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모두가 죽었는데 하나가 살았구나
120. 모두가 죽었는데 하나가 살았구나
“허허, 허허허헛!”
“그것 참, 어처구니가 없군.”
“그러게 말입니다. 그랜드 마스터라니! 허허허!”
세 공작은 쓰러지는 후작들을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런 중에 만프레 공작이 허공에서 검을 뽑아내어 호위 기사단장을 향해 휘둘렀다.
그러자 십여 미터 거리를 두고 있던 호위 기사단장도 즉각 반응하며 검을 겨누었다.
카가강! 쿠르르르르릉!
서로 날을 맞대지 않았는데도, 검이 부딪히며 맑은 소리로 울렸다.
그리고 그 충돌의 여파가 대회의장 전체를 두드렸다.
“크윽!”
“허억!”
기운이 부족한 남작급 귀족들이 신음을 토하며 비틀거렸고, 산성병사 일부도 녹쓴 고철 인형처럼 버르적 거렸다.
하지만 대부분의 귀족과 산성병사는 싸움을 여전히 이어갔다.
“나도 돕겠소.”
만프레 공작 앞으로 세이즐 공작이 나섰다.
세이즐 공작은 의외로 따로 무기를 들지 않고 손에 가죽장갑만 끼었을 뿐이었다.
“하앗!”
콰광! 콰과과광! 콰과광! 쾅!쾅!
그럼에도 세이즐 공작의 주먹은 그랜드 마스터에 가깝다는 호위 기사단장의 검에 전혀 밀리지 않고 맞섰다.
“흐읍!”
그런 중에 만프레 공작이 뒤에서 다시 허공에 검을 내리그었다.
콰르르르릉! 콰광!
“어딜 가느냐!”
만프레 공작의 공격을 해소하느라 호위 기사단장이 뒤로 밀려났다.
세이즐 공작의 공격에 대응하던 중에 날아온 만프레 공작의 공격에 작은 틈이 생긴 것이다.
그 틈을 메우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난 것.
하지만 그것은 호위 기사단장이 세이즐 공작과 만프레 공작을 동시에 상대하기는 부족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으음. 그럼 나는 저것들을 정리해 볼까?”
이번에는 콩토올 공작이 나섰다.
그 역시 허공에서 자신의 무기를 꺼냈는데, 그의 무기는 짧은 자루에 둥근 보석이 달려 있는 묘한 모습이었다.
바이디야 주코 나탄의 모습을 하고 상황을 지켜보던 도현은 콩토올 공작의 주특기가 마법이나 주술, 신비 쪽임을 직감했다.
‘저대로 두면 피해가 커질 수도 있겠는데?’
도현은 그런 판단이 서자 곧바로 흑영과 레인저를 동원했다.
“쿠라디오스 마지아레니 트라발로카 하우타링 비티야! 억눌러라!!”
그리 길지 않은 주문을 외운 콩토올 공작이 주문을 발동시키는 명령어를 외쳤다.
우우우웅! 쿠구구궁!
순간 대회의장 전체에 엄청난 중력이 발생했다.
문제는 그 중력이 알케이네스 귀족들은 피해 갔다는 것!
“죽어라!”
“하아앗!”
“쳐라!”
귀족들도 순간적으로 그런 사실을 깨닫고는 적극적으로 호위 기사와 산성병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카카카강! 콰드드득! 콰콰쾅!
그리고 그 순간 산성병사 대장군과 호위기사단장이 동시에 피해를 입고 뒤로 밀렸다.
대장군은 옆구리가 깊게 파였고, 호위기사단의 단장은 왼쪽 팔이 날아갔다.
“기사 역시 생명체가 아니었단 말이냐!”
“도대체 정체가 뭐란 말이냐!”
“저런 종족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소!”
공작들은 호위 기사들은 생명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베어보니 피를 흘리지 않고 갑옷처럼 은색과 금색이 섞인 가루를 피처럼 뿌릴 뿐이었다.
“뭐가 되었든 끝장을 냅시다.”
“그러지요!”
만프레 공작과 세이즐 공작이 빠르게 의견 일치를 보고 기사단장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 때.
피이이잉! 콰직!
“크아악!”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콩토올 공작의 어깨를 꿰뚫었다.
화살의 위력이 워낙 강해서 콩토올 공작의 팔은 무기를 든 상태로 떨어져 저 멀리 날아가버렸다.
콩토올 공작은 당황한 눈빛으로 대회의장 입구를 노려봤다.
그곳에 숲의 성 레인저 중에서 가장 등급이 높은 레인저가 새로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이런! 콩토올 공작!”
“만프레 공작, 지금은 그 쪽을 신경 쓸······.”
짧은 순간이었다.
