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무너지는 알케이네스 제국과 다시 만난 황제
124. 무너지는 알케이네스 제국과 다시 만난 황제
“황제가 미쳤다.”
알케이네스 제국의 백성들 입에서 이 말이 나온 것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흐른 후였다.
그 사이에 제국에선 원인 모를 집단 사망 사건이 여러 건 발생했다.
제국 곳곳에서 도시 하나가 몰살을 당하는 일이 여러 차례 발생했다.
이에 대해서 처음에는 허물어진 차원벽을 통해 미지의 괴수가 나타난 것이라는 의견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죽음의 도시에 황제가 나타났었다는 이야기가 조금씩 흘러 나왔다.
생존자가 없는 도시.
그러니 범인을 특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황제를 의심하는 소리가 나왔을 때, 대부분의 알케이네스 제국인들은 그것이 불신자들의 헛소리로 치부했다.
그런데 허공을 날아 움직인 황제의 이동 경로가 조금씩 밝혀지기 시작하면서, 여론이 뒤숭숭해졌다.
그리고 결국 죽음의 도시에서 생존자들이 조금씩 남기 시작하면서 범인이 황제란 사실이 밝혀졌다.
황제는 점점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고, 도시에 생존자가 몇 명 남아 있어도 무시하는 실수를 범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황제가 미쳤다.”
는 말이 귀족들의 회의장에서 흘러나왔다.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제국을 종횡으로 누비고 다니는 것인지.”
“광증에 이유를 찾는 것이 도리어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그게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 뭔가를 쫓아서 움직이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요?”
“맞습니다. 뭔지 모르지만 그것을 쫓을 때에는 오로지 한 방향으로만 움직입니다. 목표가 있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이동 경로에 직선 경로가 여럿 있군요. 그리고 그 직선 경로에서 어느 시점부터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정처없이 움직이는 기간이 있고, 그러다가 다시 직선.”
“맞습니다. 그 직선으로 움직일 때가 바로 목표물을 쫓을 때입니다.”
“그럼 이런 부분은 목표물을 놓치고 분풀이를 하는 때라는 말이군요”
“네, 우리가 내린 결론은 그렇습니다.”
“그럼 도대체 황제께선 무엇을 쫓고 계시다는 말입니까?”
“이 직선 방향의 이동선을 연장해서 선 주변에 있는 도시와 마을들 살펴봤습니다. 그 결과.”
“뭐가 나오긴 했습니까?”
“아무래도 불신자들이 말하는 선지자를 쫓는 것 같습니다.”
“불신자들의 선지자를 말입니까?”
불신자들의 선지자는 알케이네스 종족의 모습을 하고 백성들에게 황제의 불완전성과 모자람을 설파하는 도현에게 붙은 명칭이었다.
도현이 설교를 하고 지나간 곳에서는 어김없이 다수의 불신자들이 발생하고, 그들은 전염병처럼 다른 백성들에게 황제에 대한 험담을 전파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결국 선지자라는 이름이 도현에게 붙게 된 것이다.
도현은 알케이네스 종족으로 변할 때마다 매번 다른 모습으로 변신을 했는데, 그것이 선지자를 더욱 신비한 존재로 만들었다.
“그래서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귀족들 중에 하나가 구체적인 내용 없이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많은 귀족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몰렸다.
그는 죽은 세이즐 공작의 뒤를 이어 새로 가주가 된 이였다.
새로운 세이즐 공작은 회의장에 있는 여러 귀족들의 시선을 받으며 살짝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미 준비한 말이 있었다는 듯이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우리 모두가 느끼고 있겠지만, 지금 우리들은 선대 가주들과는 많이 다릅니다.”
“어떤 면을 말하고 싶은 겁니까?”
누군가 세이즐 공작의 말을 받아주었다.
“알잖습니까. 우리는 선대 가주님들과 달리 황제의 지배에서 자유롭습니다.”
“자유?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우리는 황제의 명을 거역하지 못합니다.”
세이즐 공작의 말에 누군가 반발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생각과 행동에 금제가 없지 않습니까. 황제는 우리에게 지배력을 나눠주고 우리를 수족으로 삼았지만, 아직 금제가 될만한 명령을 내리진 않았습니다. 황제가 명령을 내리면 거역하지 못하겠지만, 명령을 받지 않으면 자유롭지 않습니까.”
“그건 그저 한 때에 불과합니다. 언제든 폐하께서 명령을 내리시면 우리는 그 뜻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야 그렇지요. 하지만, 황제는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지 못할 상황이 아닙니까. 그 광증 때문에.”
“세이즐 공작, 폐하께서 광증에 시달리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정신이 아주 나간 것은 아닙니다. 때때로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올 때도 있습니다.”
