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잠입 알케이네스 제국
89. 잠입 알케이네스 제국
-로드,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에포르가 반지 안에서 불퉁한 어조로 말했다.
‘뭐가 이해가 안 된다는 거야?’
도현이 차원 상인 길드의 포일로 지부의 상담 창구를 힐끗거리며 속으로 대꾸했다.
- 마음만 먹으면 지구를 지배하는 것도 가능했을 텐데, 어째서 이렇게 변신까지 해가며 고브니 일족을 도우려 하시는 겁니까?
변신이나 고브니 일족을 돕는 것에 불만이 있는 것처럼 들리지만, 실제론 도현이 권력에 욕심을 보이지 않은 것을 꼬집는 말이었다.
‘서류 작업이 귀찮아서라고 하면 설명이 될까?’
- 고작 서류 작업 때문이란 말입니까?
‘서류 작업은 상징적인 거지. 지배자라는 것이 항상 권리만 있는 것은 아니잖아. 책임과 의무도 따르지. 게다가 높은 자리에 있을수록 많은 일을 해야 하거든.’
- 로드께선 그저 지침만 내려주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일이야 저와 같은 아랫것들이 하는 것이고 말입니다.
‘쯧, 그게 되겠냐? 게다가 내가 생각을 해 보니까 내가 어떤 종족의 지배자가 된다면······.’
- 네? 지배자가 된다면요?
잠시 말을 멈추는 도현에게 에포르가 뒷말을 재촉했다.
하지만.
“초급 차원 상인 신청자 쟈이코, 쟈이코 씨, 이리로 오십시오.”
차원 상인 길드의 상담 창구들 중 한곳에서 포일로로 변신한 도현을 불렀다.
쟈이코는 도현이 쓰기로 한 이름이었던 것이다.
“여기 있습니다.”
도현이 불룩하게 나온 배 때문에 살짝 버둥거리며 의자에서 일어나 자신을 찾는 상담사를 향해 걸어갔다.
“쟈이코 씨?”
도현이 상담창구 앞쪽의 의자에 꼬리부터 조심스럽게 무거운 몸을 끼워 넣자, 상담사가 도현을 보며 확인하듯 이름을 불렀다.
“네네. 제가 쟈이코입니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서류에 보면 차원 상인을 요청하셨는데······.”
“네네, 이번에 자격이 되었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곧바로 이곳 지부까지 달려왔습니다.”
“여기 보면, 쟈이코 씨의 고향이 여기에서 닷새 정도는 가야 나오는 마을이던데요?”
“네네. 거기서부터 여기까지 온 것이 맞습니다.”
이미 고향에 대한 것도 숙지를 해 둔 상태였다.
그리고 그렇게 먼 곳에서 이곳 도시까지 왔다는 것은 나름 제 한 몸을 지킬 능력은 있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런 사항은 상담사가 작정하는 서류에 특이 사항으로 기록이 될 것이다.
비록 사소한 내용이겠지만, 차원 상인 심사자들에게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인상을 줄 수 있다면 충분히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또 이 신청서에 주력 상품이 연금술 제약분야라고 되어 있는데, 맞는 건가요?”
상인 길드의 상담사도 포일로 종족이었지만 짙은 갈색인 도현과 달리 연한 녹색 톤의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네네, 그렇습니다.”
“특별한 상품도 있다고요?”
“네네. 그 덕분에 차원 상인 신청이 가능해졌지요. 맞습니다.”
“좋아요. 이렇게 추천서까지 있는데 차원 상인 허가를 내어 주지 않을 이유가 없겠지요. 여기 차원 상인 길드 안내서가 있어요. 아시겠지만 거래에 길드의 도움을 받는 부분이 있다면, 그 중요도에 따라서 이익의 일정 지분을 길드 세금으로 납부해야 합니다.”
안내서에는 다른 많은 내용이 있었지만 상담사는 세금만 강조하며 책자를 도현에게 내밀었다.
도현은 책을 받아서 배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그러자 상담사는 다시 붉은 끈으로 묶인 양피지 스크롤 하나를 도현에게 내밀었다.
“차원 거래 허가증입니다. 이게 있어야 차원 상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신분증의 역할도 하는 것이니 보관을 잘 하셔야 할 겁니다.”
“재발급은 안 되는 겁니까?”
“되긴 하지만 비용이 발생하겠죠?”
“아,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모든 것에 돈을 연관시키는 것이, 역시 상인 길드라는 생각이 드는 도현이었다.