만프레 공작이 콩토올 공작에게 시선을 돌린 사이, 호위 기사단장의 검이 머리 위에서 발 밑으로 묵직하게 내려왔다.
검이 닿지 않을 거리지만 그 정도 거리는 의미가 없음을 이미 알고 있는 상황.
세이즐 공작은 두 손에 오러를 집중해서 기사단장의 공격을 막아갔다.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던 세이즐 공작.
하지만 그 순간 허공에서 검은 그림자가 나타나더니 세이즐 공작의 정수리를 내리찍었다.
“어엇!?”
앞에서 날아오는 기사단장의 공격과 정수리를 찍어오는 검은 그림자의 단검.
세이즐 공작은 그것을 모두 막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리고 어느 한쪽이라도 막지 못하면 그 순간이 자신의 끝임도 느낄 수 있었다.
세이즐 공작은 질끈 눈을 감으며 손을 내리고 말았다.
하나를 막아봐야 의미가 없음을 깨닫는 순간,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이다.
푸욱! 서걱!
흑영 대장의 단검이 세이즐 공작의 정수리에 박혔고, 호위 기사단장의 오러블레이드가 어깨에서 허리까지 사선으로 가르고 지나갔다.
털썩!
세이즐 공작은 끝까지 눈을 뜨지도 않았고, 입을 열지도 않은 채 쓰러졌다.
“세이즐 공작!”
“크으윽. 공작!”
만프레 공작과 콩토올 공작이 세이즐의 죽음에 비통한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흑영 대장은 다시 허공으로 녹아들어 사라졌고, 호위 기사 단장은 만프레 공작을 향해 달려들었다.
콩토올 공작은 만곡된 레인져 수장의 화살촉이 자신을 겨누고 있음을 느끼는 중이었다.
‘이건······.’
그 때, 도현은 허공을 날아온 콩토올 공작의 팔에서 공작의 무기를 떼어내는 중이었다.
마치 그것을 공작에게 전해 줄 것처럼 서둘러 움직였고, 팔에서 무기를 떼어내자마자 그것을 콩토올 공작에게 내던졌다.
급히 공작에게 무기를 돌려주는 모습.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고, 콩토올 공작도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들려 했다.
텁!
“어엇?!”
피이이잉! 콰직!
“어어어어?!”
하지만 콩토올 공작이 자신의 무기를 되돌려 받는 순간, 그 무기에서 종류를 알 수 없는 기이한 기운이 흘러나와 콩토올 공작을 압박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레인져 수장의 화살이 콩토올의 이마에 틀어박히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아니, 공작각하!”
“콩토올 공작님까지!”
“어찌 이럴수가!”
그 모습을 본 중하위 귀족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벌써 두 명의 공작이 죽었고, 후작들 중에서 여럿이 쓰러져 있었다.
게다가 조금 전부터 섀도우 종족의 암습이 시작되었고, 뚫려 있는 대회의장 벽을 통해서 매서운 화살이 날아들고 있었다.
“모두 망설이지 마라!”
“물러나지 마라!”
“제국의 귀족으로서 머뭇거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절망적인 상황임을 인식한 순간, 귀족들 사이에서 고함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죽음을 각오한 결사의 의지였다.
하지만 산성병사들에게 그런 의지 따위는 영향을 주지 못했다.
결연한 각오를 느끼며 그것에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커헉!”
“크으윽!”
“끄윽!”
곳곳에서 귀족들이 쓰러졌다.
그리고 결국 무대의 중앙에 만프레 공작과 몇 명의 하위 귀족들만 남은 상황.
포위된 상태에서 호위 기사들의 공격이 멈췄다.
“으음?”
만프레 공작은 의아한 눈빛으로 외팔의 호위기사단장을 바라보았다.
외팔이지만 만프레 공작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경지에 있는 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만프레 공작은 직감적으로 지금 이 순간 적이 나타날 것임을 예감했다.
모든 일을 마무리 짓는 이 순간, 암중에 숨어 있던 지구인 종족이 나타나리라.
푸우욱! 서걱! 서걱!
“커억!”
“커어억!”
“헙, 흐으으으.”
털썩, 털썩, 털썩!
“아니, 이게 무슨?”
하지만 마지막 순간이라고 생각한 그 때, 나타난 것은 검은 그림자들이었다.
그 그림자들은 한순간 무대 위의 모든 귀족들을 죽였고, 호위 기사단의 단장은 빠른 찌르기로 만프레 공작의 심장을 뚫었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놀란 눈을 치켜뜨는 만프레 공작의 목을 잘랐다.
털썩! 데구르르르!
어이없음이 가득한 눈빛으로 만프레 공작의 머리가 무대 위를 굴렀다.
