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차원 회랑이 완성되었습니다
86. 차원 회랑이 완성되었습니다
전 세계는 혼란에 빠졌다.
알케이네스 차원과의 전쟁이 끝날 거라는 이야기가 퍼진 것은 이미 오래 되었다.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하면 차원 전장으로 들어갔던 적합자들이 각성자가 되어 돌아올 거란 이야기도.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 되었을 때, 그 파장은 만만치 않았다.
일반인들과는 다른 각성자들.
전투 요원이 아닌 생산직에 있던 이들이라도 평범한 사람들과는 격이 달랐다.
이전에는 대부분 사회적 약자였던 이들.
국가 보조금을 받기 위해서 자원해서 뉴어스로 들어간 이들은 그나마 나았다.
어떤 나라에서는 억지로 적합자를 끌어 모아서 뉴어스에 밀어 넣었다.
그것이 뉴어스에서 자국의 세력을 키우는 최선을 방법이라 생각했던 나라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억지로 밀어 넣었던 이들이 초인이 되어 나왔으니.
“난리도 아니네. 헌터들 때문에 몸살을 앓는 나라가 많아.”
최성수가 고개를 흔들며 테블릿의 전원을 끄고 탁자에 내려 놓았다.
“자업자득 아니겠습니까. 우리나라는 별 문제 없이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던데요?”
“하지만 문제가 없는 건 아니지. 생산직이 아니면 헌터들을 쓸 곳이 그리 많지 않으니까.”
“에이, 무슨 말씀이세요. 아직도 차원균열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데요.”
차원벽이 허물어지며 다른 차원이 지구에 융합되는 현상 혹은 다른 차원의 몬스터가 넘어오는 현상.
이제 그런 현상을 두고 일반적으로 차원균열이라 부르고 있었다.
“그것도 타이탄 오너들이 늘어나면서 어느 정도 안정이 된 상태였지. 그런데 귀환한 헌터들이 그 시장에 끼어들었으니······.”
“그래도 충분히 나눠먹을 여유는 있을 텐데요? 거기다가 헌터들을 고용하려는 기업들도 많고요.”
“그래서 우리 유성도 협력 길드 하나를 세워야 할 것 같은데 말이다.”
“거기 제 이름을 올리실 생각은 아니시죠?”
최성수의 말에 도현이 살짝 부담이 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네가 맡아주면 좋겠지. 하지만 그럴 수는 없겠지?”
“하하하. 제가 유성 그룹의 아들이란 것만으로도 충분히 뒷배가 될 겁니다. 그런데 공식적으로 길드를 이끌고 협력 관계를 공표하면 좀······.”
도현은 지구 인류의 헌터들 중에서도 규격 외의 존재였다.
그런 도현이 공식적으로 유성을 옹호하고 나선다면, 그건 많이 과한 결과를 만들 것이다.
유성의 독주 혹은 폭주를 누가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저는 빼 주세요. 아시잖아요. 제가 크라운의 길드 마스터이기도 하지만, 가디언의 심판자이기도 하다는 거요.”
“안다. 그래서 강제로 권하진 않는 거다.”
“네, 저는 헌터 전체를 대표하고, 그들을 보호해야 할 입장이니까요. 그래서 다른 국가나 단체의 헌터들과 싸우며 유성의 편을 들기는 어려워요.”
“그래도 빌런들이 날뛰는 건 막아주겠지?”
빌런.
최성수가 말하는 빌런은 헌터 중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을 뜻했다.
“당연하죠. 초인이 되었다고 해서, 헌터가 우월한 것은 아니죠. 이종격투기를 잘하거나 특수부대 병사라고 해서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것처럼요. 그저 초능이 생긴 것 뿐인데요. 뭐, 당연히 뛰어난 이종격투기 선수나 특수부대원이 그만한 대우를 받는 것처럼 헌터들도 받을 건 받아야겠지만요.”
“그래, 요즘이야 헌터 몸값이 금값이지. 너도나도 헌터를 고용하려고 안달들이니까.”
“차원균열도 여전하고, 이제 곧 차원 회랑이 열리면 다른 차원과의 교류도 시작될 테니까요.”
도현은 그렇게 말하며 때가 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지구에 있던 모든 포탈이 사라졌다.
