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알케에네스 제국의 멸망과 옴파로에서 온 초대
125. 알케에네스 제국의 멸망과 옴파로에서 온 초대
“차원 전체를 이루는 질서, 혹은 규칙, 혹은 짜임새. 내가 차원의 근원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다.”
“질서, 규칙, 짜임새? 차원의 근원이라고?”
“나도 아직은 극히 일부만 이해를 하고 있을 뿐이라, 더 자세히 말해주긴 어렵군. 대신에 이런 것은 보여줄 수 있지.”
도현이 손을 들어 황제가 불러낸 영혼 소환체 중에 하나를 가리켰다.
그러자 그 영혼 소환제가 다시 영혼으로 돌아가더니 허공으로 흩어져 버렸다.
“뭐? 뭐냐? 어찌 한 것이냐?”
황제는 깜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는 영혼을 감지하는 데에는 최고의 감각을 지닌 이였다.
그런데 방금 도현이 사라지게 한 영혼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소멸은 아니야. 영혼은 소멸되지 않아.”
황제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맞아. 영혼은 소멸시킬 수 없지. 적어도 내가 가진 힘으로는 불가능해. 조금 전의 그 영혼은 그저 돌아갔어야 할 곳으로 갔을 뿐이야. 죽음 이후에 속하게 되는 영역이지.”
“여, 영혼이 그리 사라지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한데, 어떻게?”
“네가 그 시간이 지나도록 영혼을 잡아두고 있지 않았나?”
“그런가? 짐이 영혼을 붙잡아 뒀던 시간이 있었기에 그리 빠르게 사후 영역으로 가 버린 것인가?”
“어쨌건, 이것들도 이제 돌려보내는 걸로 하자고.”
도현은 그렇게 말하며 얼마 전, 황제가 했던 것처럼 양 팔을 벌렸다.
그러자 도현을 중심으로 동심원의 파동이 일어나 멀리멀리 퍼져 나가며 영혼 소환체들을 영혼으로 되돌렸다.
그리고 그렇게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영혼들은 그대로 모습을 감추었다.
황제가 말한 사후 세계의 영역으로 들어가버린 것이다.
“아, 아니. 어찌 이리 허무하게······.”
황제는 자신이 소환한 영혼 소환체들이 한 순간에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기세가 꺾였다.
그는 자신의 영혼 소환체로 도현의 군대를 상대하는 것을 상상하며 기뻐했었는데,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무산된 것이다.
“그것이, 그것이 짐이 그토록 얻고자 했던 힘의 편린이라고? 차원 전체를 아우르는 질서와 법칙?”
황제는 도현이 자신의 영혼 소환체에 사용한 힘을 떠올리려 애쓰며 물었다.
하지만.
“나도 몰라.”
“뭐라?!”
도현의 대답은 그가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성의가 없었고, 황제는 억눌렀던 분노가 치솟았다.
“고작 맛만 본 거라서 말이지. 그리고 같은 것을 보더라도 사람마다 깨닫는 것은 다르지 않겠어?”
“그, 그만큼 깊이가 있는 깨달음이란 말이더냐?”
“설명을 해 주고 싶어도 모르는 걸 어떻게 하겠어? 그리고 설사 아는 것이 있다고 해도 이쯤 어울려 줬으면 충분하지 않나?”
“추, 충분하다니······.”
“어차피 그 끔찍한 삶을 계속 이어갈 수도 없을 텐데 뭘 그리.”
도현은 그렇게 말을 하며 황제에게 차원의 근원 에너지를 사용했다.
“으허허허억! 이, 이게 무슨······.”
그러자 황제의 몸에서 엄청난 숫자의 영혼들이 다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황제는 그런 현상에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아아아, 영혼, 내 영혼이 정화되고 있다니! 이런 것이 가능하다니!”
지금껏 황제가 흡수하여 영혼력을 갈취하고, 그 과정에서 황제의 영혼에 들러붙었던 영혼들.
지금 그것이 황제의 영혼에서 떨어져 사후 세계로 사라지는 중이었다.
“오오오. 이리 홀가분하다니. 이리 가볍다니.”
황제는 연신 감탄을 터트렸다.
그것은 실제 육신의 무게가 아니라 영혼이 느끼는 무게였다.
혹처럼 들러붙어 있던 영혼들이 떨어져 나가며,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며 느끼는 홀가분함은 무슨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웠다.
그저 연이어 감탄만 터트릴 뿐.
하지만 그런 감탄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두려움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으어어, 머, 멈춰. 이만하면 충분······.”
황제는 두꺼운 솜옷처럼 자신을 감싸고 있던 영혼들이 빠르게 사라지면서 자신의 영혼이 드러나기 시작하자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움직임을 방해하는 무거운 갑옷을 벗는 것처럼 홀가분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실오라기 하나 없이 벌거벗겨지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일이 거기서 멈추지 않을 것임도.