“그건 나도 압니다.”
“그럼 무얼 말하려는 겁니까?”
“아무리 폐하라 하더라도 차원을 마음대로 넘지는 못하겠지요?”
“그건 또 무슨?”
“이참에 우리들이 서로 논의하여 식민지로 이주를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식민지로의 이주?”
“어디 자세히 말을 해 보십시오.”
“갈 거라면 세이즐 가문만 떠날 수도 있지 않았습니까? 굳이 우리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이 많은 인원이 움직이려면 그만큼 리스크가 클 것인데요?”
귀족들은 세이즐의 말을 의심했다.
이에 세이즐은 상기된 표정으로 귀족들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물론 우리 공작가의 저력으로 하나의 식민 차원을 어찌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하지만 차원을 고립시켜 거기에만 웅크리고 사는 것은 답답하지요.”
“고립이라니, 왜 고립이 된다는 말입니까?”
“그야 황제께서 오지 못하게 해야 하니까 그런 것이지요.”
“아, 황제······. 으음. 하지만 그런 거라면 이곳 제국과 연결된 차원 회랑만 끊으면 그만 아닙니까?”
“그럴까요? 황제가 다른 차원을 통해 제가 있는 식민차원으로 넘어온다면 어찌 하라고요?”
“그건······.”
“그러니 내가 가는 곳을 고립시킬 것이 아니라, 이곳 제국 차원을 고립시키자는 말입니다. 그것 때문에 모든 귀족들이 뜻을 모으자는 것이고요.”
“그러니까 우리들이 각자 떠날 곳을 정하고, 이주 직후에 제국과 연결된 차원 회랑을 모두 끊어 버리자?”
“그렇습니다. 동시에 차원 회랑을 관리하거나 조작할 수 있는 인원을 모두 데리고 가거나.”
“죽여야겠군요. 또한 제국의 모든 지식과 기술 역시.”
“그렇습니다. 제국의 모든 것을 들고 각자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지요.”
“하하하하. 감히 생각도 못한 일입니다. 폐하에게 역심을 품고, 그것을 귀족 회의에서 이리 공개적으로 이야기를 하다니요.”
“그러게 말입니다. 하지만 나는 세이즐 공작의 말이 마음에 듭니다. 다른 분들은 그렇지 않습니까?”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여기 야망이 없는 이가 누가 있습니까.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가문의 주인이 되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가문의 주인이 되고나니 그것이 끝이란 허무함이 있었지요. 하지만 지금.”
“우리를 가로막는 황제라는 족쇄가 헐렁해진 상황.”
“그럽시다. 해 봅시다. 하다가 죽어도 황제의 노예로 사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모두가 성공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이곳에는 어떤 차원 회랑도 남겨선 안 됩니다. 그것만 해 낼 수 있다면 우리는 큰 후환을 가둘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어차피 황제와 선지자의 싸움으로 차원 전체가 혼란스러운 상황입니다. 이럴 때에 우리의 실리를 챙겨 보십시다.”
귀족들의 회의는 급격하게 전환점을 돌아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갔다.
신임 세이즐 공작은 그런 흐름이 만족스러운 듯, 상기된 표정으로 자신이 세울 새로운 나라를 상상했다.
* * *
“드디어 잡았다! 크하하하하하.”
황제는 도현을 앞에 두고 광소를 터트렸다.
그리고 도현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런 황제를 노려보고 있었다.
“잡기는 뭘 잡아? 나는 다시 포탈로 떠나면 그만인데.”
“그럼 가 보아라. 하지만 다시 올 때에도 이 자리겠지.”
“뭐?”
“짐이 모를 줄 알았느냐? 네가 제국으로 넘어오는 좌표가 고정되어 있음을 나는 진즉에 알아차렸다. 네가 매번 그것을 바꾸고 있지만, 이번에는 제국에 오자마자 나와 마주쳤으니, 네가 새로운 좌표를 지정할 시간이 없었을 터. 그러니 네가 사라진다 하더라도 나는 이 자리에서 너를 기다리면 그만이다.”
“미쳤구나. 내가 이곳에 다시 올 거라고 어떻게 확신하지?”
“오지 않아도 상관없다. 나는 목표가 생겼으니 여기서 너를 기다리며 끊임없이 사유하고 또 사유할 것이다. 네가 가진 힘의 정체를 밝히는 것은 물론이고, 네 고향 차원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반드시 찾아 낼 것이다.”
“으음?”
“제국의 힘은 강대하니, 언제고 내 뜻은 이루어질 것이다. 나는 불사이니 시간이 무한하니라.”
황제는 도현의 약점을 제대로 잡았다는 듯이 흥겨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도현은 황제의 말에 별다른 감흥을 받지 않았다.
