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폭주하는 황제
122. 폭주하는 황제
“아깝네.”
도현은 포탈을 이용해서 지구로 돌아왔다.
지구의 포탈은 안전한 안가에 열리도록 되어 있어, 그의 귀환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황제의 지배력이 로드의 소환체까지 간섭할 수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 지금까지 그런 일은 없었지. 예상 밖이었어.”
- 로드와 상성이 맞지 않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로드께서 황제에게 밀릴 이유는 없습니다.
“그야 그렇지. 싸움이란 게 항상 정면승부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 황제의 지배력도 정면승부라고 보긴 어렵지 않겠습니까?
“위로의 말이라면 고맙다. 하지만 그럴 필요 없다. 나는 차원의 근원을 훼손시켜서 알케이네스 차원을 멸망으로 끌고 가는 것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 그렇습니까?
“조금만 더 심각하게 흔든다면 황제도 무너질 수밖에 없겠지. 네가 그랬잖아. 황제에겐 신앙심이 무척 중요하다고.”
- 네, 로드.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그래. 그게 맞아.”
- 네? 무슨? 혹시 황제에 대해서 좀 더 알아낸 것이 있으신 겁니까?
도현의 말에 에포르가 깜짝 놀란 듯이 물었다.
도현은 산성병사 하나를 소환해서 에포르가 빙의할 수 있도록 해 주고는 가까운 소파를 찾아 앉았다.
“마지막 순간에 황제 놈의 지배력을 좀 더 들여다 볼 수 있었지.”
- 그랬습니까?
“내가 차원의 근원을 가까이에서 자주 접하다보니 그런 쪽으로 능력이 발달한 모양이야.”
- 축하할 일이군요.
“그래. 차원의 근원을 접하면서 그보다 하위 그룹에 속하는 기운들은 조금 더 예민하게 느끼고 다룰 수 있게 된 거지.”
- 그렇군요.
“그런데 마지막에 황제 놈이 지배력을 좀 강하게 움직이더라고. 그래서 나도 방어막에 힘을 좀 더 줬지. 그러다가 알게 된 거야. 놈의 지배력은 영혼을 녹여 만든 건데, 그 자체로는 무척 불안해.”
- 그렇다면 신앙심은······.
“수많은 영혼을 하나로 녹인 부작용을 중화시켜주는 역할을 하지. 그런데 그 신앙심이 줄어들면?”
- 문제가 크겠군요?
“맞아. 놈은 지배력으로 사용하는 영혼의 힘 외에의 찌꺼기를 떼어내지 못하고 신앙심으로 눌러 놓은 거야. 이번에 제법 많은 양의 지배력을 나에게 빼앗겼지만, 그렇다고 놈이 흡수한 영혼이 줄어든 것은 아니거든.”
- 영혼을 이용해서 만든 지배력은 줄었는데, 그걸 만들고 남은 영혼의 일부는 그래도 남았다는 말씀이군요?
“그래서 신앙심이 줄어들면 놈은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지. 억눌러 놓았던 영혼들이 날뛰기 시작할 테니까.”
그러니 이제 알케이네스 제국의 백성들이 가진 황제에 대한 믿음을 흔들기만 하면 된다.
그건 이전보다는 훨씬 쉬울 것이다.
제국의 운영을 담당하던 귀족들이 모두 죽었으니, 그 빈자리를 금방 채우긴 어려울 터.
귀족이야 금방 만들 수 있겠지만, 그 귀족들이 죽은 귀족들만큼 유능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다.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경험이 필요하고, 경험에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 그럼 다시 알케이네스로 가시겠습니까?
“당연하지. 알케이네스의 황금 포탈을 흡수해 놓은 걸 이럴 때에 써먹지 않으면 언제 쓰겠어?”
도현은 알케이네스에 포탈의 좌표를 설정해 두었다.
이전 포일로 종족의 쟈이코로 변신해서 알케이네스에 갔을 때에도 그랬고, 이번에 바이디야 주코 나탄으로 변신했을 때에도 새로 좌표를 갱신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는 곳이면서 또 교통의 요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포탈의 좌표가 있었다.
- 가족들에게 인사는 하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그럴 수야 있나, 얼굴은 비추고 가야지.”
도현은 곧바로 안가에서 나와서 은밀하게 본가로 이동했다.
그리고 부모님과 여동생을 만나 시간을 보낸 후, 알케이네스 차원으로 포탈을 열었다.
* * *
불신자, 의심하는 자, 답을 구하는 자, 뜻을 묻는 자.
