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이게 꿀을 빤다고 하는 거지
79. 이게 꿀을 빤다고 하는 거지
벽 전체가 투명한 마법 역장이라 제국의 황도가 훤히 내다보이는 곳.
툼코베드 알케인 라 헤이거스, 알케이네스 제국의 황제는 창문 쪽으로 의자를 놓고 앉아 있었다.
그의 등 뒤에는 황제의 비서 역할을 하는 시종장이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 상태로 서 있었다.
“제국의 원정이 실패했다?”
황제가 무심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망극하옵니다.”
시종장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차원 전장에서 후퇴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건가?”
“이미 미개종족이 9구역의 점령을 시작했다 하옵니다.”
“그것이 이유가 되던가?”
차원 전장에서 패하게 되면 그 전장을 만들고 유지한 모든 자원을 패배한 쪽에서 지불해야 한다.
지금 시종장이 황제에게 바라는 것은 그러한 손해를 줄이기 위해서 차원 전장에서 빠르게 퇴각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황제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제국의 군대라면 최후의 하나가 남을 때까지 싸워야 할 것이다.
그것이 명예로운 일이 아닌가.
그런데 고작 얼마간의 자원 손해가 아까워서 불명예스러운 퇴각을 청한다고?
“짐의 군대가 차원 전장에서 퇴각을 한다고? 짐이 그런 군대의 주인이라 기록되란 말인가? 그 불명예스러운 군대가 짐의 군대란 기록을?”
황제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듯 했다.
하지만 황제의 뒤통수에 있는 뿔의 끝에 새빨간 변색이 생긴 것을 시종장은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황제가 분노를 품었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하지만 시종장은 황제에게 귀족들의 뜻을 전할 의무가 있었다.
그것 역시 시종장의 책무였다.
“미개종이 의도적으로 차원 전장의 승패 결착을 내지 않고 있습니다. 귀족들은 그런 상황에 끌려 다니는 것이 도리어 치욕이라고 결론을 내었습니다.”
“미개종에게 이용당하는 상황이 더 치욕적이다?”
“그러하옵니다.”
“그들에겐 그렇겠지. 그들은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않을 터이니.”
“······.”
“그들에게 이르라. 이번 원정을 귀족회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을 허락하겠다고.”
“폐, 폐하!”
시종장은 황제의 말에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제국이 다른 차원과 군사, 외교적인 문제를 황제가 아닌 귀족의 이름으로 하는 경우는 없다.
식민 차원으로 바뀐 후에는 귀족들에게 맡겨 돌보게 하기는 해도, 그 전에는 오롯이 황제의 이름으로 외교나 군사 행위가 진행된다.
그런데 어떻게 식민지 건설을 위한 원정을 귀족들의 이름으로 한단 말인가.
아무리 실패한 원정이라도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번 원정에 짐은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귀족회의에서 진행한 것이지. 그렇지 않은가?”
“그건 그러하옵니다.”
“그런데 그 실패로 어찌 짐의 이름을 더럽히려 한단 말인가? 용납할 수 없다.”
“그러하면 어찌······.”
“그들이 감히 나의 이름을 쓰고 싶다면 원정군을 끝까지 명예로워야 할 것이며, 귀족들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
시종장은 황제의 말에 깊이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그런 행동에 비해 머릿속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황제가 원정의 모든 것을 귀족들에게 허락했다.
황제는 그 책임에서 한 걸음 물러난 것이다.
이렇게 되면 황제가 귀족들에게 밀린 것처럼 보인다.
감히 귀족들이 황제의 영역에 발을 디딘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 결과는 귀족들의 최초 차원 원정이 완벽한 실패로 끝난 것으로 기록될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반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내 이름을 더럽힐 수는 없으니.”
황제가 다시 중얼거렸다.
시종장은 그 의미를 이해했다.
끝까지 차원 전장의 싸움에 최선을 다하란 이야기다.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인적 물적 지원을 하라는 것.
여기서 물적 지원도 중요하지만 인적 지원이 핵심일 것이다.
일반 병사들이야 문제가 될 것이 없겠지만, 지휘관은 모두가 귀족들의 혈족에서 나온다.
언제 끝날지 모를 패배한 싸움에 혈족을 계속해서 밀어 넣어야 한다는 것.
아니, 어쩌면 생각을 잘못한 것일 수도 있다.
시종장은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차원 전장에 쏟아 부어야 할 지원이 문제가 아니다.
차원 전장이 계속 유지되는 동안 상대편의 미개종이 얼마나 많은 이득을 취할까.
그리고 결국 차원 전장이 닫혔을 때, 그 모든 손해를 누가 감당하게 될까.
볼 것도 없이 귀족들이다.
황제는 원정에 패하였지만 고귀하고 명예로운 군대를 가지고 있었음을 기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귀족들은 원정의 실패에 따른 책임을 나눠 가지게 됨과 동시에 엄청난 재산상의 손해를 입게 될 것이고.
