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달라도 너무 달라서 절대 함께 할 수 없다
123. 달라도 너무 달라서 절대 함께 할 수 없다
“이런 불신자! 감히 폐하께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 안 될 것이 무엇입니까? 폐하께서 그리 전능하시다면 제국이 이 모양이 되어선 안 되는 것이지요.”
“뭐라?”
“게다가 지금껏 제국에서 이어져온 실정이 어디 한 둘입니까? 가까이로는 식민지 원정에 실패한 일에서부터 자연 재해와 재앙, 차원벽 붕괴에 귀족들의 몰살까지. 이게 어찌 신과 같은 분의 치세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까? 이는 다 그 황제란 놈이 지금껏 우리를 속여왔다는 의미가 아니고 뭡니까?”
“저, 저, 저! 죽일 놈이 감히 폐하께 노, 놈이라고.”
평범한 알케이네스 종족의 모습을 한 도현의 말에 알케이네스 노인 하나가 뒷목을 잡고 비틀거렸다.
그러자 노인 곁에 모여 있던 이들이 그 노인을 부축하며 도현을 노려봤다.
하지만 광장에 모인 이들의 대체적인 분위기는 도현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쪽이었다.
도리어 자꾸만 도현의 말에 딴지를 걸고 나서는 노인과 그 패거리에게 불만스런 시선을 보내는 이들이 많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황제는 어느 쪽으로 보더라도 전지전능의 신과는 거리가 멉니다. 일단 그 자가 불사자가 아니라면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고, 그가 불사자로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면 양위니 뭐니 하는 쇼를 한 것만으로 불완전성을 드러낸 것이지요. 어찌 매번 실정을 한 황제가 물러나고 새로운 황제가 나온단 말입니까?”
“어허! 이 놈! 그만하지 못할까?”
“노인장, 아무리 그리 소리를 질러봐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진 못하는 법이오. 어찌 그리······. 으음?”
말을 하던 도현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광장에 있던 이들 대부분이 도현을 따라서 시선을 옮겼다.
“뭐가 있나?”
“글씨, 안 보이는데?”
“있으니 쳐다보고 있지 않을까?”
“애끼, 사기꾼 놈이 그저 그럴듯하게 보이려고······.”
“어어어? 사람이다. 사람이 날아오고 있다.”
“마법산가?”
“그러게?”
“그런데 머리의 뿌, 뿔이 하, 하늘색인디? 묘한 광채가 흐 ,흘러.”
“화, 화, 황제!”
“폐하? 저, 정말인감? 정말 폐하야?”
“오오오오, 폐하께서?!”
“와아아아아아아!”
광장의 분위기는 삽시간에 바뀌었다.
군집했던 알케이네스 평민들이 너나없이 바닥에 엎드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런 중에 도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우뚝 서 있었다.
‘저 놈이 곧바로 이쪽으로 오는 것을 보면, 나를 찾아온 거겠지?’
- 분명 그럴 것입니다.
‘그 말은 저 황제 놈이 나를 찾을 방법이 있다는 거고?’
- 네, 로드. 그렇지 않으면 변장을 하고 사람들 사이에 숨은 로드를 저리 곧바로 알아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으음, 몸을 빼는 건?’
- 포탈을 열 수 있다면 언제든 가능하니 지금 당장이라도······.
‘하지만 매번 도망을 간다고 해도, 결국 이쪽에 지정해 둔 포탈의 좌표를 들키게 되면 오가는 것이 번거로워 질 텐데?’
- 하지만 황제와 직접 맞서 싸우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아직 일곱 성 차원의 진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입니다.
에포르는 도현에게 물러설 것을 권했다.
아직 황제의 지배력에 저항할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소환체를 쓸 수 없는 도현이 황제와 싸우려면 직접 맞붙는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전투력을 가늠하지 못한 지금, 도현이 직접 싸우는 것은 위험한 선택이라는 것이 에포르의 생각이었다.
“크하하하. 역시 여기에 있었구나.”
“오오오, 폐하!”
“폐하, 저희의 믿음을 받으시고 축복과 안녕의 세례를······.”
“폐하를 내 눈으로 직접 보다니! 이런 광영이!”
“폐하! 폐하! 폐하!”
“흐으으윽, 폐하, 저 무도한 놈을 징치하어 위엄을 세우소서! 크흐흐흑!”
“불신자! 저 놈은 불신자입니다. 부디, 폐하의 권능으로 정화하여 죄를 누우치게 하소서!”
“폐하! 폐하!”
광장에 엎드린 백성들이 황제를 부르며, 그 모습을 친견한 감격에 흐느꼈다.
그리고 그 중 몇은 도현을 곁눈질하며 불신자라 고발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시끄럽군!”
광장 허공에 떠서 도현을 내려다보던 황제는 백성들의 목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더니 지배력을 뭉클 쏟아냈다.
그리고.
“히이이이익!”
“허어어어어엉!”
“흐으윽!”
“폐에하아아아!”
