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차원벽 붕괴점을 넘어가다
105. 차원벽 붕괴점을 넘어가다
윌로우트는 열흘 가까운 시간이 지나서야 도현이 원한 정보를 가지고 왔다.
“아직 이렇게 많은 차원이 연결되어 있다고?”
그런데 의외로 지구와 연결되어 차원벽 붕괴 현상을 일으키는 하위 차원의 수가 많았다.
“열여섯에서 열여덟 곳 사이입니다. 마지막 두 곳은 차원벽 붕괴 후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 다시 열리지 않은 차원입니다.”
“그래도 예상보다는 수가 많네.”
“그렇기는 합니다. 신목의 기록과 비교해 봐도 지구 차원의 안정화는 속도가 느린 편에 속합니다.”
“그렇지? 내가 보기에도 그런 거 같은데?”
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 옴파로에 있으면서 들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얼 걱정하시는지 짐작이 갑니다.”
윌로우트도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안정화가 늦어지는 것이 자연적인 현상이면 좋겠지만, 그게 의도된 거라면 위험하겠지.”
“맞습니다.”
“그리고 그 위험은 여기 이것들 중 한 곳에 있을 것이고.”
도현은 윌로우트가 가지고 온 하위 차원의 목록을 손가락으로 훑어 내렸다.
“그 중에 하위 차원으로 위장한 차원이 있으면 지구의 차원 안정화가 늦어질 수 있다는 말씀이지요?”
“그래, 한 마디로 지구의 등에 빨대를 꽂은 경우겠지.”
이것은 꽤나 고차원적인 수법이지만 또 하위 차원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누군가, 혹은 어떤 세력이 하위 차원 중에 하나를 남모르게 손에 넣어서 일을 저지르는 방식인데.
“차원을 정식으로 등록하지 않고 이용하는 경우지. 차원의 성장 기준을 넘기지 않은 상태지만, 그곳에 고차원적인 존재나 혹은 단체가 자리를 잡고 있는 경우.”
“맞습니다. 그런 상태로 하위 차원이 기준점을 넘을 때까지 상급 차원과 연결하여 차원 에너지를 뽑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렇게 되면 대상이 된 상급 차원은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소비하게 되어 안정화가 늦어지게 됩니다.”
“도둑질을 당하는 건데, 그걸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아고 했지.”
“운이 없어서 특별한 하위 차원과 연결될 경우에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기 떄문에,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이유를 알 수도 없습니다.”
“어쨌거나 이렇게 당하고 있을 수는 없지. 어느 차원인지 알아야겠어.”
“그곳으로 가시려는 겁니까?”
“그래야지. 만약 인위적인 거라면 일을 꾸민 놈들을 작살내야 하는 거고, 그게 아니라면······.”
“엄청난 가능성을 지닌 차원을 손에 쥐게 되시겠군요.”
“그래, 그러니까 자세히 좀 알아봐.”
“그렇지 않아도 그것 때문에 보고가 늦었던 것입니다.”
“음? 그 말은, 어느 차원인지 찾았다는 이야기야?”
“그렇습니다."
"어디야, 여기 상위권에 있어?”
도현이 목록의 위쪽을 찍었다.
“아닙니다. 여깁니다.”
그런데 윌로우트가 여섯 번째 칸을 손가락으로 찍었다.
그 말은 그곳 차원과 지구가 차원벽 붕괴 현상으로 연결되는 비율이 여섯 번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여기라고?”
도현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윌로우트를 보았다.
지구에 빨대를 꽂았으면 당연히 빈번하게 차원벽 붕괴 현상을 일으켜서 차원 에너지를 뽑아가야 한다.
그런데 고작 여섯 번째라니?
“이걸 보십시오.”
윌로우트는 다른 서류 하나를 꺼내 보였다.
도현은 그것을 자세히 살피다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평균적으로 차원벽 붕괴 현상이 지속되는 시간이 길군. 유독 이쪽 차원의 경우만.”
“맞습니다. 지구와 그쪽 차원이 연결되어 있는 시간으로만 따지자면 제일 긴 시간입니다.”
“빈도는 줄이고 시간을 늘였다? 머리 좀 썼군.”
“네, 이걸 본다면 아마도 자연적인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 그런 거 같네. 좋아!”
도현은 단호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로드?”