골드 포탈은 물론이고 그레이 포탈 역시 차원 전장의 소멸과 함께 모습을 감춘 것이다.
그것이 벌써 보름 가까이 지났다.
그런데 아직 차원 회랑이 열렸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혹시 차원 회랑을 누가 숨겨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만.”
그 때, 도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했는지 최성수가 은근한 목소리로 차원 회랑 은폐설을 꺼냈다.
지구의 모든 포탈이 사라진 직후, 다른 차원과의 교류가 가능한 차원 회랑이 등장할 거라는 예상에 모든 사람들이 바짝 긴장했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록 차원 회랑이 등장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게 되자, 음모론자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누군가, 혹은 특정 국가나 단체가 차원 회랑을 발견하고 은폐했다는 것이다.
“그럴 일은 없습니다. 아시잖습니까.”
하지만 도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차원 회랑이 열렸다면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하이마 드리아드의 신목은 그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하이마 신목은 차원 용병이 차원을 넘어온 것도 금방 알아차린 전례가 있었다.
그만큼 차원 이동에 대해서는 탁월한 탐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에일리, 괜찮더구나.”
“네?”
갑자기 주제를 벗어난 엉뚱한 말.
도현은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고 최성수를 쳐다봤다.
“그, 너 정도 되면 수명도 무척 길어졌겠지?”
최성수가 조금 망설이는 기색으로 물었다.
“그야 우리 가족들도 마찬가지죠. 매일 마력수를 드시고 계시잖아요.”
“그래, 그건 그렇다만. 아무튼 네가 수명이 길어졌다면 거기에 맞는 배필이 필요하지 않겠느냐?”
“배필······이요? 아, 설마 제 결혼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이제 대충 알케이네슨가 하는 곳의 침략도 마무리가 되었으니, 너도 가정을 꾸릴 생각을······.”
“아버지, 다 좋은데, 설마 하이마 드리아드의 에일리를 제 짝으로 고려하시는 겁니까?”
“안 될 건 뭐냐? 예쁘고 능력있고, 너를 잘 따른다면서?”
“일족의 은인으로 저를 따르고 섬기는 거죠. 그거하고 이성적인 호감은 다른 문제라고요. 게다가 하이마 드리아드 종족은 그 근본이 신목에서 태어난 초목이거든요? 설마 저보고 평생 나무를 키우면서 살라는 말씀은 아니시죠?”
“그 에일리란 아가씨하고 손자 손녀는 안 되는 거냐?”
“아버지!”
“끙, 안 되는 거면 말고. 그럼 귀환한 헌터들 중에서 괜찮은 아가씨는 없더냐?”
“······.”
“에잉, 모자란 놈 같으니라고.”
“가 보겠습니다. 바쁜 일이 있어서······.”
“갑자기?”
“······.”
- 로드! 이 에포르 왕비······.
‘조용!’
- 넵, 로드.
* * *
잠깐 예기치 않은 결혼 이야기로 평정심이 흔들리긴 했지만, 그 데미지 또한 바쁜 일상에 녹아 사라져갔다.
그러던 중, 차원 전장의 승리가 선언되고부터 꼭 45일이 되던 날.
헌터들이 지구로 돌아오고 45일째, 한국 시간으로 정각.
도현이 오전 일과를 끝내고 사무실 의자에서 기지개를 켜고 있을 때였다.
스르르르르륵! 스르르르륵!
창가에 올려놓은 화분들 중에 두 개에서 고무나무와 행운목이 크게 부풀어 오르며 에일리와 윌로우트의 모습을 만들었다.
“음? 무슨 일이지?”
도현이 그 기척을 느끼고 그들을 맞이했다.
에일리와 윌로우트의 모습을 한 나무들은 창틀에서 그대로 사무실 바닥으로 내려와 도현을 바라보았다.
“차원 회랑이 열렸습니다.”
에일리가 도현을 보며 말했다.
“그래? 나는 못 느꼈는데?”
“아직 정식으로 활성화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열린 게 아니잖아.”
“표현이 잘못된 모양입니다. 알케이네스 차원에서부터 지구를 연결하는 차원 회랑이 완성되었습니다.”
“음? 알케이네스? 왜 하필······.”