이들은 알케이네스 제국의 종양과 같은 이들이었다.
언제부턴가 대중들 속에서 튀어나와 일장 연설을 하며, 황제의 실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이들.
황제를 믿지 않아서 불신자.
황제의 말을 의심해서 의심하는 자.
진실을 찾기에 답을 구하는 자.
백성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질문을 던지기에 뜻을 묻는 자.
이런 자들이 제국 곳곳에서 창궐했다.
게다가 이들의 수는 제국 곳곳에서 자연 재해와 차원벽 붕괴가 증가하면서 더욱 늘어났다.
제국에 이상현상이 늘어날수록 백성들은 황제의 책임론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모든 것은 황제의 뜻에 의해서 좌우된다고 믿어온 백성들에게, 그들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천재지변과 재앙은 황제가 막아야 할 일이었다.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라면 황제를 탓하지 않겠지만, 감당할 수 없는 문제는 당연히 황제가 해결해 줘야 하는 일이다.
그것이 종교적 신앙의 기본이 아니가.
이전 황제는 그런 부분에서 실패했고, 그래서 새로운 황제가 즉위했다.
그런데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고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 불신과 의심이 부풀어 오를 수밖에.
“으으음.”
“폐하 옥체가 미령하신 부분이라도 있으십니까? 의관을 부르리까?”
황제의 신음소리에 시종장이 헬쓱한 얼굴로 물었다.
하지만 황제는 손을 살짝 들어 시종장의 간섭을 내쳤다.
지금 황제의 문제는 시종장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문제가 된 적이 없으니 굳이 아랫것들에게 이야기할 일도 없었다.
황제는 지금 제국 건국 이래로 가장 위급한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유는 그 동안 흡수했던 영혼들의 부정한 결합.
영혼을 억지로 흡수해서, 그 기운을 뽑아 지배력을 만들었다.
그리고 영혼력이 뽑힌 영혼들은 황제의 내면에 쌓이고 쌓여서 기괴한 모양으로 변질되었다.
그것을 내다 버릴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다.
쥐어짜서 영혼력을 뽑는 과정에서 영혼은 황제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더럽고 추한 것이 황제를 범하려 할 때마다, 백성들의 신앙심이 그것들을 다독였다.
힘으로 누르거나 억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신앙심만이 답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신앙심이 부족해지면서 눌려있던 영혼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놈이 제국을 종횡하고 있다지?”
“송구하옵니다.”
“동서남북 가리지 않고, 매 번 모습을 바꿔가며. 게다가 그 놈이 지난 곳에는 불량종들이 잔뜩 나타나고?”
“······.”
시종장은 차마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지금 제국의 사정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황제가 급히 귀족가의 후계자들을 불러들여 지배력을 나눠주고 귀족의 작위를 주었다.
그렇게 원래 있던 수만큼의 귀족이 새로 임명되었고, 자리도 채웠다.
하지만 그 귀족들은 제국을 제대로 운영할 능력이 부족했다.
물론 시간만 있으면 해결될 문제였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요즈음 귀족가 내에서 작위 찬탈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황제가 임명한 귀족의 자리를 그 형제자매나 백숙부들이 빼앗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제국은 귀족들의 작위 싸움을 제한하지 않는다.
싸워서 자리를 차지한 귀족이 그만큼 더 능력있는 인재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가 이어지면서 귀족가의 자손들은 절대 나태한 삶을 살 수 없었다.
귀족가의 자손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능력을 갈고 닦아야 했다.
그래야 가주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주가 되지 못하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바짝 엎드려야 그나마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그것조차 새로운 가주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경쟁자들은 모두 목이 잘리기 마련이다.
그런 까닭에 이번에 황제가 임명한 귀족들은 가문 내에서 목숨을 건 검증을 받는 중이었다.
아마도 그런 귀족가 내부의 분열과 작위 경쟁은 두어 세대는 지나야 정리가 될 것이다.
이러니 제국의 운영이 제대로 될 턱이 있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차원에 문제가 생겼음이다. 그에 대해서는 어찌 되었느냐?”
“폐하, 모든 자료를 살펴 원인이 될 문제를 찾고 있사옵니다.”
“그런데 아직 답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겠지?”
쿠구구구궁!
황제의 진노가 무형의 기운으로 황궁을 짓눌렀다.
시종장은 더욱 깊이 허리를 숙이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지금 식민 차원에까지 지혜를 구하고 있으니······.”
할 수 있는 말도 이런 불확실한 미래로 황제의 마음을 다독이는 것밖에 없었다.
“짐이 그 동안 고민을 해 보았다.”
