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늘어나는 재해와 변수의 등장에 황제는 양위를 결심했다
117. 늘어나는 재해와 변수의 등장에 황제는 양위를 결심했다
알케이네스 제국 차원에 변고가 이어졌다.
가뭄, 홍수, 지진, 화산폭발 같은 자연 재해가 잦아진 것이 그 시작이었다.
제국의 신민들은 그런 현상을 두고 두려운 눈빛으로 하늘을 보았다.
그들이 우러러보는 하늘.
그것은 곧 신앙의 대상인 황제를 바라보는 것.
제국 차원에 늘어나는 이상 현상이 신민들에게 황제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게 만들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황제는 신앙의 대상.
그러니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은 곧 황제의 몫이었다.
황제는 신앙의 대상이므로 그러한 재앙으로부터 제국을 지켜줘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면?
“황제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지.”
도현은 영주성의 집무실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황혼이 지는 영지의 모습이 집무실 창문 너머로 넓게 펼쳐져 있었다.
이곳 역시 황혼은 붉었고, 그것은 마치 불길이 영지를 집어삼키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알케이네스 제국이 이렇게 흔들릴 수도 있군.”
- 그건 로드께서 귀족들을 암살한 영향도 적지 않습니다.
도현의 혼잣말에 에포르 병사가 책상 위에 찻잔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들키지 않으려고 먼 곳으로 다니느라 많이 죽이지도 못했는데 무슨.”
하지만 도현은 별 것 아니란 듯이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 나탄 백작령의 주인이 된 후, 바이디야 주코 나탄은 외부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분쟁전과 그 이후의 숙청으로 백작가의 정기가 많이 쇠했다는 이유였다.
부실해진 백작가의 내실을 다지겠다는 이유로 영지의 일에만 공을 들이겠다는 것.
그런데 그것도 또 나름 좋은 결과를 가지고 왔다.
바이디야가 백작이 된 후로, 알케이네스 차원에는 여러 자연 재해가 생겼는데, 나탄 백작령은 그 대처를 빠르고 신속하게 했던 것이다.
가뭄이나 홍수, 산불 등이 나더라도 백작가의 가신들이 빠르게 나서서 문제를 해결했다.
그래서 지금 바이디야 주코 나탄은 나탄 백작령의 역대 영주들 중에서 가장 존경받는 영주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도현의 속임수일 뿐.
도현은 수시로 영지를 떠나 제국 곳곳에서 암살을 자행했다.
작위를 가리지 않고 한 번 나서면 한 지역에서 서너 명의 귀족을 참살하고 그 뿔을 취했다.
당연히 그 뿔에 담겨 있는 지배력은 도현의 것이 되었고.
“요즘 황제가 이상하다지?”
- 그 또한 로드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게, 귀족은 죽었는데, 그 귀족들의 지배력이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는 상황이 문제가 되는 것 같더군.”
딱히 누가 알려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황도에 풀어놓은 흑영들을 통해서 아름아름 퍼지는 소문이 귀에 들어왔다.
- 그나마, 귀족 사후에 곧바로 지배력이 황제에게 가는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조금씩 물이 흘러 바다로 가는 것처럼 황제에게 가는 모양인데, 그게 중간에서 사라진다고 여기는 것이지요.
“하하. 그래서 귀족들 사이에서도 황제를 바꿔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고 있고?”
- 솔직히 새로운 황제라고 해 봐야 몸만 바뀌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 사실을 제국의 백성들이 알게 되면 황제는 그대로 몰락을 할 수도 있을 텐데 말입니다.
“그래, 그것도 생각을 하고 있기는 한데. 아직은 시기상조일 것 같단 말이지.”
알케이네스 제국의 중심은 황제다.
하지만 그 황제를 지탱하는 것은 제국 신민들의 신앙심.
그것이 깨어지면 황제는 나락으로 갈 수밖에 없다.
도현이 차원의 근원을 흡수하면서 제국 차원에 자연 재해가 늘어났다.
그리고 그 현상 때문에 황제에게 흠결이 생기고 있고, 현 황제의 폐위론이 흘러나오는 중이다.
하지만 새로운 황제가 즉위해도 바뀌는 것은 없다.