“그럼 행운이 깃들길 빌어요.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길드에 납부해야 할 세금은 속이면 안 됩니다.”
“알았습니다.”
도현은 양피지 스크롤을 받아들며 그렇게 대답하고 길드 건물을 나섰다.
그리고 곧바로 알케이네스와 통하는 차원 회랑을 찾아갔다.
아쉽게도 고브니 차원으로 곧바로 갈 수 있는 차원 회랑은 없었다.
원래는 있었다는데 고브니 차원에서 뭔가 사고가 생긴 후에는 그 회랑을 닫아버렸다는 것이다.
게다가 고브니 차원은 원래 알케이네스 제국의 콩토올 공작가에서 관리하던 곳인데, 황제 직할령으로 바뀌면서 다른 차원과 통하는 회랑들을 보도 폐쇄했단다.
도현은 몰랐지만 그 일은 지구로 넘어온 고브니 종족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 고브니 일족이 지구를 공격하지 않고 지구에 협력하자 콩토올 공작이 식민 차원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식민 차원을 황제가 거두어 간 것이다.
- 로드, 이대로 알케이네스 차원으로 넘어가실 겁니까?
“그래야지 뭐. 이곳 포일로 차원에서 할 일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 그런데 알케이네스에서 고브니 차원으로 가는 차원 회랑은 어떻게 찾지요?
“원래 콩토올 공작가에 고브니 차원과 연결되는 차원 회랑이 있었다니, 그곳부터 먼저 공략을 해 봐야지.”
- 그쪽 차원 회랑은 닫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회랑 자체를 아주 없애진 않았겠지. 그리고 콩토올 공작가가 아니라 차원 상인인 내가 그 회랑을 이용하는 것은 상관없을 거 같고.”
- 하지만······.
“일단 부딪혀 보는 거지. 안 되면 깽판 한 번 치고 지구로 돌아와서 다른 방법을 찾아도 되고.”
알케이네스 차원에서 골드 포탈을 열 수 있는 도현이었다.
거기에 포탈 이동을 이용하면 지구로 통하는 포탈도 열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알케이네스에서 고립될 걱정은 하나도 하지 않는 도현과 에포르였다.
* * *
“황제를 신격화하는 제국이란 곳이 이런 느낌이군.”
도현은 결국 알케이네스 제국 차원으로 넘어오는데 성공했다.
다만 도현이 도착한 곳은 알케이네스 제국의 황도 인근의 위성 도시.
황제가 있는 황도엔 차원 회랑을 열지 못하는 것이 제국의 법이라 했다.
차원 회랑은 다른 차원과의 소통 통로이기도 하지만, 침략의 통로이기도 하기에, 황도에 차원 회랑을 열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황도의 위성 도시 중에 한 곳에 도착한 도현은 곧바로 콩토올 공작가의 영지로 가려 했다.
하지만 제국의 장거리 텔레포트를 이용하려면 귀족의 보증이 필요했다.
텔레포트를 이용하지 않고 걸어서 이동하는 것은 너무 멀고 험한 길.
어쩔 수 없이 도현은 위성도시에 머물며 귀족들과여 연줄을 쌓으며 제국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알케이네스 제국은 묘한 곳이었다.
황족과 귀족, 평민과 노예.
이 네 계급이 극명하게 구별되며, 계급의 이동은 없었다.
“이건 뭐 엄청나게 강화된 카스트 제도 같다니까.”
- 그 인도의 계급제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게 유지되는 이유가 뭔지 알아?”
- 그야······. 내세 아닙니까. 다음 생에는 나도 높은 계급으로 태어날 수 있다고 믿는.
“바로 그거지. 그런데 여기도 마찬가지야. 신의 은총이 쌓이고 쌓이면 결국 자신도 황족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이 노예들조차 현생의 삶을 충실하게 살게 만들지.”
가축 대우를 받으며 때로는 도살되어 식탁에 오르는 노예들.
그런데 그 노예들조차 자신들의 삶을 수긍하며,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려 한다.
이유는 오직 다음 생에서 더 높은 계급으로 태어나기 위해서.
“황제는 신이고, 귀족들은 그 황제의 대리인이라니. 게다가 그들을 받드는 것이 내세를 위한 축복을 쌓는 길이란 생각에 한 치의 의심도 없어. 그렇게 평생을 살다 가는 거야.”
