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세계수의 씨앗에 호구가 잡힐 종족
65. 세계수의 씨앗에 호구가 잡힐 종족
호주,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주의 아가일 호수.
호수의 수면에 파동이 일며 흐릿한 아지랑이 커튼이 생겨났다.
그 아지랑이는 일렁거리는 흔들림 너머로 우거진 숲의 모습을 신기루처럼 비추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현상은 이즈음 지구상에서 자주 목격되는 것으로, 약해진 차원벽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늙은 제임스는 호숫가를 걷다가 그 모습을 발견하고 허둥거리며 집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이웃들이 모두 도시로 떠날 때, 끝까지 자신의 별장을 지키겠다며 남은 것을 후회했다.
이미 차원벽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저 안개 커튼이 허물어지면 그 안에서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지금껏 차원벽을 넘어온 몬스터가 인간에게 해롭지 않았던 예는 없었다.
“오오, 쉐엣!”
제임스는 자신의 픽업 트럭을 향해 죽어라 달렸다.
그나마 아내가 도시에 있는 집으로 먼저 가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되었다.
“하느님, 다시 메리를 볼 수 있기를······.”
평생을 함께 한 아내를 다시 볼 수 있기를 기도하며 제임스는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집 마당에 도착하기 전에, 호숫가의 차원벽이 허물어지며 엄청난 숫자의 몬스터가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다행히 제임스가 픽업 트럭을 몰고 호숫가를 떠날 때까지 그 몬스터들이 제임스를 쫓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메마른 곳이군. 호수가 있는데도 이렇게나 메마를 수가 있다니.”
하이마 드리아드 일족을 이끌고 지구에 오게 된 에일리는 주위를 둘러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너무나 짙어서 검은 색으로 보이는 눈동자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하이마 드리아드 일족의 지위는 머리카락과 눈동자의 색으로 차등을 두는데 짙을 색일수록 높은 위치에 있었다.
검은 색에 가까운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지닌 에일리는 하이마 드리아드 일족 전체에서도 서열 10위에 해당하는 신분이었다.
그런 그녀가 알케이네스 제국 통령의 명령에 따라서 지구로 넘어 오게 된 것이다.
“마력의 농도도 낮습니다.”
에일리 뒤를 지키는 윌로우트가 말을 보탰다.
“그래, 마족 놈들의 정보대로라면 이곳의 원주민은 원래 마력이나 오러를 쓰지 못했다지?”
“차원 전쟁이 시작된 후, 차원 전장에 들어간 이들에게만 겨우 그 힘이 허락되었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모자란 종족인 모양입니다.”
“아니! 마력을 쓰지 못한다고 모자라다 할 수는 없겠지. 원래 마력이 너무 희박했던 차원이라고 하니. 그런 혹독한 여건 속에서도 나름의 문명을 건설하고 발전했다고 했으니 오히려 칭찬해야 하지 않을까?”
에일리는 이곳 차원의 원주민을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
하이마 드리아드 일족은 기본적으로 상대를 존중하는 것에서 교류를 시작한다.
비록 자신들이 이곳의 침략자로 오게 되었을지라도 그런 태도를 버릴 수는 없었다.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마력 없이 이룩한 문명이 얼마나 구차할지 뻔히 보이는 것 같아서 안타까웠을 뿐입니다. 사실 마력 없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곳의 원주민이 어떤 문명을 만들었을지······.”
에일리의 호위이며 보좌관인 윌로우트는 정말로 호기심이 동하는지 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죽이고 멸해야 하는 임무를 가지고 이곳에 왔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겠지.”
이에 에일리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주의를 주었다.
전쟁의 침략자로 온 마당에 웃고 떠들며 즐거워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원해서 온 것은 아니지만, 고향에 있는 일족의 고통을 줄이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윌로우트도 잠깐 떠올랐던 밝은 표정이 사라지고 고뇌가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
“그래, 미안한 일이지만 우리 일족이 우선일 수밖에 없지.”
에일리는 그렇게 말하며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하기 싫지만 해야만 하는 상황.
여기엔 어떤 핑계도 있을 수 없었다.
자신들 하이마 드리아드 일족은 이곳 차원의 원주민에게 죄인일 뿐이다.
* * *
“저것이 이곳 원주민들의 문명?”
“모두가 인위적인 것들입니다.”
“저것은 뭐지? 난쟁이들의 기계와 비슷한데?”
에일리는 멀리 보이는 레이크 아가일 리조트에서 개미처럼 움직이는 차들의 정체를 궁금하게 여겼다.
“하지만 마력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마력 없이 저런 것을 만들다니 대단합니다.”
“집들도 특이하구나.”