광장에 모였던 알케이네스 백성들이 갑자기 기묘한 소리를 내며 혈색이 빠지기 시작했다.
한 순간 영혼이 빨려나가 죽음에 이르는 모습은 기괴했다.
겉으로 봐서는 그저 혈색이 사라진 변화 밖에 없었지만, 그 혈색이 곧 생명의 기운이었다.
“크아아아, 좋구나. 아주 좋아. 이는 아무리 좋은 술도 따르지 못할 최고의 맛이로다.”
황제는 광장은 물론이고 도시 전체에 지배력을 펼쳤다.
그리고 그 지배력이 닿는 모든 알케이네스 백성의 영혼을 빨아들이며 쾌감에 젖은 표정으로 감탄했다.
마치 강력한 마약을 흡입한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뭔가 이상하지?’
- 정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도현의 말에 에포르가 맞장구를 쳤다.
“자, 이제 조용해졌군.”
그 때, 황제가 미친 듯이 웃던 표정을 고치며 정색한 얼굴로 도현을 보았다.
그리고 잠시 허공에서 도현을 노려보다가 스르륵 밑으로 내려와 죽은 알케이네스 백성들 사이에 섰다.
“꽤나 먼 곳에 있어서 오는데 번거로웠느니.”
그리고 툭하니 불만을 던져 냈다.
“나는 너를 만날 생각이 없었다만?”
도현은 그런 황제에게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하긴, 목이 마른 것은 나. 우물이 아무리 멀리 있다고 해도 찾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긴 하지.”
도현의 말에 황제는 여전히 툴툴 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황제의 말과 행동에는 적의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가볍게 불만을 토로하는 정도일 뿐.
“목이 마르다? 그래서 나를 찾아왔다고?”
“그러하다.”
“내게 바라는 것이 있다는 소리군?”
도현은 황제의 말 뜻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그리고 황제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후으으으읍, 좋군. 좋아.”
그 때, 황제가 다시 숨을 깊이 들이마시는 동작을 하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또 사람들을 죽인 것인가? 그게 그리 좋은가?”
도현은 황제가 광장에 나타나 사람들을 죽일 때에도 그와 같은 표정을 지었던 것을 떠올리며 물었다.
“흐으읍, 선후가 바뀌었다. 나는 생명을 죽이는 것엔 그다지 흥미가 있지 않다. 내게 고취감을 주는 것은 영혼들이지.”
“영혼?”
“이렇게 영혼을 흡수할 때에 느끼는 고양감, 짜릿함, 황홀감, 쾌감. 그래 그러하다.”
“지금 이 도시의 영혼을 모두 흡수하고 있다는 거냐?”
도현은 깜짝 놀랐다.
황제가 영혼을 흡수하고 그 영혼에서 기운을 뽑아서 지배력으로 만드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도현은 황제가 영혼을 흡수하는 것에 많은 제약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황제가 백성들의 신앙심을 이용해서 그 영혼 흡수의 부작용을 억누르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영혼을 흡수하고 있다니.
‘설마 황제가 흡수한 영혼이 생각보다 많았던 건가? 이런 도시 인구 정도는 별것 아닐 정도로?’
- 설마 그렇기야 하겠습니까. 그건 아닐 것입니다.
‘그럼 역시 저 놈이 전과 달라진 건, 일종의 광증인가? 영혼을 너무 많이 흡수한?’
- 어쩌면 거꾸로 광증이 생겨서 저렇게 영혼을 마구 흡수하게 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뭐가 되었건, 양날의 검이네. 저 놈 영혼을 흡수할수록 강해질 거잖아.’
- 대신에 광증과 영혼의 부조화가 심해지겠지요.
‘될 수 있으면 저 놈에게 한계가 빨리 왔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당연한 바람을 가져보지만 일이 바라는 대로, 형편 좋게 흘러가는 경우가 별로 없음을 도현은 잘 알고 있었다.
“뭐가 문제란 말이냐? 어차피 짐의 백성들이다. 나를 위해 헌신하는 것은 당연한 일, 내게 도움을 주었다면 그것으로 영광된 일이 아니겠느냐. 하하하.”
황제는 백성들의 죽음이 자신을 위한 것이었으니 영광이 아니냐며 환하게 웃었다.
“역겹군.”
도현은 그런 황제의 면적에 숨김없이 혐오감을 드러냈다.
“크하하. 역겹다니. 뭐가 문제란 말이냐. 세상 어느 차원을 가든, 먹고 먹히는 관계가 없는 곳이 있더냐? 들판에서 초목의 어린 새순을 먹는 것과 새끼 양이나 송아지를 먹는 것과 지성종의 어린 아이를 먹는 것이 뭐가 다르지? 그 모두가 학습에 의한 고정관념일 뿐이다. 세상에는 동족 포식을 하는 종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
도현의 반응에 황제는 엄한 눈빛을 하며 도현을 질책했다.
이에 도현은 피식 웃으며 황제를 보았다.