“어쩌면 잘 된 건지도 모르지. 어떤 새끼들인지 몰라도, 일단 불법 세력이잖아. 학술원에 보고를 한 놈들도 아닐 거고.”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럼 내가 이것들을 쳐 내고, 놈들의 기반을 그대로 흡수해도 되는 거잖아. 그럼 탐사나 개발이 훨씬 쉬울 거고.”
“아, 그건 그렇겠습니다.”
“그러니까 나한텐 좋은 기회일 수도 있는 거지.”
“로드의 능력이라면 분명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음, 미리 조사까지 했다니까, 지금 연결되어 있는 차원벽도 찾아 왔겠지?”
“물론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최근에 생겼고, 몬스터 에어리어에 있어서 사람들의 관심도 받지 않는 곳으로 찾아 왔습니다.”
“뭐, 그렇게까지 할 건 없는데. 그냥 내가 들어갈 때까지만 열려 있으면 되는 건데.”
“그래도 확실한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그리고 이건 그 차원에서 넘어오는 몬스터들 목록입니다.”
“아, 그래. 어디 보자······.”
도현은 윌로우트가 넘겨 준 서류를 차근차근 살폈다.
“같은 차원인데도 몬스터가 다양하네? 육해공군이 다 모였어.”
“네, 그만큼 자연 환경이 다채롭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또한 차원의 크기도 클 확률도 높고 말입니다.”
“좋은 소식만 가득하네. 음? 그런데 이건 뭐야? 지성종의 존재 가능성이 있다고?”
도현은 서류의 끝에 짧게 적혀 있는 내용에 주목했다.
“확실치는 않습니다. 지금까지 1차적인 가공을 거친 기본 도구를 사용하는 정도였는데, 여기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몽둥이를 만드는 정도는 지성종이 아닌 몬스터도 가능하다.
하지만 몽둥이에 쇠못을 박거나, 끝을 갈아서 날카롭게 하는 것은 지성종을 의심해 봐야 하는 문제다.
하위 차원에서 지성종 주민이 있다면 차원 개발이나 소유권 획득에 문제가 생길 여지가 있었다.
그런데 윌로우트가 내민 새로운 서류에는 깨진 점토판이 있었는데 거기에 문자로 보이는 것이 새겨져 있었다.
게다가 서류에 보면 그 점토판에서 마력의 흐름이 감지되었다고 되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마력은 자연스럽게 휘발되었지만 점토판 자체가 마력을 사용하기 위한 아티팩트의 일종임은 분명했다.
그것이 그쪽 차원의 몬스터에게서 나왔으니 윌로우트는 그 차원에 지성종의 존재 가능성을 이야기한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곳에서 작업치고 있는 놈들이 만들어낸 것일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진짜로 그 차원의 지성족 주민이 있다면 곤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차원의 소유권을 획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칫하면 차원 침략으로 판정을 받게 되어 차원 전장이 열릴 수도 있다.
“괜찮아. 보니까 다른 차원 놈들이 그곳에서 수작을 부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렇다면 차원 전장이 열려도 놈들 쪽으로 열리겠지.”
“하지만······.”
“여기서 아무리 떠들어봐야 헛수고지. 이럴 때는 직접 몸으로 부딪혀 보는 것이 답이야.”
“······.”
“준비는 벌써 끝났고, 이제 다녀온다는 인사만 하고 떠나면 되겠네. 너희 종족에게도 따로 인사는 안 할 테니까, 윌로우트 네가 대신 인사 전해 줘.”
“네, 로드.”
“그럼 나중에 봐. 나는 집에 잠시 들렀다가 곧바로 갈 테니까.”
“알겠습니다. 로드. 보중하십시오. 일이 잘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래, 그래.”
도현은 윌로우트의 인사를 받으며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장기간의 출장을 알리고 윌로우트가 전해 준 좌표를 따라서 허물어진 차원벽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 * *
“크으, 이거 만만찮네.”
허물어진 차원벽을 통해서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일.
그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학술원에서도 그런 방식으로 차원을 넘어가는 자체가 탐사자 시험의 첫 관문이라고 할 정도였다.
도현이 목표로 했던 차원벽 붕괴 지점을 찾아서 진입을 시도했을 때, 그가 느낀 압력은 굉장했다.
마스터 상급에 발을 디디고 있는 도현조차도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강력한 압박이었다.
하지만 도현이 착용하고 있는 것은 빛의 성.
빛의 성은 주인에게 강력한 방어력을 제공함과 동시에 상태를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압력에 내상이 생기더라도 그 즉시 치료해서 정상으로 회복시키는 엄청난 효과.