“이, 이러면 안 된다! 짐에게 이럴 수는 없음이다!”
황제가 도현을 보며 호소하듯 말했다.
이전보다는 정신이 많이 돌아온 듯, 눈빛이 맑았다.
하지만 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받아들여!”
“무어라?!”
“영혼을 다루었으니 죽음이 끝이 아님을 알잖아? 사후 영역에서 영혼이 어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죽음이 끝은 아니니 뭔가 더 있겠지. 먼저 가서 자리를 잡아 보라고.”
도현은 황제의 영혼과, 그 영혼에 붙은 다른 영혼들의 분리를 더욱 가속시켰다.
그 방법은 단순했다.
이 알케이네스 차원에 적용된 시스템을 황제에게 강요하는 것.
황제가 자신의 깨달음과 영혼력으로 거부하고 있던 차원 시스템의 힘.
그것을 황제에게 적용시키는 것으로 지금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차원의 근원에는 차원의 원형에 가까운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차원의 근원을 이용하면 그 기록을 실현하는 것이 가능하지.’
원형의 모습은 자연 그대로에 가깝다.
그것에 문명을 건설하고, 마력과 오러, 신비 따위를 일깨워 이용하는 것은 원형의 모습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문명이 발달한 차원일수록 원형에서 멀어진 상태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차원의 근원에서 그와 같은 기록을 읽을 수 있다면, 근원 에너지를 이용해서 그것을 실현시킬 수도 있다.
마치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처럼, 있던 것을 지우고 기록된 상태도 되돌리는 것이다.
그것이 도현이 지금까지 파악한 차원의 근원에 대한 내용이었다.
“세상의 현상을 기록된 상태로 변화시키는 것. 원하는 기록을 찾아서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 차원의 근원을 사용하는 방법이지.”
“그게······.”
“네가 지금껏 살아 있는 그 자체부터 원형의 질서에 맞지 않는 것. 그래서 너에게 적용되었어야 할 기록을 씌우는 것이다.”
“아, 안 돼! 그럴 수는······.”
도현의 말에 황제는 다급하게 영혼력을 끌어 올리려 했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황제가 가진 영혼력이 대부분 사라진 상태.
“네가 이룩한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이다.”
도현은 황제에게 선언하듯 말했고, 그 순간 황제의 영혼이 그의 몸에서 빠져 나왔다.
“아울러, 미루었던 죽음이 네게 임하리니.”
= 흐어어어어! 흐어어어어어!
황제의 영혼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도현에게 뭐라 의지를 전하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사후 세계의 영역이 황제의 영혼을 빨아들여버렸다.
- 와아, 정말 무섭네요. 차원의 근원이라는 거요.
반지에 들어 있던 에포르가 뭔가 질린 기색으로 도현에게 말을 걸었다.
“차원의 근원은 기록이고, 그 기록을 실현할 수 있는 힘은 정신의 힘이지.”
- 하지만 정신의 힘을 쓰는 그랜드 마스터라고 해도 차원의 근원에 간섭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같은 힘이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에포르는 도현이 사용한 힘과 그랜드 마스터의 힘이 같은 것이라고 인정할 수 없었다.
지금 당장 그랜드 마스터 수십 명이 온다고 해도, 도현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도현이 차원의 근원에서 특정 기록을 읽어내고, 그것을 대상에게 적용시키면?
그랜드 마스터라도 순식간에 어린아이가 될 수 있었다.
그랜드 마스터가 아무리 강력한 정신의 힘을 쓸 수 있다고 해도, 차원 근원의 기록에 저항할 수 없다.
에포르는 그런 면만 보더라도 자신의 로드가 그랜드 마스터 보다 훨씬 높은 경지에 있다고 믿었다.
* * *
“안녕하십니까?”
“음? 누군가 했더니 의회 수호자 엑슬리드였군?”
“그렇습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과는 태도가 달라졌는데? 이유가 뭐지? 내가 학술원에 속한 탐사자이기 때문인가?”
“아닙니다. 저희 의회 수호자는 용병이나 탐사자, 사냥꾼을 귀하게 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에겐 다른 거 같은데? 이유가 뭐지?”
도현은 황제를 처리한 후에도 알케이네스 차원에 계속 머물렀다.
그 사이에 귀족들은 알케이네스와 연결된 식민 차원으로 이주를 추진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움직였지만, 어느 날부터 황제가 보이지 않으니 대놓고 차원 이주를 진행시켰다.
도현은 황제가 죽은 이후에도 알케이네스 차원의 근원 흡수를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차원의 소멸까지 생각하고 시작한 일이었다.
그 식민차원들까지 손을 쓸 생각은 없었지만, 본차원은 멸망에 가깝게 만들어 놓을 생각이었다.
도망가는 귀족들이 못마땅하기는 하지만, 그들은 모두 새로 가주가 된 이들.