“그보다 저 마을을 보십시오. 이곳 원주민들은 좁은 곳에 뭉쳐서 살기를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그렇구나. 하지만 모두 나약하기 짝이 없다. 저들은 우리 일족의 전사 하나도 막아내지 못해. 어쩌면 저렇기 때문에 뭉쳐 사는 것인지도 모르겠구나.”
“확실히 그렇습니다. 일족의 전사들이 다칠 일은 거의 없겠습니다. 이곳의 마력이 부족하긴 하지만, 저들을 상대하는 데에는 전혀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아가일 호수의 북쪽, 레이크 아가일 리조트가 보이는 산정에 올라 주위를 살피는 하이마 드리아드 일족.
윌로우트가 에일리에게 앞으로 벌어질 전투에 대한 밝은 전망을 내 놓았다.
하지만 그들은 이곳이 호주이며, 지구에서 인구 밀도가 낮기로 유명한 곳들 중에 한 곳임을 알지 못했다.
그저 척박하기 짝이 없는 땅에 무리를 지어 사는 인간들의 모습에 놀라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등장이 이미 지구 인류에게 알려져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저 까마득한 하늘 위에 수많은 눈들이 지상을 살피고 있음을 짐작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에일리님, 저것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그런 중에 문득 윌로우트가 뒤쪽의 일족이 들고 있는 상자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하아, 모르겠구나. 저것은 분명 이곳 원주민의 문명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아마도 차원 전장에 참여한 원주민 중에 하나가 키워 낸 것이겠지.”
“그렇긴 하겠지만 저희 차원에도 없는 것이 아닙니까. 저리 신기한 이끼와 포자라니요.”
“하지만 자연스럽지 않다. 번식을 하지 못하게 만들다니.”
“그건 어떻게든 바로잡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저 마력을 흡수하는 포자는 여러모로 쓸모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유성 그룹에서 세계 곳곳에 판매한 샘물이끼와 마력 흡수 포자 세트였다.
물이 부족한 지역에 우선적으로 판매가 된 것인데, 의외로 호주에도 많은 양이 들어와 있었다.
그 중에 하나가 아가일 호수 근처의 농장에 있었는데, 그것을 하이마 드리아드 일족이 발견해서 수습한 것이다.
“누군지 몰라도 나무를 사랑하고 아끼는 이가 분명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차원 전장의 시스템이 저러한 것을 허락해 주지는 않았을 테니.”
“저는 그렇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런 마음을 품은 종족을 멸하는 것은 더욱더 마음이 아플 것이니 말입니다.”
윌로우트는 정말로 그렇다는 듯이 슬픈 표정을 지었다.
나무를 사랑하는 이라면 그 누구라도 하이마 드리아드 일족의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알케이네스 제국의 식민 차원이 되기 전에는.
“이런 곳에 희망은 없겠지?”
그때 문득 에일리가 노을이 깔리는 먼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에일리 님, 이렇게 마력이 희미한 곳에 일족의 희망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알케이네스 놈들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저희가 이곳에 올 수 있도록 한 것이고 말입니다.”
“그래, 그렇지. 하지만 이곳 차원엔 다른 차원의 몬스터들도 많이 들어왔을 터! 그렇다면 혹시라도······.”
“가망이 없는 이야깁니다. 알케이네스 놈들은 분명히 이곳 차원과 연결될 수 있는 모든 차원을 살폈을 것입니다. 아니 세계수가 있을 수 있는 차원 중에 이곳과 연결된 곳이 없음을 확인했을 것입니다.”
“그래, 그렇겠지. 말도 안 되는 생각이겠지?”
에일리는 슬픈 눈빛으로 윌로우트에게 그렇게 확인하더니 눈을 감았다.
그러자 다른 하이마 드리아드 일족들도 모두 그녀를 중심으로 자리를 잡더니 눈을 감았다.
이후 하이마 드리아드 일족은 모두 해가 뜰 때까지 움직임을 멈췄다.
* * *
“뭐야? 밤이 되면 못 움직이는 건가?”
“그건 아니겠지. 그런 약점을 가지고 전쟁을 하러 오진 않았을 거 같은데?”
“그나저나 저기다가 확하고 포탄을 쏟아부으면 어떻게 처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특수 합금을 이용한 포탄을 쓰면 가능성이 있겠지.”
“그런데 왜 기다리라고 하는 거지? 가디언의 캐슬이 대기 명령을 내렸다며?”
“그랬다더라. 그리고 뭔가 확인을 한다고 저것들 찍은 사진을 들고 다시 뉴어스로 들어갔다던데?”
“상황을 보니까 아무래도 저것들은 일반적인 몬스터는 아닌 거 같지?”
“그렇겠지. 딱 봐도 뭔가 몬스터나 괴수와는 다르잖아. 옷 같은 것도 입었고, 장신구도 끼고 있고.”
