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하아, 참 쉽게 등을 돌리네
73. 하아, 참 쉽게 등을 돌리네
결사 항전을 외치며 끝까지 저항한 사령관.
하지만 그 성과는 너무도 미미했다.
고작 산성병사 천인장 하나도 상대하지 못할 실력이었으니 결사 항전이고 뭐고, 바람 앞의 촛불처럼 맥없이 꺼질 뿐이다.
“알 수가 없군.”
도현은 죽은 사령관의 뿔을 챙기며 중얼거렸다.
알케이네스의 일반 병사들은 뿔에 특별한 힘이 없다.
하지만 귀족의 피를 이은 알케이네스 종족의 뿔에는 특별한 힘이 담겨 있었다.
【알케이네스 차원의 준남작급 뿔을 획득했습니다.】
【알케이네스 차원인에 대한 지배력이 미미하게 상승합니다.】
【남작급 이하의 알케이네스 차원인은 당신을 두려워합니다.】
【당신은 알케이네스 차원인과 적대 관계입니다. 순종적인 복종은 끌어내기 어렵습니다.】
“역시 급이 있는 놈의 뿔을 얻어야 지배력이 상승하는 거였군.”
도현은 사령관의 뿔이 흐릿한 아지랑이처럼 변해서 손으로 흡수되는 것을 보며 중얼거렸다.
뿔이 자연스럽게 흡수되면서 지배력이 상승했다.
이것은 알케이네스 귀족의 뿔을 그 이외의 용도로는 활용할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다.
적어도 차원 전장의 시스템이 작용하는 곳에서는.
“그래도 지배력이 올라가다보면 두려움을 넘어서 복종하는 경우도 생기겠지.”
지금은 알케이네스 병사들도 도현을 두려워하는 표정은 지어도 항복하거나 도망치는 정도는 아니다.
그저 굉장히 두려워 하면서도 창을 내지르는 모습이라고 할까.
하지만 이렇게 지배력을 올리다보면 어느 순간 두려움 때문에 저항할 의지조차 사라지는 때가 올 것이다.
“두려움에 저항을 포기하는 놈들이 나오면, 그런 놈들을 복종시키는 것도 가능하겠지. 지금은 뭐 씨알도 안 먹히지만.”
몇 번이나 알케이네스 병사들을 생포해서 시험 해 본 결과였다.
두려움을 주긴 하지만 아직 저항 의지를 꺾을 수도 없고, 복종을 이끌어 내지도 못하는 수준이다.
“뭐, 어쨌거나 사령관 놈들이 이렇게 덤벼 주면 나야 좋은 거니까.”
도현은 미미하게나마 지배력이 올랐다는 사실에 기꺼워하며 도시의 심장석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심장석에 손을 접촉하고 심장석을 접수했다.
“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공격 측에서 도시의 심장을 접수하면 그 즉시 도시는 알케이네스 차원 전장에서 분리되어 뉴어스의 4구역과 연결 된다.
그런데 지금 최초로 그 예외가 생겼다.
【점령전이 진행중입니다.】
【도시가 공격받고 있습니다.】
【침입자를 물리치십시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 로드, 도시 상태를 확인해 보십시오.
당황하는 도현에게 에포르가 조언을 했다.
도현은 곧바로 도시의 심장석을 통해서 도시의 상태를 살폈다.
그러자 놀라운 상황이 드러났다.
“알케이네스 부대가 이 도시에 대해서 점령전을 선포했다고?”
길드끼리의 도시 점령전과 같은 경우였다.
여러 길드가 연합해서 하나의 길드 도시를 공격하는 것.
그런 경우 그 길드 도시는 점령전을 선포한 다른 도시들과 연결된다.
지금 도현이 점령한 도시를 향해서 그와 같은 점령전 선포가 성립되어 있었다.
“이거 내가 이 도시를 공격하는 사이에, 도시를 연합에서 탈퇴시키고, 점령전을 선포한 거네?”
-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 중에 로드께서 이 도시를 점령해서, 도시의 주인으로 방어하는 입장이 되어 버렸습니다.
“머리를 잘 썼네.”
- 지금 그렇게 적을 칭찬할 때가 아닙니다. 이렇게 점령전이 선포되면 로드께서는 심장석을 이용해서 중립 도시로 갈 수가 없습니다.
“어? 중립 도시로 못 간다고?”
- 그렇습니다. 동맹의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공성중인 상태에서 중립 도시로 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거······. 뭣 된 거 같은데?”
에포르의 말에 도현의 얼굴에서핏기가 사라졌다.
중립 도시로 가지 못한다면 지금 도현은 이 도시에 고립되어 있다는 이야기였다.
지금 도현은 갈 곳이 없었다.
“여기서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고?”
* * *
<급보, 가디언의 캐슬. 알케이네스 4구역 도시 공략 중 고립>
도시 공략 중에 알케이네스의 흉계에 빠져 홀로 고립된 마스터 캐슬.
