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제국의 모든 귀족이 모이는 날을 기다리다
118. 제국의 모든 귀족이 모이는 날을 기다리다
“이렇게 갑자기?”
귀족원의 긴급 연락이 나탄 백작가에 날아들었다.
그 소식은 흑영보다 빨랐다.
제국의 긴급 상황에서만 작동되는 마법 통신으로 핵심만 전해졌기 때문이다.
- 어떤 내용입니까?
“황제가 두 달 후부터 정화기간을 선포하고, 백일 동안 양위 절차를 밟는다는군.”
- 그러니까 그 기간동안 몸을 갈아탄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지.”
- 그럼 로드께 어떤 연락이 온 것입니까? 수도로 올라가야 하는 것입니까?
“당연히 그래야겠지. 이건 제국의 모든 귀족들에게 정화기간이 끝나기 전까지 황도에 올라와 있으라는 강제 명령과 같으니까.”
- 정화기간 전에 올라오라고 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군요.
“그래, 황제하고 마주칠 시간을 뒤로 미룰 수 있으니 다행이지.”
-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귀족 전체가 모이는 자리잖아. 좋은 기회지.”
- 제국의 귀족들을 모두 죽이실 생각이시군요?
“황제가 뿌려놓은 지배력을 모두 빼앗을 수 있는 기회가 흔하진 않지.”
- 하지만 귀족들의 실력도 만만치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해 볼 만은 하겠지.”
- 그럼 로드의 정체는 드러내지 않는 방법을 쓰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번에도 캡슐 타이탄에 숨어 있으란 거냐?”
- 그것도 방법이고, 그냥 귀족들 사이에 숨어 있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귀족들 사이에 숨어 있어라?”
- 그렇습니다. 기간트 수호신이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굳이 로드께서 나서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하긴 그것도 그렇지. 아니 수호신도 꼭 필요하진 않겠지. 호위 기사단장이나 산성의 대장군은 기간트보다 강하니까.”
- 맞습니다. 산성에 군왕성의 점유율을 밀어준다면 산성 대장군이 기간트 수호신보다 강력하지요.
“좋아. 네 말대로 일단 내 정체는 숨기를 걸로 하자. 좀 모양이 빠져 보이긴 하지만.”
- 정정당당한 정면 승부가 꼭 좋은 것은 아닙니다.
“됐다. 정정당당을 따질 생각도 없다. 그나저나.”
- 네, 로드.
“이거 귀족전체 회의 전까지 차원의 근원을 좀 더 모아야겠군.”
- 일곱 성의 차원에 근원을 더하실 요량이십니까?
에포르가 살짝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에포르는 일곱 성 차원의 성장을 무척 기대하고 있어다.
“그래, 큰 일을 치르기 전에 할 수 있는 준비는 최대한 해 둬야지.”
- 알겠습니다 로드. 이 에포르 최선을 다해 로드의 수련을 보필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 * *
두 달의 짧은 준비 기간을 거쳐.
백일의 정화 기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제국의 모든 귀족들이 일제히 수도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정화기간이 끝나고 새로운 황제의 대관식이 열리면, 그곳에서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지배력을 공고히 하는 과정을 거칠 것이다.
그러니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면 이후 새로운 황제의 눈밖에 날 수밖에 없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대관식에 참가하지 못한 귀족들은 이후에 따로 황제를 대면하고 충성 서약을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정말 특별한 경우일 뿐이다.
그러니 모든 귀족들이 황궁에 모여서 대관식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귀족들이 모이면 당연히 이런저런 충돌이 생기기 마련이다.
“어제 콩토올 영지에서 차원벽 붕괴가 일어나 몬스터들이 출몰했다지요?”
백작 이상의 귀족들이 모여 있는 회의장.
황제를 대신하여 제국 국정을 운영하는 그곳에서 문득 차원벽 붕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빠르게 제압하고 피해는 거의 없었소이다.”
오랜만에 공석에 모습을 드러낸 콩토올 공작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그 말을 받았다.
겨우 몇 달 사이에 제국에서 차원벽이 허물어지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게 되었다.
처음 한 번이 어려웠지, 그 후로는 하루이틀 걸러가며 차원벽이 허물어졌고, 계속 간격이 짧아지는 중이었다.
“우리 바나토 영지의 차원벽 붕괴가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은 지형적인 원인은 물론이고, 등장한 몬스터의 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콩토올 공작의 대답이 바나토 후작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불쑥 바나토 후작이 상황을 설명했다.
“누가 바나토 영지의 일에 뭐라 했소? 왜 지레 겁을 먹고 그러시오?”
콩토올 공작은 그런 바나토 후작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마치 차신이 바나토 후작에게 못할 말을 한 것같은 분위기가 되지 않았나.