그래서 결정적인 한 방으로 준비한 것이 역대 황제가 동일한 인물이란 사실을 백성들에게 퍼트리는 것도 생각하고 있었다.
귀족들 중에는 아는 이들이 있지만, 일반 백성은 절대 모르는 비밀.
이것이 밝혀지면 황제에 대한 믿음은 크게 흔들릴 것이다.
“그나저나 지배력은 아무리 얻어도 항상 부족하군.”
문득 도현이 아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로드의 지배력이 사라지는 만큼, 알케이네스 제국에는 반골들이 늘어나지 않습니까.
“얻으려면 투자를 해야겠지.”
에포르의 말에 도현은 피식 웃고 말았다.
지금 도현의 지배력 크기는 백작가의 주인에게 딱 어울릴 정도 뿐.
나머지는 모두 일반 평민들에게 흩뿌렸다.
정말 티끌처럼 미약한 지배력을 외유 나가서 귀족들을 암살할 때마다 그 지역 일반 백성에게 뿌린 것이다.
도현의 지배력을 받은 이들은 그런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다만 약간의 고양감과 자신감이 생기는 정도의 변화를 겪었다.
귀족들의 죽음 이후에 자신들이 변한 사실에 일반 백성들은 입을 다물었다.
괜한 이야기로 의심의 대상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지만, 평소의 그들이라면 하지 않았을 생각이기도 했다.
도현의 지배력을 받은 이들은 도현이 따로 명령을 하거나 지시를 내리지 않아도 조금씩 의식의 변화가 생겨나는 것이다.
제국의 황제나 귀족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닌 주체적인 의식의 발현이었다.
그런 이유로 도현은 항상 지배력의 부족을 아쉬워하는 것이었다.
- 일이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는 것 같습니다.
에포르 병사가 슬쩍 이야기를 이어갔다.
“황제 폐위론이야 뭐, 별 것 아니지. 알케이네스 황제가 한두 번 바뀐 것도 아니고.”
- 하지만 황제가 바뀌는 혼란이 작지는 않다고 하지 않습니까.
“몸을 갈아타고, 모든 귀족을 불러모아 충성 서약을 다시 받는다고 했었지.”
- 예상일뿐이지만, 그 충성 서약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지배력이 약해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귀찮은 작업을 하는 거겠지. 그래서 우리가 그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도현이 지배력을 쌓아서 황제와 파워 게임을 하는 것은 포기했다.
그러자면 정말로 제국의 귀족 절반 이상은 죽이고, 그 지배력을 도현이 모두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도 황제와의 파워 게임에서 이길 거라는 보장이 없다.
그래서 생각한 것은 황제가 가진 힘의 근원인 신앙심을 흔드는 것이었다.
그게 성공한다면 황제는 이전과 같은 위세를 부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황제의 진짜 실력을 알 수 있다면 좋겠는데······.”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도현이지만 방법이 없었다.
황제에 대한 어떤 기록에도 황제의 전투에 대한 것은 없었다.
모두가 황제가 제국을 다스렸던 일들에 대한 칭송만 남아 있을 뿐.
그래서 도현도 황제와 직접 마주치는 것은 어떻게든 피할 생각이었다.
도현 개인의 무력은 아직도 마스터 상급에 약간 못 미치는 상황.
상급에 발을 걸쳤다고 하지만, 여전히 확실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 개인의 무력만 따진다면 알케이네스 제국에만 도현을 이길 수 있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랜드 마스터에 대한 정보는 없지만, 마스터 최상급 수준의 능력자는 제법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이전에 고브니 차원의 차원 회랑을 지키던 황족만 하더라도 그랜드 마스터에 근접하지 않았던가.
- 이제 로드께서도 아시겠지만, 군왕은 전사가 아닙니다.
도현의 혼잣말에 에포르가 엄격한 표정을 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에 도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직은 실력이 안 된다는 건 나도 알아. 그래서 조심하고 있고. 그런데.”
- 네, 로드.
“차원의 근원 말이야.”
- 알케이네스 차원의 근원 말씀입니까?
“그래.”
-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순조롭게 흡수하고 있고, 그 덕분에 이상 현상이 늘어서 민심도 많이 흔들리고 있지 않습니까?