“하하하. 멍청하구나. 내가 이곳 차원으로 올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뿐이라고 누가 그러더냐? 네 제국에는 다른 차원과 연결된 차원 회랑이 백여 개는 될 텐데? 그 중에 하나를 이용해서 넘어와도 그만이지. 그게 아니면 이미 차원 좌표가 알려진 상황에서 옴파로를 통하면 임시 회랑 정도는 어렵지 않게 열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으응?”
도현의 비웃음에 황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광증으로 생각이 짧아져 그런 것은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제는 굳이 그래야 할 이유도 없지. 내가 너를 피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런데 그런 황제를 보며 도현이 의미심장한 말을 하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보였다.
“도망가지 않겠다는 거냐? 이제 는 더 이상?”
황제가 도현을 향해 물었다.
그 질문에는 황제의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
잡으려 해도 잡지 못했던 목표가 이제는 도망치지 않겠다고 하니 얼마나 좋은가.
사고 능력이 많이 감소한 황제는 그것만으로도 즐거운 모양이었다.
“나는 너를 겁내지 않는다. 너는 이미 한계에 이르렀다. 너무 많은 영혼을 짧은 기간에 흡수한 것도 문제고, 제국의 백성들이 너를 더 이상 신격화 하지 않는 것도 문제지.”
“한계? 아니다. 너는 잘못 생각했다. 과거의 내가 겁이 많아서 경지를 넘지 못했던 것일 뿐. 지금의 나는 과거보다 몇 배는 더 강해졌다. 당연히 할 수 있는 일도 많아졌고.”
황제는 그렇게 말을 하더니 허공을 향해 손짓을 했다.
그러자 그의 손끝에서 히끗한 영혼들이 수도 없이 쏟아져 나와 주변을 에워쌌다.
“뭐지?”
“네가 소환체를 쓰는 것을 보고, 나도 비슷한 것을 만들었다. 내 수족들이지.”
도현의 물음에 황제는 그렇게 대답했고, 이어서 황제의 몸에서 나온 영혼들이 서서히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으음? 네크로맨시 비슷한 건가?”
도현은 황제의 수작을 보며 사령술을 떠올렸다.
죽은 영혼을 흡수해서 가지고 있다가, 필요할 때에 꺼내어 구체화시켜서 부린다는 것.
가장 가깝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이 네크로맨서의 사령술이었다.
“어때? 이 정도면 충분히 상대가 될 만하지 않나?”
황제는 자신이 이룬 성과를 자랑이라도 하듯 팔을 벌리고 영혼 소환체들을 도현에게 선보였다.
“이미 네 지배력으로 내 소환체들을 무력하게 했었는데 굳이 이런 것들을 만들 이유가 있었나?”
도현은 황제의 영혼 소환체를 눈에 담았다.
그것들은 이목구비가 선명하지 않았다.
뭔가 모호하게 뭉개진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들고 있는 무기들은 그에 비해서 날카롭게 날이 서 있거나, 혹은 마력을 품고 있었다.
무기로서 소환된 정체성이 명확해 보이는 소환체들이었다.
“지배력? 아, 짐의 지배력이 너의 소환체들을? 그런 일이 있었나? 기억이 나지 않는군.”
그런데 황제는 자신의 지배력으로 도현의 소환체들을 멈춰 세웠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 했다.
“모르겠군. 하지만 상관없지. 짐이 그것을 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지 않나? 그렇지 않은가?”
황제가 도현을 보며 물었다.
앞뒤 맥락이 맞지 않는 질문.
도대체 자신에게 좋은 일이 어떻게 도현에게도 좋을 것이라 생각하는지.
도현은 황제의 사고 기능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다시 한 번 깨닫고 고개를 흔들었다.
“이건 뭐, 더 볼 것도 없겠어. 그토록 많은 영혼을 흡수하고도 어찌어찌 버티고 있기에 무슨 변화라도 있는가 했더니, 그냥 말 그대로 무너지는 과정에 있을 뿐이군.”
도현은 황제가 끝에 이르렀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대로 둬도 알아서 자멸하리라.
하지만 그렇게 두기에는 아까운 상대였다.
“황제의 성이 헤이거스라고 했던가? 헤이거스.”
“지금 짐을 부른 것이냐?”
“지금 이것들이 네 마지막 수단이라면, 이제 그만 끝을 보자꾸나.”
“무어라?”
“네가 궁금해 했던 그것. 이곳 차원에 영향을 미친 힘.”
“그, 그것이 무엇이냐?”
흐릿한 정신에도 황제는 도현의 말에 반응했다.
그것, 그 미지의 힘은 그가 기나긴 시간동안 알고자 했던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그것만은 잊지 않고 기억하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