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하란다고 하면 너무 없어 보이잖아
126. 하란다고 하면 너무 없어 보이잖아
“용병왕께서 보내셨습니다.”
“다시 뵙는군요. 설마 아크 마스터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학술원의 원장님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사냥꾼 길드의 헌터입니다. 찬탈자께서 보내셨습니다. 용건은 역시 같습니다. 찬탈자께서도 아크 마스터와의 만남을 바라십니다.”
옴파로에서 임시 차원 회랑을 열고 알케이네스로 넘어온 이들은 거의 동시에 도현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각자 자신들이 누구의 명으로 이곳에 왔는지를 밝혔다.
“용병왕, 학술원장, 찬탈자?”
“저희 의장님도 잊지 말아 주십시오.”
도현이 세 사람의 인사를 받고 반응을 보이자 엑슬리드가 슬쩍 존재감을 드러냈다.
도현은 엑슬리드를 포함한 네 명의 전령을 한 눈에 담았다.
“내가 좀 이상해서 그러는데, 네 명의 초대를 받았는데, 이 중에 하나를 수락하면 다른 셋은 못 가는 건가? 왜들 이렇게 서로 경쟁을 하는 거지?”
도현의 물음에 네 전령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면 초대에 다른 이들을 배척하는 내용은 없는 듯 했다.
“엑슬리드, 내가 용병왕이나 학술원장, 찬탈자를 만난 다음에 의장을 만나겠다고 하면 문제가 되나? 그리고 다른 전령들은 어떻지?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가 되면 문제가 생기나?”
도현이 엑슬리드에게 먼저 질문을 던진 후, 다른 세 전령과 한 번씩 눈을 맞추며 그렇게 물었다.
“아닙니다. 의장님께서는 그저 아크 마스터께 초대의 뜻을 전하고 가부를 듣고 오라고 하셨을 따름입니다. 다만, 이곳 차원의 완전 소멸까지는 가지 않기를 바란다 하셨습니다.”
“용병왕께서도 같은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아크 마스터께서 이곳 알케이네스 차원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은 중지하는 것이 좋겠다 하셨습니다.”
“원장님 역시 같은 뜻을 전하셨습니다.”
“찬탈자께선 우선 이야기를 나눠보고 이후에 진행되도 될 일이라 하셨습니다.”
도현은 네 전령의 말에 턱을 쓰다듬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네 명의 전령.
그들이 가지고 온 내용은 동일했다.
알케이네스 차원을 완전히 소멸시키기 전에 일단 서로 만나보자는 것.
- 로드, 어쩐지 로드와의 만남 보다는 차원의 소멸에 더 무게가 실린 것 같습니다.
에포르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 놓았다.
하지만 도현은 내심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차원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건 맞는데, 문제는 다들 나를 만나려고 한다는 거야.’
- 거기에 뭔가 이유가 있다는 말씀이군요?
‘짐작일 뿐이지만, 차원을 소멸시키기 전에 나를 불러서 내가 차원을 소멸시키는 것을 말리겠다는 거겠지.’
- 말린다는 게 신사적인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니겠군요.
‘그렇지. 넷이 동시에 발등에 불 떨어진 것처럼 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겠지. 그리고······.’
- 직접 오지 못하고 전령을 보낸 이유도 있겠군요?
‘맞아. 그런데 에포르 네 생각에 전령으로 온 이 네 명, 어떤 거 같아?’
- 전령이자 집행자라고 생각됩니다.
‘그렇지? 내가 이 넷 중에 누구를 따라가도 다른 셋은 가만히 있을 거야. 차례로 초대에 응하겠다는 약속만 한다면 기다린다고 하겠지.’
- 하지만 로드께서 나중에 간다고 하면 반응이 달라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 때는 전령이 아니라 집행자 노릇을 하겠지. 나를 억지고 끌고갈.’
- 그럼 저들도 준비한 것이 있겠군요? 로드가 사용하는 근원 에너지의 힘에 저항할 수단이 말입니다.
‘이제부터 그걸 알아보자고.’
도현은 턱을 쓰다듬으며 에포르와 그렇게 의논을 하고 고개를 들어 네 전령을 바라보았다.
“초대에 응하기로 하지. 제일 먼저 온 전령이 엑슬리드니까 차원 의회의 의장을 먼저 만나 보도록 할까?”
“감사합니다.”
도현의 말에 엑슬리드가 고개를 숙였다.
“그럼 자연스럽게 내 앞에 도착한 순서대로 초대에 응하는 방식이 될 텐데, 모두 순서는 알겠지?”