- 그래도 다음 생에는 정말로 평민이 귀족이 되고, 귀족이 황족이 될 수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게 말이 되냐? 축복을 내리는 주체가 황제라면 황제가 누구에게 축복을 내리겠어? 당연히 혈족이 우선이고, 다음이 귀족이겠지.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다시 태어나도 계급이 올라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지.”
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 그래서 제국의 계급 시스템에 반대하는 이들도 간혹 나오긴 하는 모양이던데요?
그런 경우가 아주 없지는 않은지, 간혹 제국의 반역자니 뭐니 해서 처형이 이루어지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마을 하나나, 도시 하나 정도를 통으로 지워 버리는 방식이라는데 대부분의 제국민들은 그것조차 당연한 처리 방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여간 이상해.”
- 로드,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서 귀족의 보증서를 얻어야 합니다.
“그거야 어렵지 않은 일이지. 벌써 소문이 돌고 있잖아.”
포일로 종족의 쟈이코라는 차원 상인이 젊음의 비약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
쟈이코가 그 젊음의 비약을 살 사람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는 이곳 위성 도시 전체에 아름아름 퍼져 나가고 있었다.
사실상 구매력을 가진 이들은 귀족으로 제한되지만 그럼에도 젊음의 비약에 대한 소문은 위성 도시 전체로 퍼져 나가는 중이었다.
그렇게 소문을 내면서 도현이 차원 상인 길드에서 제공한 숙소에 머물기를 며칠.
드디어 도현을 찾아온 이가 있었다.
“네네. 그 귀족분께서 저를 직접 보자고 하셨다고요?”
포일로 종족의 모습을 한 탓에 짧은 팔 때문에 두 손을 가슴 앞에서 간신히 마주 잡아 비비는 도현.
그의 앞에는 멋들어진 연미복의 심부름꾼 하나가 서 있었다.
갈색의 뿔이 뒤통수까지 가지런하고, 같은 색의 머리카락도 기름을 칠해서 뿔과 함께 정리한 중년의 신사였다.
그는 자신을 모 자작의 시종장이라 소개했다.
다만 모시는 분의 이름을 직접 알리지 못하는 것은 거래를 비밀로 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했다.
“네네. 그런데 거래 내용에 텔레포트 이용에 대한 보증이 들어 있는데, 신분을 밝히지 않으신다면 그게 어렵지 않겠습니까?”
도현은 비밀 거래를 원한다는 시종장의 말에 그렇게 물었다.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다. 텔레포트 이용 보증에 대한 서류는 그리 귀한 것이 아니다. 우리 가주님께는 그저 손짓 한 번으로 취할 수 있는 것에 지나지 않지.”
“네네. 제국의 귀족이시니 당연하겠지요. 하지만 그것을 소인에게 하사하시는 것은 또 다르지 않겠습니까?”
“걱정하지 말라니까. 감히 우리 가주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이냐?”
“네네, 그건 아닙니다만, 그래도 거래는 확실해야 하는 법이라······.”
숙소로 직접 찾아온 귀족가의 시종장.
그런데 텔레포트 이용권과 물건 값만 치르고 젊음의 비약을 가지고 가면 될 일을, 귀족이 직접 만나자고 한다.
그것이 비밀스럽게.
“시끄럽다. 너는 그저 따라 나서기만 하면 될 일이다.”
도현이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시종장이 버락 화를 냈다.
그를 따라 나서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말하며 도현의 움직임을 재촉했다.
“네네, 하지만······.”
“서둘러라! 가주님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다.”
다시 망설이는 도현을 재촉하는 시종장.
도현은 잠시 고민하다가 시종장을 따라 나서 보기로 했다.
알케이네스의 귀족들은 워낙 선민 사상이 강했다.
그러니 다른 차원의 상인인 도현을 이리 대하는 것도 어찌보면 특별한 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
‘뭐, 나를 상대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면, 그것도 재미있는 경험이 될 거고.’
여차하면 엎어버릴 생각도 있었다.
한 번 해 보니 알케이네스 차원으로 넘어 오는 일이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이제는 도현이 은밀한 곳에 골드 포탈의 좌표를 설정해 놓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해 두면, 지구로 갔다가도 언제든 부담 없이 다시 알케이네스로 올 수도 있으니.
“네네, 알겠습니다. 고객께서 원하신다는데 상인된 몸이 어찌 버티겠습니까. 따라 가겠습니다.”
도현은 이름 모를 귀족의 초대에 응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