“이건 차원의 근원을 흡수하다보니 느끼게 된 건데.”
- 네 로드.
“아무래도 변곡점이 있는 것 같아.”
- 변곡점이라면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는 차원의 근원에 대해서는 간섭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것은 군왕이신 로드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음, 지금은 자연 재해가 일어나는 수준이잖아. 그것도 큰 문제이긴 하지만.”
- 네, 로드. 그리고 앞으로 그 재앙은 점점 심해지고 빈번해지겠지요.
도현이 차원의 근원을 흡수할수록 그렇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변곡점을 지나면 거기에 또 다른 현상이 더해질 거 같단 말이지.”
- 네? 어떤?
에포르 병사가 놀란 표정으로 도현을 올려보았다.
* * *
“크하하하하. 차원벽 붕괴? 하위 차원의 차원벽이 허물어져 짐의 제국에 몬스터들이 출몰해?”
“폐, 폐하.”
황제는 크게 분노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제국에서 벌어졌다.
차원벽의 붕괴는 차원의 격이 낮은 경우에나 당하는 수모였다.
알케이네스 제국의 차원을 보호하는 차원벽이 약해졌거나 흔들리지 않은 이상, 하위 차원과 연결될 일은 없다.
하위 차원의 차원벽 붕괴에 제국 차원의 차원벽이 휘말릴 일이 없기 때문이다.
휘말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제국의 차원벽에 문제가 있다는 소리.
“오래 전 짐이 제국을 열 때, 그 불안한 시기에나 있었던 일이 지금 일어났다고?!”
“폐하, 한 번의 이변일 뿐입니다. 하위 차원에서 일어난 돌발 변수가 제국의 차원벽에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극히 낮은 확률이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황실학자들이······.”
“끄응! 한 번의 돌발 변수. 그래 그렇겠지. 당연히 그렇고말고. 짐의 제국이 어찌······.”
황제는 제국엔 아무 이상이 없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제국은 여러 다른 차원을 식민지로 거느린 종주차원이다.
그런 격을 지닌 차원의 차원벽이 어찌 허술해 질 수가 있단 말인가.
문제가 생기는 일 따위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황제의 본능 한쪽에서는 자꾸만 경종이 울리고 있었다.
지금 제국 차원 전체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연 재해의 증가에 더해서 차원벽 붕괴 현상까지.
이것은 제국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증거일 수도?
황제의 고심이 길어졌다.
아직은 더 버텨볼 생각이었다.
다음 황제가 편해지기 위해서는 현 황제가 최대한 짐을 지고 갈 필요가 있었다.
어차피 자연 재해가 늘어나고, 지배력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새로운 황제를 세우는 것은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다.
다만 최대한 현 황제에게 부담을 몰아주려고 버티고 있었던 것일 뿐.
하지만 너무 미루면 도리어 화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대관식을 해야 할 것 같군.”
문득 황제가 결심을 한 듯이 중얼거렸다.
그 말에 시종장이 깜짝 놀라며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시종장은 그런 황제의 결정에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그저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는 반응일 뿐.
“새 황제의 즉위를 위해서 백일의 정화기간을 공표하라. 그 시작은 오늘로부터 두 달 후다.”
“네, 폐하. 명을 받들겠습니다.”
항명 따위는 생각할 수 없는 시종장은 황제의 말에 복명하며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인사를 마친 시종장은 다급하게 귀족원을 향해 내달렸다.
두 달 동안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정화기간이 이어지는 백일 동안은 귀족들이 제국을 유지해야 한다.
정화기간 동안에는 황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 황제와 다음 황제가 한 곳에 들어가서 승계 의식을 치르고, 이후 새로운 황제가 돌아오는 기간이 그 백일이다.
“모두! 모두, 정화기간을 준비하시오! 두 달, 후부터 정화기간이 시작되오!”
시종장이 다급하게 귀족원의 문을 박차고 들어가며 고함을 질렀다.
정화기간이란 말 한 마디에 귀족원의 시간이 잠시 멈춘 듯 했다.
하지만 곧이어 혼란과 악다구니가 귀족원을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두 달은 정화기간을 준비하기에 절대 넉넉한 시간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