그리고 그 직후, 산성병사들과 흑영들이 빠르게 움직이며 죽은 귀족들의 뿔을 수거했다.
그리고 그렇게 수거한 뿔들을 무대 중앙의 허공에 던졌는데, 그 때마다 씻은 듯이 사라졌다.
파스스스스스슷!
파스스스스스슷!
스화화화홧!
그리고 얼마 후, 흑영들은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고, 호위 기사단은 빛과 함께 사라졌으며, 산성병사들은 흙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그 때, 레인저는 이미 대회의장 밖으로 모습을 감춘 후였다.
알케이네스 제국의 귀족들이 몰살당한 대회의장에 남은 것은 굳어가는 피와 뿔을 잃은 귀족들의 사체뿐이었다.
* * *
파차차차창!
얼마 후 공기가 유리처럼 깨지는 느낌과 함께 대회의장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뚜벅! 뚜벅! 뚜벅!
“놓쳤다고?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고,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고?!”
젊은 알케이네스 종족.
그 뒤에 허리를 굽히고 있는 것은 황제를 모시는 황궁의 시종장이었다.
“대회의장을 봉쇄한 마법을 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제국의 능력이 고작 그것밖에 되지 않았다고?!”
“폐하, 귀족들이 모두 이곳에 있었기에 생긴 문제입니다. 모든 대마법의 핵은 귀족들이 다루도록 되어 있음을 아시지 않습니까.”
“내가, 아니 짐이 그것을 모를까?! 몰라서 하는 말이겠느냔 말이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으으윽, 머리가 아프구나. 이럴줄 알았으면 정화기간을 모두 채우고 나왔을 것인데!”
황제는 정화기간을 앞당겨 나온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지금 두통이 있는 것도 새로운 몸의 찌꺼기를 모두 치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억이 남은 것은 물론이고, 자의식의 조각이 남아 있었다.
그 때문에 황제는 또다시 새로운 인격 하나를 품게 되었다.
강한 인격이나 자의식, 영혼을 지닌 후손의 몸을 빼앗을 때에는 간혹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화의식을 끝까지 치르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큰 덩어리가 남았다.
그것이 앞으로 두고두고 후환이 될 것은 분명했다.
이는 오직 황제만 알고 있는 약점이었다.
“지배력이 모두 사라졌구나.”
새 황제는 쓰러져 있는 귀족들을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있어야 할 것이 없다.
“지금까지 지배력이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 모두 그 지구인의 탓이었단 말이지.”
믿기지 않지만 눈으로 확인한 사실이었다.
“도대체 놈은 어디에 있을까? 설마 차원 밖에서 일을 꾸미고 있는가?”
황제는 귀족들이 모두 죽으면 배후에 숨어 있던 적이 모습을 드러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회의장의 봉인을 뚫기전에 새로운 결계를 만들어 봉인위에 봉인을 더했다.
그런 상태로 원래 있던 봉인을 뚫었던 것이다.
그러느라 대회의장으로 들어오는데 약간의 시간이 지체되었지만 만약을 위한 준비는 완벽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했음에도 얻은 것은 없다니.
“폐하, 우선은 제국의 안정이······.”
시종장이 조심스럽게 조언을 올렸다.
양위가 이루어진 직후, 황제의 의식이 온전하지 않은 경우가 있으니 시종장은 충언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교육을 받았다.
그것이 황제에 대한 충성이라고.
그래서 시종장은 배운 그대로 황제에게 올바른 조언을 하려 애쓰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죽은 시종장들이 많았다는 기록이 있지만, 시종장은 앞선 시종장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제국의 안정, 그래 그게 중요하지. 새로운 귀족도 임명해야 하고, 백성들을 다독이기도 해야 하고, 식민지 단속도 해야 하고. 아, 그 모든 것은 제대로된 수족만 있으면 되는 일이니, 귀족 임명이 먼저겠군.”
젊은 황제는 시종장의 조언을 귀담아 듣는 듯 했다.
“그러하옵니다.”
“그럼 유능한 인재를 찾아야 하는데, 아무래도 여기서 죽은 귀족들의 후계자들 중에서 뽑는 것이 좋겠지? 그만한 교육을 받은 이들도 많지 않을 테니까.”
“소신 또한 그리 생각하옵니다.”
“그래, 그러는 게 좋겠어.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귀족들 중에 생존자가 하나 있는 모양이군. 비록 뿔은 뽑혔지만.”
“네? 생존자라니요?”
“분명 영혼이 몸을 떠나지 않은 놈이 하나 있어. 그렇다는 말은 살아 있다는 뜻이겠지.”
황제의 눈길이 한쪽에 쓰러져 있는 젊은 귀족에게 박혀들었다.
바이디야 주코 나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