그 덕분에 도현은 약간의 고통을 지속적으로 느낄 뿐, 신체 부상은 없이 목표로 한 차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키이이이익! 키이이익!
문제는 도현이 도착한 장소에 한 무리의 몬스터들이 몰려 있었다는 것이지만.
- 로드! 기사단을!
‘호들갑은!’
도현은 곧바로 군왕성의 호위 기사단을 소환했다.
군왕성은 여전히 74.8%에서 더 이상 점유율이 오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도현이 소환할 수 있는 호위 기사단의 위용은 대단했다.
기사단장 하나와 부단장 둘, 그리고 그 휘하의 평기사 100명.
스화화화홧!
- 공격!
- 처리해라!
도현이 호위 기사단을 모두 소환하자 빛과 함께 등장한 기사들은 곧바로 주위의 몬스터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모여 있던 몬스터는 체구가 3미터 정도 되는 유인원 계열의 몬스터들.
붉은 눈과 흉폭한 기세는 일반 동물로 볼 수 없고, 지구에서도 인간에 대한 엄청난 공격성향을 보였던 종이었다.
끼이이이익! 왁왁왁왁! 끼이익!
서걱! 서걱! 츠리릿! 서걱!
터덩! 카각! 서걱! 텅! 푸욱!
유인원 몬스터들도 기사들의 등장에 마냥 당하지만은 않았다.
처음에는 우왕좌왕 했지만 곧바로 뭉쳐서 대항했다.
하지만 유인원 몬스터들의 수준은 고작해야 익스퍼트 초입.
그 중에 덩치가 크고 더 강한 놈들이 겨우 중급 정도의 수준에 머물렀을 뿐이다.
그런 놈들이 평기사가 마스터 초급인 도현의 호위 기사들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 정리 되었습니다. 로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유인원 몬스터들이 모두 정리되었다.
그 중에 몇은 도망을 갔지만, 도현은 굳이 그것들을 쫓아서 박멸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 유인원 몬스터들은 이곳 차원에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을 것이다.
차원벽의 붕괴로 일어나는 마력 응집에 홀려서 모여들었다가 일부는 지구로 넘어가고, 남은 일부는 차원벽이 조금 더 얇아지기를 기다리고 있던 놈들이 분명했다.
말하자면 이 지역에 퍼져 있는 놈들일 뿐이니, 차원 전체로 보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일단 들어가 있어라. 정찰부터 해 볼 생각이니까.”
도현은 호위 기사들을 다시 역소환했다.
그리고 곧바로 와이번을 소환해서 올라탔다.
- 로드! 이 에포르를 잊으신 것은 아니시지요?
그런 도현에게 에포르가 칭얼거렸다.
직접 몸을 달라는 말은 못하고 돌려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도현은 혼자보다는 에포르가 들어간 산성병사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곧바로 산성병사 하나를 소환해서 에포르에게 내어줬다.
물론 소환과 동시에 머리에는 꿈꾸는 월광초를 심고, 가슴에 마력 흡수 포자를 달아주는 것은 잊지 않았다.
그 뒤, 도현은 에포르 산성병사와 함께 와이번의 등에 올라 비행을 시작했다.
- 오오, 굉장히 마력 순도가 높은 차원입니다.
에포르가 꿈꾸는 월광초와 가슴에 달아준 마력흡수 포자의 효과에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제는 머리에 꽃을 꽂고, 가슴에 포자낭 브러치를 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에포르였다.
“마력이 짙긴 한데, 그렇게 차이가 나나?”
- 로드, 여기가 하이마 드리아드 차원보다 마력이 더 풍부합니다. 게다가 순수하다고 할까요? 그런 느낌입니다.
“음, 나는 잘 모르겠다만.”
- 정신력! 로드의 정신력과 마력을 반응시켜 보십시오. 그럼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
- 네. 로드.
“아, 그런데 그거보다 더 급한 일이 생겼네? 저기.”
도현은 비행 중인 와이번의 전방에 뭔가 인위적인 구조물을 발견하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에포르도 도현의 등 뒤에서 고개를 내밀어 그것을 확인했다.
- 유적······ 같습니다만.
에포르의 목소리에 실망감이 가득했다.
이곳 차원에 지성종 주민이 있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도현이 이 차원을 소유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에포르의 실망감은 거기서 비롯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