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역시 늙은 대장장이는 평범하지 않았다
95. 역시 늙은 대장장이는 평범하지 않았다
“좋군! 우리야 대금만 확실하면 환영할 일이지.”
라코니는 도현의 제안에 뛸 듯이 기뻐했다.
그리고 바비루타 역시 도현이 거래 규모를 키우는 것에 전혀 불만이 없어 보였다.
다만.
“타이탄 심장을 준비하려면 며칠 걸릴 텐데, 그건 이해를 해 주겠지?”
라코니가 도현과 바비루타에게 양해를 구했다.
이에 바비루타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흔쾌히 허락했고, 도현 역시 지금 당장 고브니 차원을 떠날 수는 없으니 마침 잘 된 일이었다.
“자, 여기서 묵으면 되는데, 알겠지만 마을 밖으로 나가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
그리고 라코니는 바비루타와 도현에게 방을 하나씩 내어 주었고, 마을 내에서의 자유를 허락했다.
다만 라코니가 말하는 마을은 지하 도시의 형태라 애초에 밖으로 나가는 것이 쉽지 않은 곳이었다.
“어쩌겠나? 나는 이곳에 아는 사람들이 있으니 돌아다니며 인사나 할 생각인데?”
방을 정해주고 라코니가 타이탄 심장을 구하기 위해 어디론가 떠난 후, 바비루타가 도현을 보며 물었다.
“네네, 저야 뭐 상관하지 마십시오. 마을 구경이나 하면서 사람들과 친해져 보겠습니다.”
“크하하. 그래. 그래야지. 내가 소개를 해 줄 수도 있지만, 그렇게 스스로 부딪혀서 상로를 개척하는 정신이 필요하지. 하하하.”
바비루타는 도현의 대답이 마음에 든다는 듯이 배가 떨리게 웃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 뒤, 도현 역시 숙소를 빠져나와 고브니 종족의 마을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미 마을에는 도현과 바비루타가 온 것이 알려져 있었는지 도현을 의심하는 시선은 없었다.
그저 두꺼비와 도롱뇽을 합쳐 놓은 것 같은 기괴한 모습을 신기해 하는 어린 아이들의 시선이 쏠렸을 뿐이다.
- 이제 무얼 하실 생각이십니까?
에포르가 반지 속에서 물었다.
‘어쩌긴, 접선을 해야지.’
- 접선이라니요?
‘할켄 장로가 알려준 접선 방법이 있어.’
- 그렇습니까? 그런데 누구와 접선을 한다는 말씀입니까? 이 마을에 접선 대상이 있기는 한 것입니까?
도착 지점을 정해놓고 온 것이 아니다.
그러니 어떤 혈족과 만나게 될지는 알 수 없었던 상황.
그럼에도 할켄과 룸켄, 모르켄은 그 어떤 혈족의 마을이라도 접선이 가능하다며 자신감을 보였었다.
땅! 땅! 땅땅! 땅땅땅! 땅! 땅!
그 때, 도현의 귀에 망치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브니 종족 중에서 지하에 도시를 건설하는 이들은 그 혈족 자체가 대장장이 집단이다.
지하 광물을 쉽게 얻고, 용암의 열기를 금속 가공에 이용하기 위해서 지하 깊은 곳으로 파고드는 것이다.
물론 고브니 일족 중에는 지상에서 대장장이 일과는 상관없는 삶을 사는 혈족도 있다.
농사를 짓거나 목축, 어업은 물론 일반 생산 활동을 하는 혈족들도 많았다.
다만 고브니 일족이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 대장장이 업임은 분명하다.
오죽하면 고브니 차원 전체의 혈족 회의에서 대장장이 일을 할 혈족을 정하는 다툼이 수시로 일어날까.
-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도현이 망치 소리를 따라서 복잡한 골목을 빠르게 걷기 시작하자 에포르가 물었다.
‘이쪽에 마을 대장간이 있는 모양이니, 거기로 가는 거야.’
- 그곳에서 뭔가를 해야 하는 것입니까?
‘가서 망치질을 좀 해야지.’
- 로드께서 망치질을 하신단 말씀입니까?
‘적당한 단검이나 하나 준비해 둬. 가서 수리를 좀 해 볼 생각이니까.’
- 마을 대장장이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하신다는 말씀이군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뭔가를 보여주실 거고 말이죠.
‘그래. 고브니는 혈족마다 금속을 다루는 독특한 비기가 있다더군. 그리고 그걸 알아볼 수 있는 대장장이가 어느 마을에나 서넛 정도는 있다고 했고.’
- 그러니까······.
‘다 왔다. 일단 들어가서 어떻게 하는지 봐라.’
- 네, 로드.
“무슨 일인가? 바비루타와 함께 왔다는 차원 상인인 모양인데, 여긴 왜 왔지?”
