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이곳엔 쟈이코가 아니라 캐슬이 있었다
92. 이곳엔 쟈이코가 아니라 캐슬이 있었다
“계속 핍박을 당하니, 미천한 상인의 속에서도 울화가 치밀지 뭐겠습니까.”
“뭐라?”
“게다가 이미 거래도 끝난 마당인데, 계속 자세를 낮춰야 할 이유도 없고 말입지요.”
“미천한 상인 놈이 감히 가주님께 무례하게······.”
“시종 놈이 주인의 대화에 끼어들다니, 예절 교육이 엉망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놈! 상인의 일이 끝난 나는 포일로에 영지를 지닌 영주의 신분이다. 고작 너같은 시종 따위가 함부로 할 몸이 아니지.”
도현이 이전과 달리 시종장을 한없이 깔보는 눈빛으로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엘리아네 여왕은 쟈이코란 포일로 종족의 신분을 만들 때, 작은 영지의 주인 자격이 들어 있는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비록 촌장이나 다름없는 수준이지만 영지의 주인이란 말이 아주 거짓은 아닌 셈이다.
“으음. 영주란 말인가?”
이런 도현의 말에 은색 뿔이 난처한 표정을 드러냈다.
“우리 포일로에서 영주가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알케이네스의 귀족가 시종 따위에서 멸시를 당할 정도는 아니지요. 그리고 따지고 보면 귀하께서 나를 낮잡아 보는 것도 무례한 행동이고 말입니다.”
“당신이 영주라면 그 말이 합당하긴 하군.”
“앞서는 천한 상인의 신분이었으니 참았지만, 이제 거래가 끝났고, 다시 거래를 할 것 같지도 않으니 고객으로 대할 마음을 버렸단 말이지요.”
“그렇겠지. 내가 귀하를 죽이려 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면 당연히.”
“자, 그래서 어쩌겠습니까? 계속 내 목숨을 노려보겠습니까?”
도현이 은색 뿔의 귀족을 노려보며 물었다.
만약 계속 하겠다면 전력을 다해서 싸워주겠다는 의지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눈빛이었다.
“체면이 말이 아니로군. 하지만······.”
파라라라라라락! 파라라라라락!
은빛 뿔의 귀족은 잠시 망설이는 듯 했지만, 곧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이 허공에 띄웠던 종이들과 마력 연결을 강화했다.
“결국 그렇단 말이지?”
그 모습을 확인한 도현의 말에서 존대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런 도현의 앞으로 하얀 갑옷을 입고 큰 방패를 든 기사 두 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군왕성의 호위 기사단이었다.
“으음? 암살자가 전부가 아니라고?”
이에 은색 뿔의 귀족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공격과 방어는 항상 함께 하는 법이지. 자, 그럼 이제 시작해 보자.”
은색 뿔이 놀라거나 말거나 도현은 흑영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스슷! 스팟! 카가강! 푸푹!
“억!”
첫 공격은 은색 뿔이 아니라 그 곁에 서 있던 시종장을 향했다.
시종장도 어느 정도 실력이 있었던지 흑영의 첫 암습은 어찌어찌 쳐 냈다.
하지만 뒤이어 들어간 또 다른 흑영의 연계 공격에 심장을 내어주고 말았다.
등 뒤에서부터 깊이 찌른 단검이 앞가슴을 뚫고 나왔다.
“이, 이런!”
파라라라라락! 파라라락! 번쩍!
이에 은색 뿔이 깜짝 놀라며 종잇장들을 움직였다.
그 중에 두 장이 빠르게 날아가 시장장의 몸에 붙더니 빛을 내며 사라졌다.
그러자 그 빛이 시종장에게 스며들며 상처를 치료했다.
하지만.
푸욱! 까드드득!
“커억!”
다시 한 번 흑영의 단검이 시종장의 옆구리를 찌르고, 이후 단검이 그 몸 안에서 비틀리며 상처를 키우자, 시종장은 견디지 못하고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지금 시종 따위에게 신경을 쓸 때가 아닐 텐데?”
그리고 은색 뿔을 향한 흑영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파방! 카가강! 터더덕! 콰직!
검은 그림자가 번뜩일 때마다 은색 뿔 주위에선 갖가지 빛이 번뜩였다.
흑영의 공격을 여러 종류의 방어막으로 막아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흑영들의 공격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공격이 이어질수록 서재에 떠 있던 종잇장들이 줄어들고 있었다.
“이, 이런!”
은색 뿔의 귀족은 당황했다.
공격은 하지 못하고 방어만 하는 실정인데, 그것도 무한한 것은 아니었다.
이대로는 승산이 없을뿐더러, 자신의 목숨까지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고약하군! 일이 이렇게 꼬이다니!”
결국 그는 결단을 내리고 말았다.
파라라라락! 쨍그랑!
번쩍! 번쩍!