그 때, 황제가 홀로 독백하듯 중얼거렸다.
시종장은 슬며시 고개를 들어 황제의 발 끝을 바라보았다.
“그리하여 오래 전에 잊었던 기억을 되살릴 수 있었지. 내가 제국을 세우기 전, 드높은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 애쓸 때의 기억이다.”
“······.”
말이 없는 시종장에게 힐끗 시선을 던진 황제는 다시 창밖으로 눈길을 돌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 즈음, 내가 얻고자 했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한 차원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무한한 힘이었지.”
“그런 것이 있었사옵니까?”
시종장은 슬쩍 맞장구를 쳐 주었다.
황제 홀로 떠들게 두는 것도 불경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오래된 기록에서 짧게 언급되었던 힘이었지만 나는 그것이 존재할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그것을 찾기 위해 오래도록 노력했지. 그리고······.”
말을 줄이는 황제를 향해 시종장은 황제의 발목까지 시선을 들었다.
“짐은 실패했다. 그것을 확인도 하지 못하고 성장이 멈춰버렸던 것이지.”
“······.”
시종장의 시선이 다시 황제의 발끝까지 내려왔다.
몸을 낮추어 황제의 실패에 대한 송구스러움을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그대로 끝날 수는 없기에 지배력을 만들어냈다. 사실 그렇게 시간을 벌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는데 결국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지. 어떤 노력을 해도 차원을 아우르는 그 힘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내 정신은 무너지기 시작했지.”
“폐하? 어찌 그런 망극한 일이······.”
“그래서 기억을 봉인하고 심신의 안정을 찾으면 한 번씩 봉인을 열어 새로운 도전을 이어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심신이 안정되지 않고, 위태로운 가운데 어쩔 수 없이 봉인을 풀었고, 답을 얻었느니.”
“그렇사옵니까? 역시 폐하이십니다.”
“푸하하하하. 그리 말해도 내 초라함을 가릴 수는 없다. 지금 제국 차원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분명, 내가 그토록 찾고자 했던 바로 그 힘이 작용한 것일 테니까.”
“그러하면 지구의 그 불손한 자가······.”
“그것을, 그것을 손에 넣었다는 것이겠지. 그리하여 제국 차원의 핵을 건드려 이런 재앙을 만드는 것일 터!”
“······.”
황제의 말에 시종장은 입을 다물었다.
상황이 그러하다면 황제조차 그 지구인의 행보를 막을 도리가 없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전능에 가까운 황제조차 손에 넣지 못한 힘으로 제국을 뒤집어 놓고 있는 적이라니!
“그렇다면?! 그렇다면, 짐 또한 이리 있을 수는 없겠지.”
“네? 폐하?”
“어찌 잡은 기회란 말인가? 그 힘을 알고 쓸 수 있는 자가 가까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반드시 잡아야 할 터!”
“폐, 폐하?!”
“참으로 오랜 기다림이었도다! 이리 실마리를 잡게 되다니! 이 또한 행운일 터! 크하하하하하.”
우우우우우우웅!
“히이이이익!”
털썩!
황제가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리며 그의 능력을 사용하자, 가장 가까이 있던 시종장의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기이한 비명과 함께 바닥으로 쓰러져 버렸다.
그리고 그와 함께 황제를 지키던 보이지 않는 그림자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며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크하하하하하. 이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이더냐! 필요없다. 그 놈만 잡으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으리라! 크하하하.”
황제는 시종장과 은신 호위들의 죽음에도 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어차피 그들은 황제가 영혼을 빨아들여 죽음에 이르게 만든 것.
애석해 하거나 놀랄 일이 아니었다.
“어디냐? 어디에서 짐의 제국을 좀먹고 있느냐!”
황제는 더욱 능력을 끌어올려 황궁에 있는 사람들의 영혼을 흡수하는 한편, 도현의 종적을 찾기 위해 탐색의 범위를 넓혀갔다.
“너는 몰랐을 것이다. 나에게 한 번 읽힌 영혼은 어디에 있든 찾아낼 수 있음을. 그래, 그 쪽이더냐?!”
얼마 후, 황제는 도현이 있는 방향을 알아내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간다, 짐이 갈 테니 기다리고 있어라. 크하하하하.”
그리고 황제는 광소를 터트리며 황궁을 벗어나 도현이 있는 방향으로 빠르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 시간, 도현은 그런 사실도 모르고, 알케이네스 제국의 평민들을 자신의 지배력으로 오염시키며 황제에 대한 불신과 의혹을 설파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