대장간 구역 초입,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늙은 고브니 일족이 도현을 막아섰다.
고브니 일족의 대장간은 거대한 용광로를 중앙에 두고 세 개의 원을 만들었다.
가장 안쪽의 원에는 대여섯 개의 공간이 있고, 각각의 공간은 혈족의 가장 뛰어난 실력자가 차지한다.
그리고 중앙 원에 십여 개의 공방을 만들어 중장년의 실력자들이 자리를 잡았다.
당연히 제일 바깥쪽 넓은 원에는 이제 겨우 독립을 허락받은 대장장이나, 나이가 들어도 실력이 떨어지는 이들이 자리를 잡는다.
지금 도현은 그 제일 외곽에서 한 대장장이에게 붙잡혔다.
원래는 가장 안쪽까지 들어가서 실력 있는 대장장이와 대화를 해야 하는데.
“네네. 안쪽에 가서 구경이나 좀 할까하고.”
“그러니까 바깥쪽에 있는 나같은 놈에겐 볼 일이 없다?”
“네네, 그런 말은 안 했습니다만.”
“그 말이 그 말이지!”
“네네. 상인은 솔직해야 하니 있는 그대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실 거래할 상품을 찾으려고 해도, 이 바깥쪽 보다는 안쪽이 훨씬 가능성이 높지 않겠습니까?”
실력!
그것을 따지면 고브니 종족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없는 실력을 부풀려 가장하는 것을 그들은 극도로 혐오했다.
그러니 이렇게 대놓고 좋은 물건을 찾기 위해서 안쪽으로 간다고 하면 당연히 물러나야 한다.
그런데.
“흥! 꼭 좋은 물건이 저 안쪽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 따라와라!”
이런 반응은 도현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고브니 종족이 좋은 물건이라고 자신했다면 절대 빈 말은 아닐 것이다.
도현은 일단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은 잠시 미루고 늙은 대장장이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늙은이의 걸음이 멈췄다.
화화확!
“네네, 굉장한 열기로군요!”
도현은 아무 생각없이 대장간 안으로 들어서다가 깜짝 놀라 주춤거렸다.
생각지도 못한 열기가 대장간 안에 가득했는데, 그 열기는 한쪽 벽에 있는 소형 용광로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둘러봐라. 나쁘지 않을 테니까.”
늙은 대장장이는 진열대와 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갖가지 무기와 방어구들이 가득했다.
“네네. 살펴보겠습니다. 오오, 이건 굉장하군요. 상급! 이건······ 미묘하지만 최상급에 가깝군요.”
도현은 물건들을 하나하나 살피며 연신 감탄을 거듭했다.
실제로 그곳에 있는 것들은 모두가 상급에 속하는 것들이었고, 가끔 최상급으로 봐도 좋을 것들까지 섞여 있었다.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사라.”
대장장이가 도현을 보며 말했다.
투박한 말이었지만, 그의 말에는 도현이 그것들을 구입해 주기를 바라는 바람이 들어 있었다.
“네네. 으음. 배주머니에 여유가 있으니 사도 좋을 것 같기는 합니다만.”
도현은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턱을 긁었다.
“내 물건들이 나쁘진 않을 텐데?”
늙은 대장장이는 자부심이 깃든 눈빛으로 진열대의 물건들을 보며 말했다.
“네네. 그야 분명 그렇지만, 안쪽으로 가면 이만한 물건들이 더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거래란 것은 원래 흥정을 해야 하고, 흥정을 하려면 다른 물건들도 봐야 하는 것이고 말입니다.”
“그건······. 인정하지. 하지만 장담하건데, 안쪽으로 간다고 해도 내 물건보다 뛰어난 것은 찾기 어려울 거다. 엇비슷한 것은 있겠지만.”
늙은 대장장이는 자신의 물건이 최고라고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최고인 것들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고브니 종족은 기술이나 제작품에 대해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종족이니까.
“네네. 그렇군요. 저도 이것들이 좋은 물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도현도 그건 인정했다.
“그렇다면 내가 가격을 낮추지. 보통 거래되는 것에 비해서 2할을 깎아 주겠다.”
“네네? 그건 상인과의 거래할 때의 대금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당연하지! 우리가 상인이 아닌 누구와 거래를 한다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만들어서 쓰면 되는 것을.”
하긴, 고브니 종족은 대부분의 물건들은 스스로 만들어 쓴다.
그들이 거래를 하는 것은 재료나 생필품이다.
“네네. 그런 조건이라면 저도 좋습니다. 하지만 여기 있는 물건을 모두 가지고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런가?”
“네네. 일단 상품을 골라 보겠습니다.”