은색 뿔 귀족의 손짓에 몇 장의 종이가 서재 한쪽의 유리창을 깨트리고 밖으로 쏘아져 나가더니 빛을 터트렸다.
“음, 증원군을 불렀나?”
도현도 그 빛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이왕 이리 된 것, 정체를 감추려 노력할 이유가 없어졌지.”
“그래? 그래서 네 정체가 뭐라는 거지?”
“텔레포트 이용증서에 내 이름이 있었을 텐데?”
“그러니까 당신이 휼트 자작이란 소리?”
이용 증서에 적혀 있던 이름이 그것이었다.
“그렇다.”
“정체를 숨기느니 어쩌느니 하더니 정작 서류는 자신의 것을 내어 줬다고?”
“어차피 죽일 놈인데 무슨 상관이었겠느냐?”
“하긴 그것도 그러네. 그런데 젊음의 비약은 왜 필요했던 거지? 무슨 거사가 어쩌고 했던 거 같은데?”
“몰라도 될 것을 알려고 하는 호기심이 있군.”
“아니지, 그런 정보가 때로는 큰 거래에서 우위를 점하게 해 준단 말이지.”
“하긴, 쓰기에 따라서는 나쁘지 않은 정보긴 하겠군.”
“그래서 말을 안 해줄 거야? 네 부하들이 도착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할 텐데?”
도현은 그렇게 말을 하며 십여 기에 불과했던 흑영의 수를 삼십 기로 늘렸다.
휼트 자작은 그림자에 숨지도 않고 모습을 드러내는 흑영들의 모습에 표정이 굳어졌다.
그 흑영들이 공격을 시작하면 자신이 버텨내기 어려울 거란 예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얼마 후에 황궁 연회가 있다.”
결국 휼트 자작은 도현이 준 기회를 잡고 시간을 끌기로 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지. 이틀 후였지?”
“그렇다.”
“설마 거사란 것이 황궁을 상대로 한 거란 말이냐?”
“무슨! 감히 폐하께 불충할 수는 없지.”
“아, 그런가? 그럼 뭐지?”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그저 후계 경쟁일 뿐이다. 내가 뮬트 후작가의 주인이 되기 위한.”
“네가 휼트 자작이니 뮬트 자작의 아들 쯤 되는 모양이군. 그런데 뮬트 후작가의 주인이 되는데 젊음의 비약이 필요하다고? 가문의 주인이 바뀌려면 원래 가주가 죽어야 하는 거 아닌가? 젊음의 비약은 누굴 죽이는 것이 아니라 회춘시키는 것인데?”
젊음의 비약이 지닌 효과를 생각하면 가문의 후계자 다툼에 젊음의 비약은 어울리지 않는다.
“설마 후작에게 젊음의 비약을 바쳐서 점수를 따 보겠다는 그런 계획은 아니겠지? 고작 그런 걸 거사니 뭐니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도현은 저 휼트 자작이란 놈이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무척 궁금했다.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말해주마. 젊음의 비약은 후작님이 마시게 될 것이다.”
“음? 그게 그거 아닌가?”
“하지만 내가 후작에게 젊음의 비약을 줬는지는 밝혀지지 않겠지. 그저 후작이 마시는 술잔에 젊음의 비약이 들어가 있을 뿐이니까.”
“정체 모를 액체를 후작에게 마시게 한다고? 그게 가능한가?”
“황궁 연회의 잔에는 몸에 해로운 것을 담을 수 없다. 모든 그릇에 마법이 걸려 있기 때문이지. 그러니 연회에서 먹고 마시는 것을 경계하는 일은 없다는 소리다.”
“그러니 후작에게 젊음의 비약을 마시게 하는 것도 어렵진 않다는 거군.”
“조금만 신경 쓰면 간단한 일이지.”
“좋아. 이해했다. 하지만 그게 후작의 지위를 물려받는 것과 무슨 상관이지?”
“크크, 간단한 문제다. 하이마 드리아드 차원이 독립한 후로, 신목의 씨앗은 특별히 하사된 것이 아니면 모두 황족 전용으로 선포 되었다.”
“음?”
“그런 중에 후작이 연회에서 젊음의 비약을 마시고 그 효과가 나타난다면?”
“일종의 황족 모독이 되는 건가?”
“모르고 마셨으니 죄가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후작가 전체를 놓고 보면, 흠이 생긴 가주를 밀어내고 새로운 가주를 세우는 것이 좋겠지.”
“뮬트 후작가는 가주보다 가신들의 힘이 더 강한 모양이군.”
“크흐, 그 정도는 아니지만, 모두가 혈족이라 후작가 전체의 이익을 내세워 가주를 갈아치울 정도는 되지.”
“그리 대단한 계획도 아니로군. 조금만 생각해보면 누가 잔에 젊음의 비약을 넣었는지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테니까.”