가디언의 대변인은 다급하게 캐슬의 구원을 전 세계에 요청.
알케이네스 중립 도시의 수정 기둥을 이용하여 캐슬이 점령한 도시로 이동하면 방어에 참가할 수 있다는 것.
현 상황, 캐슬은 홀로 알케이네스 부대 전체와 싸우는 중.
긴급한 구원이 필요한 상황.
<다수의 길드, 캐슬의 구원에 난색>
차원 회랑의 금제를 고려하면 헌터들은 알케이네스 병사들의 상대가 되지 않는 실정.
이런 상황에서 캐슬을 구하기 위해 나서기는 어렵다는 입장.
<크라운 길드의 대변인, 알케이네스 수정 기둥을 길드 연합에서 통제한다고>
캐슬을 지원하기 위해 크라운 길드의 길드원들이 지원 물품을 가지고 이동하려 했으나, 길드 연합에서 접근을 금지시켰다.
크라운 길드의 전력은 매우 강력하고, 그들이 차원 전쟁에서 중요한 전력인 바, 캐슬을 구하기 위해서 의미 없이 희생되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 길드 연합의 명분.
크라운 길드, 수정 기둥을 끝까지 막는다면 전력을 다해서 길드 전쟁을 치를 것이라 밝혀.
<이대로 크라운과 길드 연합이 충돌하면 인류의 차원 전쟁 전력은 급감할 것>
여론은 반반.
캐슬을 구해야 한다, 안타깝지만 인류의 미래를 위해 피를 토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팽팽한 의견 대립, 그 사이에 크라운 길드의 최후 통첩 시한이 점차 다가오고 있다.
<캐슬은 여전히 도시를 지키며 분전하는 듯>
수정 기둥에는 여전히 캐슬이 도시의 주인으로 나타나.
홀로 알케이네스 전력 전체를 상대로 버티고 있는 듯.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캐슬을 구해야 한다는 여론이 힘을 얻는 듯.
<캐슬은 그저 버티고 있을 뿐, 함정일 수도>
어쩌면 알케이네스가 캐슬을 미끼로 인류의 헌터를 낚으려는 것일지도.
인류의 헌터 전력은 그 하나하나가 매우 소중한 것.
움직임에 최대한 신중해야 할 것.
헌터 캐슬의 고립.
그것은 길드들의 속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좋은 이슈가 되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길드들이 가디언과 캐슬에 대해서 적대적인 속내를 숨기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는 골드 헌터나 그레이 헌터를 가리지 않고,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와, 내가 해 준 게 얼만데, 이게 여론이라고?”
도현은 여론의 흐름을 살피며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의 편을 드는 길드는 열에 둘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각국을 대표하는 대부분의 길드들은 도현을 구하자는 의견에 반대했다.
그들의 의도는 도현을 제거하자는 것이 분명했다.
신중하자는 말로 포장하고 있기는 했지만, 크라운이 도현을 돕는 것조차 막아서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크라운이 전쟁 불사를 외치고 나서자, 그것은 곧 헌터 전력을 약화시키는 것이라며, 가디언의 근본정신에 위배된다고 떠들었다.
심지어는 수정 기둥을 통해서 응원 물자만 보내겠다는 것조차도 차일피일 미루며 수정 기둥의 통제를 풀지 않고 있었다.
“아주 개썅놈의 새끼들이라니까.”
- 그래도 로드의 편을 드는 길드가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은혜를 아는 놈들이면 이럴 수는 없지!”
- 로드, 나쁜 것만 보지 마시고, 좋은 쪽도······.
“이참에 아주 완전히 갈아 먹어야겠어.”
- 로드, 진정하시고······. 아니 그건 맞는 말씀입니다. 군왕성의 주인으로서 지구의 모든 헌터를 하나로 통합해서 명령권을 확보하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 겨우 알케이네스 놈들을 눌러 놨더니 이것들이 여유가 생겼다 이거지? 배가 불렀어. 배가.”
- 네, 로드. 확실한 본보기를 보여야 할 것입니다.
“알케이네스, 하이마, 고브니. 벌써 지구와 연결된 지성 종족의 차원이 셋이야. 앞으로는 더 늘어나겠지. 그런데 고작 차원 전쟁에서 승기를 잡았다고 나를 삶으려고 들어?”
- 그거, 토사구팽, 말씀하시는 거지요?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는다는 거지. 차원 전쟁의 승기를 잡았으니 이젠 거치적거리는 나를 치우겠다는 거지. 마침 기회가 딱 좋게 된 거고.”
- 멍청한 놈들입니다.
“그래, 멍청한 놈들이지.”
도현은 며칠 지켜보며 상황 파악을 대충 끝냈다.
이제는 받은 대로 갚아주면 될 일이다.
“뭐, 그건 그거고. 일단 크라운 길드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길드 시티로 돌아가게 해. 그 후 하위 길드를 통해서는 5구역과 6구역의 거점을 점령하고, 정예를 모아서는 7구역 거점 공략도 진행하는 걸로 하자.”