“다른 차원의 이종족이란 거겠지. 몬스터나 괴수와는 다른.”
수 십 개의 모니터가 있는 공간.
그곳에서 화면을 지켜보고 있는 오퍼레이터들은 바짝 긴장한 가운데도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여러 인종이 뒤섞여 있는 그들은 세계 몬스터 대책 위원회에 속한 이들이었다.
그들이 보고 있는 화면은 세계 곳곳에서 실시간으로 전해지는 것들 중에서 중요한 것들을 띄워 놓은 것인데, 지금은 절반 가까이가 호주에 나타난 하이마 드리아드 일족을 비추고 있었다.
그렇게 날이 밝을 즈음.
“어? 저기 봐, 와이번이다. 캐슬이야.”
그 때, 누군가가 바다를 비추는 한 화면에서 와이번을 발견하고 고함을 질렀다.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그 모니터에선 계속해서 바다 위를 날아가는 와이번의 이동을 위에서 잡아주고 있었다.
인공위성에서 도현의 이동을 포착하고 촬영하고 있는 것이었다.
“미쳤다. 저런 걸 타고 다녔단 말이야? 빠르기도 엄청나게 빠른데? 거의 초음속에 가까워.”
“그런데 혼자서 어쩌려고 저렇게 가는 거지?”
“그러게 방향을 보면 딱 아가일 호수 쪽이구만.”
사람들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도현의 와이번은 곧바로 하이마 드리아드가 모여 있는 곳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하이마 드리아드들이 아침 햇살을 받으며 눈을 뜰 즈음, 그들의 머리 위에 도착해서 정지 비행을 시작했다.
“이거 말이 통할까 모르겠네.”
- 걱정하지 마십시오. 군왕은 만방의 지배자입니다. 당연히 많은 언어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 에포르, 로드의 의전담당관으로서 어지간한 언어는 모두 통역이 가능합니다. 로드의 의식에 직접 통역을 해서 전해 드리겠습니다.
“응?”
- 군왕성 점유율이 50%를 넘어서면서 제가 그러한 일을 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학자들만큼은 되지 못하겠지만 기본은 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뭐 말이 통하지 않아도 상관은 없겠지. 이걸 보면 스스로 나와 이야기할 방법을 찾으려 할 테니까.”
도현은 그렇게 말을 하며 마침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의 여인을 향해 반지 상자를 내밀었다.
- 로드! 꼭 청혼 반지를 내미는 것 같습니다.
“아, 이게 그렇게 보일 수도 있나?”
에포르의 말에 도현은 먹쩍은 웃음을 지으며 상자의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여인이 볼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이게 뭔지 알아볼 수 있나?”
여인을 보며 도현이 물었다.
“아아아, 이름 모를 분께서 그것을 우리 일족에게 내어주신다면 당신께서는 하이마의 축복을 받으시리다. 아아아, 부탁··· 드리리다.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모두 내어 드리리다.”
에일리는 도현의 손에 있는 세계수 씨앗에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다.
그녀는 땅에 박혀 있는 발을 빼지도 않고 그대로 무릎을 꿇고 두 팔을 활짝 벌려 상체를 뒤로 젖혔다.
그리고 몸 여기저기에서 손가락 길이의 나뭇가지를 뻗어내더니, 그 끝에 꽃봉우리를 만들고 삽시간에 활짝 개화시켰다.
도현은 몰랐지만 그것은 하이마 드리아드 일족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의전이었다.
환영과 감사, 존경과 경외, 사랑과 축복 등등.
온 몸으로 꽃을 피워 상대를 맞이하는 것은 하이마 드리아드에게 그런 의미가 있었다.
“오오오. 희망의 씨앗! 오오오.”
에일리의 뒤를 이어 눈을 뜬 윌로우트 역시 도현의 손에 있는 세계수 씨앗을 보고 감격의 환호성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 역시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벌리고 상체를 뒤로 젖혔다.
“어어어? 에포르, 저거 나만 싫은 거냐? 여자가 할 때에는 나쁘지 않았는데 왜 저 새끼가 저러니까 막 두드러기가 날 것 같고 그러지?”
- 성차별은 좋지 않은 겁니다.
“그래도 남자한테 꽃다발 따위는 받고 싶지 않다고! 그것도 몸으로 피운 꽃 따위!”
- 들으셨지 않습니까. 감사의 뜻이 분명합니다.
“여자가 뭐든 원하는 대로 다 해주겠다면서 저런 거잖아. 그런데 그걸 남자도 같이 하면, 그게 이상하지 않을 수 있냐?”
- 차원이 다른데 문화의 차이도 다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일단 로드를 향한 경배이니 느긋하게 즐기십시오. 게다가 이번에 군왕성에 비빈의 궁들이······.
“입 다물어라!”
- 넵, 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