도현은 휼트 자작의 계획이 어설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뻔히 보이는 수작이 아닌가.
“그렇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지. 그래서 젊음의 비약을 내가 아닌 계승 1순위의 형님이 구한 것으로 흔적을 남겨 두었지.”
“음? 흔적을 남겼다고?”
“형님이 젊음의 비약을 은밀하게 구했는데, 그 비약이 후작님의 잔에 담겨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거니까.”
“아, 그건 좀 괜찮네. 그렇게 후작과 후계자를 치운단 말이지? 제법이군.”
얼마나 정교하게 일을 꾸며 놓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름 괜찮은 계획이었다.
일이 어긋나서 후작이 물러나지 않아도 상관없을 것이다.
후작에게 흠이 났고, 그 흠을 만든 것이 후계자라면, 이후에 휼트 자작이 후계자인 형을 밀어낼 가능성이 커질 테니까.
“그런데 나 때문에 곤란해졌단 말이지?”
“그렇지. 그러니 이제 그 죗값을 치러라!”
도현의 중얼거림에 휼트 자작은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그 순간 서재의 창문이 박살나며 한 무리의 기사들이 안으로 뛰어들었다.
와장창창! 차자자장!
“주군!”
“자작 각하!”
“어찌 이런 곳에 홀로 계십니까?”
“저, 저건 시종장? 시종장이 죽었다!”
“주군을 지켜!”
그렇게 십여 명의 기사들이 뛰어들고, 동시에 저택 전체를 포위하는 병사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자작의 주위에 포진한 기사들은 곧바로 도현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저 놈을 죽여!”
그리고 기사들의 보호를 받게 된 순간, 휼트 자작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명령을 내렸다.
“추웅!”
“죽여라!”
휼트 자작의 명령에 기사 여섯이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도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명령의 이유 따위는 고민하지 않고 몸을 날리는 충직한 기사들.
여섯이면 도현을 보호하고 있는 두 명의 기사들을 제압하고 도현까지 처리할 수 있다고 여긴 듯 했다.
카강! 파캉 파캉!
카가가각! 카르르륵! 차자자장!
휼트의 여섯 기사와 도현을 지키는 두 명의 기사가 서재 안에서 맹렬하게 맞붙었다.
그런데 의외로 휼트의 여섯 기사는 두 명의 호위 기사를 뚫지 못했다.
스팟! 카강! 스스스스슷! 카라라랑! 카강! 캉!
“암습이다!”
“그림자를 조심해라!”
게다가 휼트 자작을 향한 흑영들의 공격도 시작되었다.
휼트 자작을 지키던 기사들이 흑영들의 공격을 막아내긴 했지만, 상황은 도현 쪽보다 휼트 자작 쪽이 더 위태로워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서재에 불러 놓은 흑영의 수가 서른이니 몇 명의 기사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휼트 자작은 그 상황에도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그는 마력을 움직여 자신의 마법 매개체인 종이들을 움직였다.
마법을 준비하는 동안만 자신의 안전을 지켜줄 방패가 있다면?
휼트 자작은 자신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파라라라라라락! 파라라라락!
고오오오오오오! 고오오오오!
휼트 자작의 마력 운용이 이어질수록 더 많은 종이들이 서로 연결되어 강대한 마력의 흐름을 만들었다.
도현도 호위 기사들 뒤에서 휼트 자작이 마법을 준비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역시 알케이네스의 귀족, 마냥 무능하진 않단 말이지.’
- 로드, 저 놈의 마법이 완성되면 곤란할 수도 있습니다. 어서 처리를 하시지요.
휼트의 모습에 감탄하는 도현이 답답했던지 에포르가 다급한 어조로 도현을 재촉했다.
‘그래, 빨리 정리하고 물러나야겠다.’
도현은 젊음의 비약 거래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자작과 시종장밖에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기사들이 뛰어들며 휼트 자작이 이곳에 있는 이유를 몰랐던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휼트와 이곳에 있는 이들만 죽이면 포일로 종족의 쟈이코를 숨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곳에 있는 것은 포일로의 쟈이코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여야 했다.
이를테면 캐슬같은.
푸화화화화확!
“이건 또 무슨!”
“무슨 흙먼지가 이렇게!”
“자작 각하를 지켜라!”
“암습에 대비해라!”
도현의 결심과 함께 흙먼지가 뿜어져 나와 서재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 흙먼지는 곧 산성병사 부대의 천인장과 백인장들을 만들어 냈다.
“모두 죽여!”
여전히 뿌연 흙먼지 속에서 도현의 명령이 천인장과 백인장들에게 떨어졌다.
서걱! 서걱! 스스슥!
그리고 마스터의 상징인 오러 블레이드가 흙먼지 속에서 휼트자작의 기사는 물론이고, 휼트 자작의 목까지 거침없이 베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