요즘 공작가들이 대외적인 활동을 삼가고 있으니, 다른 귀족들이 슬그머니 공작가를 넘보는 분위기다.
그래서 콩토올 공작도 심기가 편하지 않았다.
“겁을 먹기는 누가 겁을 먹었다는 겁니까!?”
“솔직히 현 상황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제국의 차원벽이 왜 이리 흔들리고 있는지 알 수가 없음이지요.”
바나토 후작과 콩토올 공작의 언쟁이 심화될 조짐을 보이자, 세이즐 공작이 화제를 공론화시켰다.
제국의 차원벽 붕괴 현상은 매우 이상한 현상이었다.
“본 차원의 힘이 약해지고 있다는 소리가 아니겠습니까. 격이 떨어지고, 차원의 수준이 떨어지는 것이지요.”
후작들 중에 누군가가 뻔한 것이 아니냔 듯이 말했다.
차원벽 붕괴로 다른 차원과 연결되는 것은, 본 차원을 보호하는 차원벽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위 차원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차원벽 붕괴 현상에 본 차원을 보호하는 벽이 휘말리는 것이다.
그렇게 휘말려 본차원의 차원벽에 구멍이 뚫려 하위 차원과 연결되는 현상인 것이다.
“수십 개의 식민 차원을 가지고있는 종주차원인 우립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하지만 알케이네스 차원의 위상으로 보면 그런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차원벽은 그 차원의 위상에 따라서 달라지는 법이다.
차원벽은 차원 전체를 아우르는 시스템에 의해서 조율되는 것인데, 알케이네스 차원 같은 경우엔 절대로 차원벽이 허물어질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말이 안 되는데 그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 아닙니까. 원인을 찾아야합니다.”
그건 모두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원인 규명.
하지만 제국의 모든 석학들이 달라붙어도 알아내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다.
“백성들의 동요가 큽니다. 이번 황제 폐하의 양위로 어떻게든 백성들을 진정시킬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아요.”
결국 백성들의 이야기가 터져 나왔다.
지금껏 알케이네스 종족의 일반 백성들이 문제가 될 일은 없었다.
황제에 대한 굳건한 신앙심으로 무장한 백성들이었다.
그래서 귀족들도 그 백성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백성들은 황제의 광신도이고, 귀족은 그런 황제의 대리인 같은 위치였기에, 백성들이 귀족의 명령에 절대 복종했던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백성들의 믿음에 금이 간다면?
그건 제국 전체가 뒤흔들리는 엄청난 문제였다.
“하아, 결국 이 문제가 거론되는군요. 좋습니다. 본격적으로 논의를 해 보십시다.”
“그럽시다. 문제는 그 동안 귀족들이 암살당했던 지역들과 그 지역에 있던 백성들입니다.”
“그 백성들이 설마하니 제국 전체로 흩어져서 민심을 뒤흔들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황궁의 눈들이 제국 곳곳에서 그런 놈들을 색출하고 있지만, 수가 너무 많습니다.”
“게다가 황제 폐하의 양위에 얽힌 유언비어까지 퍼지는 중입니다.”
“신과도 같은 폐하께 죽음이 당키나 한가, 그런데도 수시로 양위를 하는 것은 불사는 되어도 전지전능은 되지 못하는 황제가 자신의 실책을 가리고 새 옷을 입기 위해서 하는 몸 갈아타기일 뿐이다. 허어, 이런 이야기가 제국 전체로 퍼지고 있어요.”
“그나마 백성들이 폐하에 대한 충성심이 강력해서 그런 말에 흔들리지 않고 도리어 고발을 하는 상황이지만.”
“그건 겉으로 보이는 모습일 뿐이지요. 실제론 민심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습니다.”
한 순간, 터져 나오기 시작하는 귀족들의 문제제기.
그 내용은 하나하나가 심각하기 짝이 없었다.
“도대체 누구겠습니까?”
그런 중에 지금껏 입을 다물고 있던 만프레 공작이 묵직한 한 마디를 던졌다.
“만프레 공작은 지금의 상황이 누군가의 개입에 의한 인위적인 것이라 보는 것입니까?”
콩토올 공작이 만프레 공작을 보며 물었다.
“끄응,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원흉도 대략 짐작하고 있습니다.”
“원흉을 짐작한다고 했습니까?”
이번에는 세이즐 공작도 놀란 표정으로 대화에 끼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전에 내 장자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만프레 공작은 뜬금없이 자신의 아들 이야기를 꺼냈다.
“아끼는 아들이었습니까? 안타까운 일이군요.”