“끄응, 그렇게 해라. 그리고 대금은 상급 마력석으로 받았으면 한다. 그게 없다면 차원 에너지나 포인트로.”
“네네? 차원 에너지나 포인트야 이해가 됩니다만, 상급 마력석이라니요?”
고브니 차원에서 상급 마력석은 거래 금지 물품이다.
상급 마력석을 이용한 타이탄 심장은 알케이네스 제국의 총독부에서 제작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자네와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우리와 하는 거래 자체가 제국의 눈을 피하고 하는 짓인데?”
“네네. 그야 그렇습니다만.”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상급 마력석이 있긴 있는 모양이군?”
“네네. 그야 마력석은 그 자체도 좋은 재료이기도 하지만, 화폐 대용으로 자주 쓰이는 물건이니까요.”
“좋군. 그럼 그걸로 하지.”
“······.”
늙은 대장장이는 거래 대금으로 상급 마력석을 못박았고 도현은 대답을 하지 않고 입을 닫았다.
그렇게 도현과 늙은 대장장이는 잠시 서로를 노려보며 서 있었다.
“네네, 그, 거래는 잠시 후에 하기로 하고.”
“뭐라?”
“네네. 일단 망치와 모루, 용광로를 좀 빌려주시겠습니까?”
“갈수록 기가 막힌 말만 하는군. 나에게 지금 대장간을 빌려 달라는 건가?”
“네네. 제가 아끼는 단검이 있는데 그걸 좀 수리할까 싶어서 말입니다.”
“고브니를 앞에두고 포일로가 망치를 들겠다?! 허! 어이가 없군.”
“네네. 그러시겠지만 사연이 있는 물건이라 남에게 맡기지 못할 물건입니다.”
“사연이라······.”
“네네.”
“이거 이상하게 발목이 잡히는 느낌이군. 알았다. 빌려주지, 내 대장간. 하지만 밖으로 나가지는 않겠다. 네가 하는 짓을 모두 지켜보겠다는 말이다.”
원래는 타인의 기술을 훔쳐보는 것은 고브니 일족의 금기다.
하지만 자신의 공간에 다른 사람이 들어와서 작업을 하는 경우에는 그런 금기가 통하지 않는다.
도리어 자신의 기술을 빼앗기기 싫다면 간청을 해서라도 공간의 주인을 밖으로 나가게 해야 한다.
그런데 늙은 고브니 대장장이는 선수를 쳐서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도리어 도현이 바라는 바였다.
“네네. 상관없습니다. 제 실력은 하찮아서 숨길 것도 없습니다.”
도현은 그렇게 말을 하고는 배주머니에서 단검 하나를 꺼냈다.
미리 에포르에게 준비시킨 평범한 단검이었다.
“끙, 별 것도 없어 보이는군. 정말로 사연만 특별한 물건인 모양이군.”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는지, 늙은 대장장이가 대놓고 실망스런 표정을 지었다.
“네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라고 말입니다.”
도현은 그렇게 대꾸하며 단검의 손잡이를 분리하고, 칼날만 뽑아서 화구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 화구는 대장간 구역의 중앙 용광로에서 열기를 그대로 받아 오는 방식이어서 풀무가 따로 없었다.
그저 화구 옆에 있는 레버를 움직여서 화력을 조절하는 형태였다.
도현은 화구 옆에 있는 재료들 중에서 괴탄을 작은 삽으로 퍼서 올리고 단검의 몸을 달구었다.
“으음? 아주 모르는 건 아닌 거 같군.”
그런 도현의 모습에 늙은 대장장이도 흥미를 보였다.
이후, 도현은 단검의 몸을 달구고 모루 위에서 두드리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늙은 대장장이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도현이 단검을 담금질하기 위해서 특별한 액을 만들어 쓰기 시작할 때부터였다.
분명 늙은 대장장이의 대장간 안에 있는 것들만 써서 만든 액이었지만, 그것은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게다가 단검을 두드릴수록 그 특별함은 더욱 두드러졌다.
결국.
“네 놈! 뭐냐? 뭔데 우리 고브니 혈족의 비기를 알고 있는 것이냐! 그것도 이미 사라진 혈족의 비기를!”
늙은 대장장이가 참지 못하고 도현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그는 당장이라도 곁에 있는 쇠메를 들어 공격할 듯, 기세가 사나웠다.
땅! 땅! 땅! 땅!
하지만 도현은 마지막까지 단검 수리의 마무리 망치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망치질이 끝날 때까지 늙은 대장장이도 꼼짝 않고 도현을 노려보기만 했다.
고브니 종족이 다른 대장장이의 작업을 중간에 방해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따앙!
“끝났습니다.”
도현이 마지막 망치질을 끝냈을 때, 그의 말에서 ‘네네’라는 습관적인 말투가 사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