“누가 너에게 회개를 바라더냐? 네가 잘못을 인식하고 변할 것을 바란 적이 없다. 그저 내가 느끼는 혐오를 표현했을 뿐.”
“뭐라?”
“나는 너에게 나의 가치관을 강요할 생각이 없다는 말이다. 그저 지성족을 잡아먹는 너희 알케이네스 놈들을 혐오하고 경멸할 뿐이고, 그에 따라서 너희를 세상에서 소멸시키는 데 별다른 가책을 느끼지 않을 뿐이다.”
“크하하하. 옳다. 옳은 말이다. 네 가치관이나 기준은 너의 것이고, 내 가치관과 기준은 나의 것이지. 그리고 그것이 서로 충돌할 때에는 설득이 가능한가를 먼저 살펴야 하고, 설득이나 이해가 불가능하다 판단되면.”
“내 힘으로 그것을 상대에게 강요하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거슬리는 것을 치워야지.”
도현이 황제의 말을 중간에서 끊으며 뒤를 이었다.
“크하하하. 그래, 그거다. 어차피 모든 것은 자신의 입장에서 판단하는 것이지. 선악이든, 옳고 그름이든. 너와 내가 서로 다를 뿐, 누가 틀렸다고 할 수 있으랴.”
“그래,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너와 내가 아주 다르다는 거고, 나는 나와 다른 너를 용납할 수 없다는 거지. 내 마음은 그렇게 넓지 않거든.”
도현은 그렇게 말을 하고는 포탈을 열었다.
“자, 잠깐 기다려라!”
그러자 황제가 다급하게 도현을 불었다.
“우리 사이를 확인한 마당에 더 할 말이 남았던가? 설득하거나 이해시키는 것이 불가능한 관계임을 확인했는데?”
도현은 그렇게 말하며 포탈로 발을 밀어 넣으려 했다.
“기다리라! 하지 않았더냐!”
콰르르르르르릉! 콰과광!
그 순간 황제가 발을 구르며 기운을 폭주시켰다.
그런데 그 기세에 도현이 열었던 포탈이 흔들렸다.
포탈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분명 노이즈 같은 비틀림이 일어난 것이다.
“크으, 대단하군. 어떻게 만든 건데 내 힘을 버티는 거지?”
그런 포탈의 모습에 황제가 인상을 찌푸렸다.
도현은 그런 황제를 힐끗 쳐다보며 다시 포탈로 들어가려 했다.
그런데 황제가 다시 기운을 터트렸다.
콰르르르릉! 콰과과광!
그 서슬에 도시의 광장이 뒤집어지고 주변의 건물들이 허물어졌다.
“이런.”
거기다가 포탈이 다시 불안전한 모습으로 노이즈를 만들었다.
때문에 도현은 포탈 안으로 들어가려던 걸음을 멈췄다.
“그것을 없애지는 못해도, 사용을 방해할 정도는 되는군. 어떠냐? 이제 나와 대화를 나눠 볼 용의가 있느냐?”
그 모습에 황제는 이전보다 조금은 흥분을 가라앉힌 표정으로 도현을 보며 물었다.
도현이 떠나는 것을 막을 수 있게 되어 다급함이 사라진 덕분이었다.
“나는 너와 할 말이 없다고 했을 텐데?”
도현은 어쩔 수 없이 포탈이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지만 황제와 대치하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 그리 달갑지는 않았다.
“너와 내가 다름, 그리고 네가 나를 용납하지 못함을 이해했다.”
“그런 상대와 무슨 말을 하라는 거지?”
“내가 제국을 포기할 수도 있다.”
“뭐라고?”
“제국은 물론이고 식민차원들까지 모두 네게 주겠다. 그 대신!”
“나에게 바라는 것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면, 그건 하나뿐인데?”
도현이 황제의 말을 중간에서 끊었다.
그리고.
“그건 거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네 제국이나 식민지 따위를 받고 싶은 생각도 없고.”
“뭐라?!”
“적을 이롭게 할 어떤 거래도 할 생각이 없다는 말이다. 너는 그저 조금씩 말라서 죽어가면 그만이다.”
도현은 다시 한 번 황제에게 선전포고를 날리고는 포탈로 걸음을 옮겼다.
“갈 수 있을 것 같으냐!”
황제가 다시 자신의 영혼력을 폭주시켜 포탈을 향해 쏘아냈다.
도현은 황제가 날린 기운을 힐끗 보고는 피식 웃었다.
“같은 수를 몇 번이나 반복하다니, 내가 그렇게 모자라 보였던가?”
투우우우웅!
도현의 말과 함께 포탈을 감싸는 투명한 결계가 나타나 황제의 기운을 막아섰다.
“오래 버틸 필요도 없지. 잠시만 막아주면 그만인데. 또 보자고.”
도현은 그렇게 황제에게 인사를 남기고 포탈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 날부터 며칠 사이에 알케이네스 차원의 크고 작은 도시 몇 개가 죽음의 도시가 되었다.
황제의 폭주가 만든 비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