이전의 지구 침략이나 식민지 건설과는 관계가 없는 이들이었다.
그래서 다시 엮이는 일이 없다면 관심을 두지 않기로 하고, 차원 이주도 모른 척 했다.
그런데 그렇게 알케이네스 차원의 근원을 흡수하던 중에 옴파로의 차원 의회에서 수호자 엑슬리드가 넘어온 것이다.
“캐슬 님께서 아크 마스터이시기 때문입니다.”
“아크 마스터? 그게 뭐지?”
도현은 지금껏 들어본 것이 없는 아크 마스터란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혹시 그랜드 마스터의 위에 있는 경지인가?”
자신이 그랜드 마스터 보다는 강할 거라는 자신이 있으니 물어보는 질문이었다.
“제가 들은 바로 아크 마스터는 경지가 아닙니다.”
“경지가 아니다? 그럼 뭐지?”
“일종의 신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신분?”
그 순간 도현의 머릿속에 자신의 클래스인 일곱 성의 주인이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하지만 아크 마스터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내릴 수 없었다.
그래서 엑슬리드를 바라보며 눈빛으로 답을 요구했다.
“저도 자세히 알지는 못합니다. 저는 캐슬 님과 작은 인연이 있기 때문에 전령으로 뽑혀 이곳에 왔을 뿐입니다.”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전령으로 왔다고?”
“저에게 부여된 임무는 아크 마스터이신 캐슬 님께 말을 전하는 것뿐입니다.”
“말을 전하기 위해서 왔다?”
“낯선 이라면 캐슬 님과 대화도 나누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포악한 사람이 아닌데?”
“그래도 캐슬 님과 만난 적이 있는 저를 보낸 것은 조금이라도 가능성을 높이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나를 그렇게 위험하게 생각하다니 기분이 좋지 않군.”
“죄송합니다.”
“그건 엑슬리드가 죄송할 일이 아니지. 일을 꾸민 놈들은 따로 있을 테니까.”
“······.”
엑슬리드는 도현의 말에 맞장구를 칠 여유는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좋아. 그래서 누가 나에게 무슨 전언을 보냈지?”
도현은 일단 엑슬리드에게 할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로 했다.
엑슬리드는 도현의 말에 긴장된 표정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전언의 발신은 차원의회의 의장실로 되어 있습니다. 내용은 ‘아크 마스터의 각성을 축하하며 조속한 만남을 원한다.’입니다.”
“그래서 내가 아크 마스터라는 거군. 그리고 나를 만나고 싶다는 거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차원의회의 의장실은 뭐지?”
“차원의회의 의장님은 초기에 의회를 설립하신 분이십니다.”
“의회설립자? 그런 사람이 지금까지 의장을 하고 있다고?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는데?”
도현이 아는 차원 의회는 의원 다수가 토론과 투표를 통해서 의사 결정을 하는 단체였다.
그리고 모든 의원은 평등하다고 들었고.
그런데 의장이라는 특별한 존재가 있었다니.
“의장님께서는 의회 설립 초기에만 활동을 하시고, 그 후로는 의회 활동에 관여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지금만 봐도 알잖아. 의장실에서 명령이 내려오니까 이렇게 수호자가 즉각 반응해서 나를 찾아왔는데?”
“상황은 그렇지만 의회 설립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라 했습니다. 의장실은 그저 상징적으로만 존재했다고······.”
“뭐, 그런 걸 깊이 따지고 싶은 생각은 없어. 일단은 초대라는 거잖아. 맞아?”
“그렇습니다.”
“거절해도 되는 거지?”
“네. 네? 아, 그건 그렇습니다.”
엑슬리드는 거절이라는 말에 놀라긴 했지만 도현에게 초대를 강권할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난처한 표정만 지었을 뿐.
“그렇게 놀랄 거 없어. 생각해 보니까 엑슬리드가 먼저 오기는 했지만, 어쩐지 또 다른 사람들도 올 거 같단 말이지.”
“다른 사람들이라니요? 누구를······?”
“의회가 왔으면 용병단, 사냥꾼 길드, 학술원에서도 오지 않을까? 거기에 옴파로에 있는 거대 단체가 그것만 있는 것도 아니지. 차원 상인 길드, 만신전, 만마전도 있으니까. 물론 그 사이에서 이권을 주선하는 로비스트들도 있고.”
도현은 마지막에는 거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럼 다른 초대까지 들어보고 결정을 하시겠다는 말씀이군요?”
엑슬리드는 그래도 초대에 응할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생각에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곧 알케이네스 차원 곳곳에서 열리기 시작하는 차원 회랑의 기운을 느끼고 눈살을 찌푸렸다.
도현의 예상대로 옴파로의 다른 단체에서도 엑슬리드와 같은 전령들을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역시 내 생각대로네?”
도현 역시 그 기운을 느꼈는지 엑슬리드를 보며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