“네, 아크 마스터.”
“세 번째인가요? 원장님께 그렇게 말씀드리지요.”
“아쉽게 마지막이 되었지만, 순서가 중요한 것은 아니겠지요.”
도현의 말에 용병왕, 학술원장, 찬탈자의 전령들이 순서대로 반응을 보였다.
“자, 엑슬리드, 그럼 초대장을 줘 봐. 설마 그냥 오지는 않았겠지?”
이후 도현이 엑슬리드에게 손을 내밀어 초대장을 요구했다.
그러자 엑슬리드가 재빨리 허공에 손을 넣어 사각의 금속 패를 꺼내 도현에게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어떻게 쓰는 거야? 기운을 집중하면 되나?”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평범한 힘으론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뭔지 알겠네. 그럼 남은 셋도 초대장을 주지?”
“여기!”
“여기 있습니다.”
“여기 있습니다.”
도현의 말에 남은 세 전령들 역시 뭔가를 꺼내 도현에게 건넸다.
황금으로 된 둥근패는 용병왕의 것이고, 양피지로 된 스크롤은 학술원장, 짐승의 뿔은 찬탈자의 초대장이었다.
“좋아. 그럼 가 봐.”
도현이 그 네 가지의 초대장을 허공에 던져 에포르에게 맡기고 전령들을 향해 손짓을 했다.
“알겠습니다. 아크 마스터. 그런데 언제 오실지 말씀을 해 주시면 의장님께 말씀을 전해 올리기가 쉽겠습니다만.”
엑슬리드가 인사를 하면서 뒤에 사족을 붙였다.
다른 세 전령도 도현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생각을 좀 정리하고 천천히 가지 뭐. 서둘 이유가 없으니까.”
도현은 그렇게 대답하며 다시 한 번 손을 내저었다.
이만 가보라는 의미가 명백한 행동이었다.
엑슬리드는 도현의 대답이 충분하지 못했다는 듯이 망설이는 표정을 드러냈다.
그 때였다.
찬탈자의 전령이 불쑥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아크 마스터. 혹시나 해서 여쭙는 것입니다만, 이 알케이네스 차원의 소멸을 계속 진행하실 생각이십니까?”
도현은 그렇게 묻는 전령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건 아직 모르겠군. 원래 계획이 그런 것이었으니 그렇게 할까, 아니면 나를 초대한 이들이 모두 그걸 미루라고 하니 그에 따를까 결정을 못했거든.”
“그···렇습니까? 그러면······.”
“이상하네? 이곳을 소멸킬 것인지, 아닌지는 내가 결정할 문젠데, 마치 나를 초대한 이들의 뜻을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느낌이네? 설마 그런 거야?”
뭔가 곤란한 표정을 짓는 찬탈자의 전령을 향해 도현이 확인하듯 물었다.
“······.”
이에 찬탈자의 전령은 대답없이 도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뜻은 차마 말로는 못해도 도현의 말이 맞다는 의미임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권유가 아니라 강요였어?”
도현이 그 뜻을 짐작하고는 네 전령 모두를 훑어보며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차원의 소멸은 의장님을 만난 후에 결정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엑슬리드, 그럴 때에는 ‘좋겠습니다’가 아니라 ‘그렇게 해’라고 하는 거야. 어차피 강요할 거라면 말을 확실하게 해야지.”
“강요하지 않아도 그렇게 아시지 않습니까.”
“모두 같은 명령을 받고 온 모양이네? 내가 알케이네스 차원을 소멸시키기 전에 나를 끌고 오라는 명령?”
도현이 다시 네 명의 전령과 한 번씩 눈빛을 교환하며 물었다.
“의장님께서는 저에게 아크 마스터를 강제할 수단을 주셨습니다. 아마 다른 세 전령도 비슷할 겁니다.”
엑슬리드가 도현을 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너 혼자서도 나를 감당할 수 있는데 너 말고도 셋이나 더 있으니 저항할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거네?”
“직설적인 것을 좋아하시는 것 같으니, 답변을 드리자면 그렇습니다. 괜한 저항은 포기하십시오. 그냥 초대장을 발동시켜 의장님을 만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 것입니다.”
“그건 대놓고 협박인데?”
도현은 다시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궁금한데?’
- 로드, 제 생각에는 지금 로드께서 하시려는 선택은 매우 위험한 모험인 것 같습니다.
‘그래?’
- 그렇습니다.
‘하지만, 해 볼 가치는 있겠지.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차원의 근원 에너지를 상대할 수 있는지 말이야.’