- 완전히 차원 회랑 너머 알케이네스 쪽엔 신경을 쓰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란 말씀이군요?
“당연히 다른 길드에 제공하던 소모품 지원도 중지하고.”
호구처럼 지원을 계속 유지할 생각은 전혀 없다.
없어져 봐야 아쉬움을 아는 법이다.
- 알케이네스의 중립 도시를 지키려면 쉽지 않겠군요. 그렇다고 거기서 후퇴했다가는 크게 욕을 먹겠고.
“어쩌면 크라운 길드의 지원이 없어서 중립 도시를 포기한다는 개소리를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크라운 길드가 철수할 때, 곧바로 발표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
- 지들끼리 충분히 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치도록 유도하면 되겠지요.
“그러면 더 좋겠지.”
- 네, 로드. 그리고 앞으로 세 달 정도는 더 있어야 할 테니, 느긋하게 즐기시지요.
“그래, 알케이네스 놈들도 이제는 힘이 많이 빠진 거 같으니까 위기 상황은 대충 넘긴 셈이지. 다행이네.”
- 중간에 위험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 지난 일이니까 웃을 수 있는 거지. 위기를 극복하고 살아 남았으니까.”
- 솔직히 저는 로드의 그 과감함이 걱정스럽습니다. 그냥 포탈을 이용해서 지구로 넘어가면 그만인데, 끝까지 이곳에서 전쟁을 치르시다니.
에포르 병사는 고개를 설설 흔들었다.
도시에 점령전 선포가 이루어지고 수정 기둥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을 때는 앞이 막막했다.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만 남았나 했던 것이다.
하지만 도현에게는 언제든 지구로 포탈을 열 수 있는 치트키 같은 능력이 있었다.
차원 회랑을 넘어서 알케이네스 차원 전장으로 왔음에도 불구하고 포탈을 열 수 있었던 것.
그러니 기발한 함정에 빠지긴 했지만 도현이 정말로 위험할 일은 없었다.
그대로 지구로 넘어간 다음에 다시 골드 게이트나 그레이 게이트를 통해 뉴어스로 입장하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뉴어스로 입장한 다음에 포탈을 열면?
그러면 알케이네스 쪽에 잡혔던 좌표도 뉴어스로 수정될 것이다.
그 개인 포탈 능력이 있으니 알케이네스 부대가 치밀하게 짠 함정도 단번에 의미가 없어졌다.
그럼에도 도현은 도시를 지키는 수성전을 벌였다.
정말 급하면 지구로 도망가면 그 뿐.
그러니 그 전에 알케이네스 부대의 전력을 최대한 깎아먹어 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문득 자신의 고립 상태를 알려서 지구와 뉴어스의 반응을 살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으로 씁쓸하게 나왔고.
- 그래도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되지 않았습니까.
“성을 현실 구현하면 100%에서도 조금씩 점유율이 높아진다는 거? 그건 정말 생각도 못했던 거지.”
도현은 도시를 지키기 위해서 산성을 현실에 구현했다.
즉 거대한 산성을 현실에 불러내어 도시 위에 겹쳐 버린 것이다. 그리고 산성의 병사들을 모두 소환해서 수성에 임했다.
현실에 구현된 산성은 원래 있던 도시에 적절하게 융합되어 원래부터 하나의 도시였던 것 같은 모습이었다.
- 현실에 구현된 성의 구성원들은, 평소 소환했을 때와는 달리 ‘진짜’처럼 보일 정도로 변한다는 것은 참으로 의외였습니다.
“그러게, 1세대 인공지능이 갑자기 3세대 인공지능으로 바뀐 거 같더라니까. 그래서 그런지 스스로 알아서 활동을 하고, 그만큼 성의 점유율이 상승하고.”
- 대신에 성이 훼손되면 점유율도 떨어지는 단점이 있지요.
“끙, 그건 좀.”
- 그래도 제대로 고치기만 하면 곧바로 복구가 되지 않았습니까. 하하하.
“웃음이 나오냐? 성벽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점유율이 한꺼번에 3%가 넘게 떨어질 때에는 정말 아찔 했는데?”
- ······.
“어쨌건 성을 현실에 구현하는 바람에 백일 동안은 그냥 버텨야 하는 상황이긴 한데, 조만간 점령전을 끝내면, 내가 여기 붙어 있을 이유도 없겠지.”
- 지금은 굳이 로드께서 성을 지키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구로 가셔서 게이트로 뉴어스에 들어가시는 것도 가능하지요.
“음, 여기 사정이 조금 더 안정되면 그 때, 그것도 생각해 보자.”
이제는 알케이네스 부대의 공격도 시들해진 상황.
이틀 전부터는 공격하는 흉내도 내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성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면 곧바로 점령전을 포기할 수도 있겠다 싶은 분위기였다.
“어째 알케이네스 놈들보다 지구하고 뉴어스 놈들 깔 게 더 기대가 될까?”
- 이 에포르, 로드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하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