“하지만 그것이 이 일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콩토올 공작과 세이즐 공작은 아들의 죽음에 큰 의의를 두지 않는 모습이었다.
귀족가에서 자식의 죽음이야 그리 드문 일도 아니었다.
후계 경쟁을 하다보면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귀족가의 가주들은 자식의 죽음에 둔감하기 마련이다.
아니 속으로는 곪더라도 태연한 척을 해야 하는 것이 귀족들 사이의 처세였다.
“그 놈은 이전에 차원 원정을 나갔다가 동생놈 때문에 손해를 본 일이 있는 놈이었습니다.”
“아, 기억합니다.”
“그런 일이 있었지요.”
콩토올과 세이즐은 그 일을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래봐야 만프레 공작가의 치부를 들추는 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일로 실패를 맛본 녀석은 심기일전하여 지구 차원에 대한 새로운 공격을 생각했습니다.”
“미련인지, 진취적인 도전인지.”
“그거야 결과가 말해 줬을 테지. 그런데 죽었다면, 미련이었던 거지.”
콩토올 공작에 비해서 세이즐 공작의 판결은 차가웠다.
“문제는 그렇게 죽은 아들의 지배력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으음. 아들이 죽었는데 그 아들에게 줬던 지배력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것이 폐하의 지배력 유실과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까?”
세이즐 공작도 이쯤 되니 만프레 공작의 말에 흥미를 가지지 않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바로 그겁니다. 폐하의 지배력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도 따지고 보면 지구 차원의 원정 이후가 아닙니까.”
“으음. 결국 이번 일에도 그 지구인이 개입되어 있을 거란 말이군요?”
“저는 그렇게 봅니다. 콩토올 공작.”
“그리고 어쩌면 지금 이 자리에 그 지구인이 들어와 있을 수도 있고?”
콩토올 공작의 목소리가 격앙되며 날카로워졌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몸에서 거친 기세가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콩토올 공작도 알겠지만 최근 황도에 정체 모를 섀도우 일족이 돌아다닌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 그 이야기는 나도 들었습니다.”
“그 섀도우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과거 지구 차원의 원정에 나갔던 귀족가의 아이들이 작성한 보고서를 확인해 봤습니다.”
“거기에 분명 섀도우 일족을 부리는 놈이 있었지요?”
“나도 기억이 납니다. 지구 차원의 원정이 실패한 것은 모두 그 놈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보고서가 많았지요.”
“섀도우는 물론이고 흙으로 된 병사들을 다수 소환하는 능력이 있다고 했지요. 하이마 드리아드 차원의 독립은 물론이고, 최근 고브니 차원의 독립에도 놈이 관여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하아, 제국의 종양이 그리 자라나고 있었는데, 우리들은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단 말입니까?”
“우리가 없어도 다들 무난하게 잘 해 나갈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세 공작의 이야기는 이제 은근슬쩍 다른 귀족들을 깎아 내리는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것을 다른 귀족들도 느끼고 있었지만 할 말이 없었다.
세 공작가가 칩거를 택하고 은인자중 하는 사이에 다른 귀족들이 국정 운영을 책임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 중에 지구인이 그런 짓을 하고 다니는 것도 제대로 알아내지 못하고, 또 대책도 세우지 못한 상황이 아닌가.
그 동안 공작가를 밀어내려 애썼던 고위 귀족들은 하나같이 굳은 표정으로 공작들의 연륜이 과연 무섭다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한 순간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아 가지 않았나.
“결국 그 놈이 제국에 들어와서 암약을 하고 있다고 봐야 되는 거겠군. 그리고 그 동안 암살당한 귀족들도 그 놈의 짓인 것이고.”
“간이 큰 놈이군.”
“그런데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떻게 제국의 차원벽을 흔들고 있는가 하는 것이지. 차원벽 붕괴현상을 일으킬 정도라면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능력을 지녔다 봐야 하지 않을까 싶소만.”
“끄응. 딴엔 그렇기도 하군요.”
“차원벽에 영향을 줄 재주를 지녔다면 정말 무서운 놈이겠군요.”
결국 도현이 알케이네스 제국의 차원벽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까지 추측해 내는 귀족들이었다.
그들 속에 바이다야 주코 나탄의 모습으로 말없이 앉아 있던 도연은 그런 회의의 흐름에 내심 놀라고 있었다.
나름 핵심을 잘 짚어가고 있지 않은가.
확실히 제국을 운영하는 귀족들은 무시할 수 있는 놈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끝이지. 내일, 전체 귀족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이는 행사가 있다. 그 자리가 바로 너희들의 무덤이 될 것이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때가 내일로 다가와 있었다.
그래서 말 한 마디 못하고 앉아 있어야 하는 회의의 지루함도 충분히 견딜 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