‘귀족들의 몰락.’
시종장은 황제가 원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것은 귀족들이 황제의 뜻을 받아들여 원정에 자신들의 이름을 올려도 다르지 않다.
실패한 원정의 입안과 진행에 대한 책임을 피하지 못할 것이니, 당연히 명예의 실추와 함께 재산상의 손해도 보게 될 것이다.
“가서 짐의 뜻을 전하라!”
생각에 잠긴 시종장의 귀에 황제의 명령이 떨어졌다.
시종장은 곧바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귀족 회의가 열리는 곳으로 향했다.
* * *
뉴어스의 9구역 거점 중의 한 곳.
때마침 거점 하나를 점령하고 거점의 상징을 확보한 도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 일이네.”
- 그렇습니다. 왜 아직도 버티고 있는 것일까요?
도현의 중얼거림에 에포르 병사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그 말을 받았다.
“9구역의 거점을 하나 점령할 때마다 엄청난 차원 에너지를 얻을 수 있지.”
- 그 뿐만이 아니라 거점마다 엄청난 자원이 쌓여 있습니다. 광물에서부터 식물, 동물, 고등급의 마력석까지 말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니지. 크라운 시티를 생각하면 이건 도를 넘고 있어.”
- 아, 어쩌면 그게 더 큰 문제일 수도 있겠습니다.
크라운 시를 언급하는 도현의 말에 에포르는 무릎이라도 칠 것 같은 표정으로 동감을 나타냈다.
“크라운 시티가 성장할수록 더 많은 기술과 지식이 쌓여. 각 공방이나 마탑, 대장간, 연금술 상점은 말할 것도 없고, 하물며 노점 음식점까지 엄청난 비기를 쏟아내고 있단 말이지.”
그 모든 것의 중심은 NPC다.
차원 전장의 시스템이 만들어낸 허상들.
그 허상들이 갖가지 유용한 기술과 정보와 지식을 쏟아내는 것이다.
- 덕분에 로드의 일곱 성이 크게 부흥하고 있지 않습니까.
에포르는 기뻐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로드인 도현의 근간은 군왕성을 포함한 일곱 개의 성이다.
그런데 그런 성을 업그레이드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특히 크라운 시티의 발전은 황금의 성이나 탑의 성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크라운 시티의 마탑과 마법 상점들이 어느 순간부터 탑의 성을 앞질렀다.
그리고 그 앞선 마법적인 요소들을 도현은 탑의 성에 이식했다.
탑의 성보다 뛰어난 마법적인 것들은 곧 특수 아이템으로 인식되어 탑의 성 점유율을 높이는데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연금술이나 여러 공방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그곳의 기술이나 수준이 황금의 성을 앞선 순간부터 특수 아이템들이 쏟아졌다.
거기에 하이마 드리아드를 통해서 숲의 성이 업그레이드 되었고, 산성병사에서 영감을 받아 개선된 고브니 일족의 타이탄이 나중에는 거꾸로 산성병사를 강화시켰다.
그렇게 숲의 성과 탑의 성, 황금의 성이 빠르게 점유율을 높였다.
상대적으로 어둠의 성과 빛의 성은 점유율을 높이는 것이 어려웠지만 그 역시 다른 성에 균형을 맞춰 주겠다는 듯이 시스템 상점과 거점 점령의 보상에서 특수 아이템들이 풍성하게 쏟아졌다.
그 결과, 점유율이 74.8%인 군왕성을 제외한 다른 여섯 개의 성은 얼마 전에 점유율 100%를 모두 달성했다.
“하지만 점유율 100%가 끝이 아니지. 점유율 100%는 그저 성을 현실에 구현할 수 있게 하는 최소 기준일 뿐이었어.”
- 그건 그렇습니다. 실제론 그렇게 성을 구현하고, 그 성을 다시 성장시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그리고 그 면에서는 크라운 시티의 성장이 엄청난 도움이 되었고 말입니다.
“그래. 크라운 시티를 통해서 내 성들의 내실을 채울 수 있었지. 그런 걸 생각하면 이곳 차원 전장은 정말 엄청나게 혜자스러운 곳이란 말이지.”
- 그건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게 좀 과하지 않아? 생각해보면 선을 좀 많이 넘은 거 같단 말이지.”
- 얼마 전까진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저도 좀 이상하긴 합니다. 알케이네스 놈들은 이 싸움에서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에포르 병사가 설마 하는 표정으로 도현을 바라보았다.
“놈들은 차원 에너지를 거의 확보하지 못하고 있어. 우리가 얻는 차원 에너지에 비하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지. 그런 상황이면 차원 회랑을 넘어 오는 순간, 일반인 수준이 될 텐데, 싸움을 어떻게 이겨?”
지금 뉴어스의 헌터들은 차원 회랑을 넘어 알케이네스 쪽으로 넘어가도 능력 페널티가 거의 없다.
