면 알 일이지.”
도현은 티라헤티피가 준 최고급 탐사일지만 믿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도리어 차원의 시스템에게 받은 개인 포탈을 더 믿고 있었다.
뮤-지하가, 학술원의 탐사일지로 열리는 차원 회랑은 막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도현이 스킬로 여는 포탈을 막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두 번, 세 번이 되면 어떨지 몰라도, 전혀 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처음으로 여는 포탈을 막지는 못할 것이란 믿음이 없었다면 이렇게 뮤-지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뭘 어쩌려느냐? 네가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지? 설마 네 알량한 소환체들을 불러낼 생각이냐?”
도현이 태연한 반응을 보이자 뮤-지하는 살짝 경계하는 표정으로 도현을 보며 물었다.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 하지만 그보다 훨씬 확실한 방법이 있는데 굳이 그런 수고를 할 이유가 없지.”
“뭐라고? 확실한 방법이라고?”
“그래, 바로 이런 거지.”
도현은 그렇게 대답하며 품속에서 수정 기둥 하나를 꺼냈다.
“그, 그게 뭐? 자, 잠깐! 그건?!?”
뮤-지하는 도현이 꺼낸 한 뼘 길이의 황금색 수정 기둥을 보며 궁금해 하다가 곧바로 그 정체를 알아차렸다.
“어디 한 번 막아 봐!”
도현은 뮤-지하의 경악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곳바로 황금 수정 기둥에 근원 에너지를 주입했다.
그러나 수정 기둥이 황금의 빛가루가 되어 흩날리며 뮤-지하를 향해 날아갔다.
정확하게는 뮤-지하의 뒤쪽에 있는 거대한 바위를 향해 날아가는 것이었다.
그 바위는 지름이 백여 미터에 이르는 크기로 뮤-지하의 레어 위에 있었는데 마치 알(卵)을 확대해 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바로 이 톨루사 차원의 근원이 그 바위 안에 있었다.
“아, 안된다!”
뮤-지하는 흩날리는 황금색 가루들을 막기 위해 근원 에너지를 움직였다.
하지만 그 황금색 가루에는 이미 도현의 근원 에너지가 가득한 상태라 쉽게 제어할 수가 없었다.
“이,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이냐!”
뮤-지하는 황금색 수정 가루를 힘겹게 막아내며 도현에게 분노를 터트렸다.
“나는 너와 코무니 사이의 일에 대해선 알지 못했다.”
“그건 변명이 되지 않는다!”
“상관없다. 어차피 나는 몰랐고, 그래서 코무니와 거래를 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거래도 너와는 상관이 없는 내용이었지.”
“상관이 없다니, 코무니 놈에게 도움을 준 것을 부정한다는 말이냐?!”
“거래라고 했잖아. 너와는 상관없는 나와 코무니 사이의 거래. 그런데 네가 거기에 끼어든 거지.”
“웃기지 마라, 먼저 끼어든 것은 너······.”
“뭐, 솔직히 그런 것이 무슨 상관이겠어? 중요한 건 너와 내가 싸우게 되었다는 거겠지.”
“그, 그건······.”
“그래서 나는 최선을 다해서 대항을 하는 거야. 지금 이렇게 말이야.”
“아, 아니······.”
“지금 와서 후회해 봐야 늦었어. 네가 벌인 일은 네가 감당해야지.”
“이 노옴!”
뮤-지하는 당황한 듯 허둥거리다가 결국 분노를 터트리며 고함을 질렀다.
“소리를 질러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나? 그렇다면 마음대로 해.”
“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내가 너의 고향이나 네 소유의 차원을 그대로 둘 것 같으냐?”
“어차피 이곳 차원이 박살나면 너는 하찮은 놈이 될 뿐이야. 이 톨루사 차원을 잃은 네가 나에게 어떻게 저항할 거지?”
“이, 이 놈!”
“자기 자리에서 각자 최선을 다해 보자고. 나도 그러고 있는 거니까.”
도현은 그렇게 말하며 품속에서 또 다른 황금 수정 기둥을 꺼냈다.
그 모습에 뮤-지하의 표정이 핼쑥해졌다.
“최선을 다해야 할 거야.”
그런 뮤-지하를 보며 도현은 손 위에 다시 몇 개의 황금 수정 기둥을 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