“아, 아니구나. 알케이네스가 우리 지구의 좌표를 확보해서 차원 침략을 했었지? 그래서 차원 전장이 생겼던 거고. 그래서 두 차원 사이의 차원 회랑은 원래 만들어지게 되어 있었던 거였지.”
“네, 차원 침략을 시도한 곳이나 침략을 받은 곳은 서로 차원이 연결된 상태라고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침략을 물리치고 승리했으니 그 차원 회랑에 대한 권리를 우리가 가지게 되는 거겠지?”
그것이 차원 전장을 만들고 서로 싸운 이유였다.
누가 이기든 차원 회랑이 개통되어 마음대로 오갈 수 있었다면 굳이 차원 전장을 만들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뚫려 있는 차원 회랑이라면 점령군을 자유롭게 보낼 수 있다.
그렇다면 차원 전장에서 패하더라도 알케이네스 제국은 지구로 막대한 군사를 보낼 수 있게 되니 차원 전장을 만들고 승패를 가른 의미가 없는 것이다.
차원 전장의 승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차원 회랑의 소유권이라고 할 것이다.
“당연히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럼 당연히 알케이네스와 연결된 차원 회랑의 통행을 금지해야지. 그 놈들과 교류를 할 생각은 없으니까.”
도현의 생각은 분명했다.
어떤 형태로든 알케이네스 놈들이 지구에 발을 디디지 못하게 한다는 것.
“그런데 거기에 좀 문제가 생길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번에 생긴 차원 회랑이 조금 이상합니다.”
도현의 생각은 분명했지만 상황은 녹록치 않은 모양이었다.
에일리와 윌로우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문제가 뭔데?”
“차원 회랑을 이용할 수 있는 포인트, 기억나십니까?”
윌로우트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차원 전장의 승리 보상으로 준다고 했던 그거 말이지?”
“네.”
“하지만 그거 지구로 귀환하면 동시에 지급한다고 했으면서 지금까지 조용하던데?”
도현은 누가 뭐래도 자신이 가장 많은 포인트를 받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지구로 귀환했음에도 차원 전장의 승리 보상이라는 포인트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헌터들이 이상하게 여기는 중이었다.
“그 포인트가 이번에 생긴 차원 회랑을 열고 사용할 수 있는 자원입니다.”
“응?”
“조금 전에 차원 회랑이 완성되었으니 이제 마음만 먹으면 알케이네스와 연결된 차원 회랑을 열 수 있다는 이야깁니다.”
“그걸 개인이 한다고?”
“전장의 승리 보상이 있다면 그 점수에 맞춰서 회랑의 규모를 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점수가 많으면 더 크고 넓은 차원 회랑을 열 수 있다는 이야기지?”
“네.”
“하지만 차원 회랑을 열고 유지하는 데에나, 차원 회랑을 통과해서 알케이네스로 가는 것 모두 포인트를 소모합니다.”
에일리와 윌로우트가 번갈아가며 대답했다.
“잠깐, 그러니까 알케이네스로 통하는 차원 회랑을 연다고 생각하면······. 아, 이렇게 크기를 정할 수가 있는 거구나? 이용할 인원도 정하고, 가지고 갈 물품들도 설정하기에 따라서 포인트가 달라지는 거군?”
도현이 알케이네스와 통하는 차원 전장을 떠올리자 곧바로 그러한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차원 전장의 승리 보상으로 들어온 포인트는 도현의 기대를 뛰어 넘고 있었다.
“와, 내 포인트를 전부 사용하면 대략 뉴어스에 있었던 헌터들과 타이탄 전부를 다섯 번은 알케이네스로 보낼 수 있겠다.”
“네? 뭐라고요?”
“그게 정말이십니까?”
도현의 말에 에일리와 윌로우트가 깜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그래, 그러네. 대충 잡아서 헌터 5백만과 타이탄 1만 정도에 보급품 꽉꽉 눌러 담아서 다섯 번. 아, 왕복 아니야. 편도로 다섯 번이야.”
“그,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도대체 포인트를 얼마나 받으셨기에 그런 엄청난······.”
“윌로우트, 우리에겐 잘 된 일이잖아. 조용히 좀 해.”
“아, 네. 에일리님.”
충격에서 먼저 빠져나온 것은 에일리였다.
도현은 그녀가 뭔가 할 말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눈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