지구와 알케이네스가 확보한 차원 에너지의 총량 차이가 너무 크다보니 차원 회랑 금제의 수평저울이 확 기울어 버린 것이다.
그러니 알케이네스가 아무리 날뛰어도 뉴어스를 공격할 수는 없다.
차원 회랑의 금제는 절대적이니까.
- 하지만 아직까지 차원 전장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병사를 충원하고 있잖아요.
“그래, 그게 이상하긴 하지.”
이제는 4구의 도시도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알케이네스였다.
몇 개의 도시가 남아 있는 것은 차원 전장을 최대한 유지하려는 도현의 계획에 따라서 공격을 멈췄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끝없이 병사들을 밀어 넣는 알케이네스.
거기에 골드 헌터에 해당하는 지휘관도 최대한 채워 넣고 있었다.
알케이네스 제국 황제의 명령과 귀족들의 선택을 알 수 없는 도현으로선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뭔가 수작을 부리고 있을 텐데, 그걸 전혀 알 수가 없단 말이지.”
- 알케이네스 도시로 잠입한 정보부 헌터들도 특별한 건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말이 안 되잖아. 그냥 병사들을 죽으라고 밀어 넣으며 시간만 끌다니.”
- 그건 그렇습니다. 로드나 지구의 헌터들에겐 더 없이 좋은 상황이긴 합니다만.
“너무 좋아서 문제지. 알케이네스 놈들도 이걸 모르지 않을 텐데 말이야.”
- ······.
“그래도 뭐, 넘치는 혜택을 버릴 수는 없지. 최대한 뽑아 먹을 수 있을 때, 뽑아 먹어야지.”
- 그건 그렇습니다. 로드.
“그런데 우리 말이야.”
- 네, 로드.
“10구역까지 갈 수 있을까?”
- 아무래도 로드 혼자서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지. 내 역량으론 딱 9구역이 한곈데 말이지.”
- 10구역을 도모하시려면 아무래도 다른 헌터들의 성장을 기다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음, 아쉬워서 그러지.”
- 군왕성의 점유율이 조금 더 높아진다면 혹시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군왕성 점유율을 높일 수 있는 특수 아이템이 좀처럼 안 보이는 것도 문제고, 나와도 쓸모가 없지.”
도현의 군왕성 점유율이 74.8%에서 멈춰 있는 이유는 그 이상으로 점유율을 높일 수 있는 특수 아이템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 점유율을 높일 수 있는 특수 아이템에 한계가 생겼다.
몇 %까지는 쓸 수 있지만 그 이상엔 쓸 수 없는 제약이 붙은 것이다.
도현은 군왕성의 점유율 75% 이상에 쓸 수 있는 아이템을 지금까지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거 75%가 넘으면 호위 기사들이나 산성부대의 지휘관에 변화가 생길 거 같은데 말이지.”
- 저도 그렇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마스터 최상급의 전력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거기에 다른 성들도 변화가 생기겠지. 탑의 성을 통해서 쓸 수 있는 마법의 종류나 위력도 강해질 수 있고.”
도현은 뭔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당장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에 집착해서 좋을 건 없겠지. 일단 돌아가자. 가서 이곳 거점 개발에 대해서 의논을 해 봐야지.”
- 또 난리가 나겠습니다. 이번 거점은 마력석은 아니어도 여러 종류의 고급 광물이 나오는 곳이니 말입니다.
“작업용 타이탄이 부족하다고 난리가 나겠네.”
- 그러게 말입니다.
“어쩔 수 없이 지구에서 수입을 해 와야 하나?”
- 생산성만 따지자면 지구가 월등하긴 한 거 같습니다. 타이탄 생산이 거의 자동차 생산에 버금갈 정도라는 말까지 있습니다.
“작업용은 만들기도 쉬우니까.”
- 타이탄 기사(技士)가 오히려 부족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마력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타이탄을 통제할 수 있으니까 어쩔 수 없지.”
- 이번에 지구에 가시면 할 일이 많으시겠습니다. 로드의 아버지께서는 샘물이끼를 이용한 마력수 생산량을 늘리고 싶어 하시는 것 같던데 말입니다.
샘물이끼는 마력을 주입하면 물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마력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과도하게 주입되면 마력이 깃든 물, 마력수를 만든다.
그리고 그 마력수를 장복하면 마력을 다룰 수 있는 몸이 된다.
그 때문에 타이탄의 등장 이후에 마력수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었고, 당연히 은근히 들어오는 압박도 많아졌다.
“하아, 뉴어스에서도 지구에서도 조용히 쉴 곳이 없는 거 같다. 그냥 이렇게 거점 점령이나 하러 다니는 게 속 편하고 좋은 거 같아.”
- 힘 내십시오. 로드. 그래도 수련을 통해서 마력을 각성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으니 마력수 생산에 매달리지 않아도 될 핑계는 있지 않습니까.
“끄응, 일이 많아. 일이.”
도현은 앓는 소리를 내며 투덜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