- 하지만······.
‘그래봐야 저들은 전령일 뿐이야. 의장이니 원장이니 하는 자들의 힘을 빌려 쓰는 정도겠지.’
- 맛보기를 하려면 이쪽을 택해야 하는 것은 맞습니다만.
에포르도 결국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의장을 만나게 되면, 아무 준비없이 의장과 부딪혀야 할 수도 있다.
어차피 부딪혀야 할 일이라면 전령을 통해 간을 보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는 결론인 것이다.
“잠깐 생각을 해 봤는데.”
도현이 고개를 들고 말을 시작하자 네 명의 전령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도현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코뚜레 꿴 소처럼 끌려가는 건 아닌 거 같아.”
“그게 무슨······.”
“지금 용병왕 님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겁니까?”
“좋은 선택이 아닙니다. 학술원의 원장님께서는 아크 마스터 캐슬 님께 호의를 가지고 계십니다.”
“이리 되면 어쩔 수 없지요.”
각각 말은 달랐지만 대응은 비슷했다.
순식간에 도현을 포위한 네 명의 전령들.
그들은 제각각 허공에서 무기를 꺼냈다.
검과 도끼와 지팡이와 활.
엑슬리드는 검을, 용병왕의 전령은 대형 도끼를, 학술원의 탐사자 시험관이었던 이는 지팡이를 찬탈자의 전령은 활을.
“마스터 상급에서 최상급. 그 정도군.”
도현이 파악한 네 전령의 경지는 그러했다.
다행히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이는 없었다.
그 정도라면 호위기사들을 소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수준이다.
화화화화화홧!
심상 세계의 군왕성에서 도현의 호위 기사단이 소환되었다.
그들은 도현의 곁에 기사단장이 내려서고, 네 명의 기사가 전령과 도현 사이에 나타나 중간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네 전령들 바깥쪽으로 이십여 명의 호위 기사가 나타나 검을 뽑아 들었다.
“으음. 역시 듣던대로 굉장한 소환체를 가지고 있군요.”
“말도 안 되는 전력이로군. 소환체 하나가 나와 비등한 수준이라니.”
“육체파가 아닌 저는 다른 분들보다 훨신 불리한 상황인 거 같은데요?”
“내 화살은 아크 마스터에게 닿을 수 없겠어요.”
네 전령은 호위 기사들이 나타나자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도현은 그들의 눈빛이 꺾이지 않았음을 놓치지 않았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호위 기사들이 네 전령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떤 경고나 예비 동작도 없이 이루어진 공격이었다.
카가가강! 콰광! 카드드득!
“허억!”
“아!”
“하아아아!”
“흥!”
한 순간에 이루어진 공격에 네 전령은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네 전령은 호위기사들의 공격에 피해를 입지 않고 무사했다.
“으음, 근원을 이용한 것이군. 근원의 기록을 구현한 것이야.”
네 전령을 보호하는 것들은 색이나 모양이나 발현 방식이 모두 달랐다.
흰 색의 보호막, 아지랑이 같은 베일, 투명한 반구형의 실드, 여섯 개의 소형 방패.
군왕성 호위 기사들의 공격을 막고 있는 것들의 정체는 그랬다.
몇 번의 공격에도 전령을 보호하는 그것들은 전혀 충격을 받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도현도 호위 기사들에게 공격을 멈추고 검을 겨누기만 하도록 했다.
“포기하십시오. 아크 마스터.”
“당신의 공격은 우리에게 피해를 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크 마스터를 공격하고 싶지 않습니다.”
“찬탈자님의 초대에는 불손한 뜻이 없습니다. 그러니······.”
호위 기사들의 공격이 허무하게 막히자 전령들의 기세가 올랐다.
하지만 도현은 그런 전령들의 말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던 중.
번쩍! 서걱!
“허억!”
도현의 곁에 있던 호위 기사단장이 선 자리에서 검을 휘둘렀고, 그 검은 엑슬리드를 보호하는 하얀색 방어막을 가볍게 뚫고 들어갔다.
엑슬리드는 기사단장의 검 끝이 갑옷의 가슴 부분을 갈라놓고 지나가자 당황해서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아니.”
“어떻게 된겁니까?”
“설마, 벌써 그 힘을 쓸 수 있다는 말입니까?”
다른 전령들도 믿었던 방어막이 뚫리는 모습에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자, 이러면 한 번 붙어볼만 한가?”
도현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올랐고, 호위 기사들의 검이 살짝 높은 곳을 겨누며 기세를 뿜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