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도현, 크라운을 만들다(2)
17. 도현, 크라운을 만들다(2)
“그러니까 얼굴도 모른다고?”
“그렇다니까.”
“투구로 얼굴을 감춘 기사님? 그래서 그 기사님이 이걸 적당히 그려 넣으면 너를 찾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했고?”
“그래요 언니.”
“그리고 너를 찾아 온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받은 정보를 요구하고, 그걸 확인한 다음에 연락책 노릇을 하라고 했다?”
“그렇다니까요.”
“그럼 이제 내가 너한테 그 정보란 걸 줘야 하는 거네?”
“네, 그걸 보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할 수 있을 거라고 했죠. 배신은 꿈도 꾸지 못할 거라고요.”
“배신이라······. 그렇겠네.”
자옥은 성희의 말에 그렇게 혼잣말처럼 대꾸를 하고는 자신의 잠자리로 갔다.
나무를 베어서 틀을 짜고 거기에 검불과 모포를 이용해서 만든 침대였다.
자옥은 그 침대의 모포 안, 검불 속에서 뭔가를 꺼내왔다.
몇 장의 종이.
성희는 그 종이를 받아들었다.
“희애도 못 본 거야. 있는 건 알지만 그 아이는 지금까지 물어보지도 않았지.”
“그래서 언니가 희애를 예뻐하는구나? 순종적이어서?”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고 그거나 읽어. 어차피 알려줄 때가 되면 어련히 알아서 할까. 그건 내가 판단할 일이니까.”
자옥은 성희에게 차갑게 선을 그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적당히 해. 뭘 그렇게까지 그래?”
성희는 자옥의 태도에 마음이 상한 듯이 투정을 부리며 종이를 펼쳐들었다.
그리고 한동안 눈도 깜빡이지 않고 종이의 내용을 읽었다.
스르륵.
성희는 읽은 서류를 다시 접어서 자옥에게 내밀었다.
“그러니까 까불면 지구에 있는 가족이 다친다는 거네?”
성희의 목소리에 서리가 앉았다.
“솔직히 나도 이 서류를 보낸 놈들을 믿어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
자옥이 말했다.
“그렇겠지. 어차피 그 놈들이나 그 놈들이 말하는 골드 헌터나 같은 놈들이잖아. 필요하면 언제든 가족들을 볼모로 삼을 수 있다는 거.”
성희가 빛이 사라진 눈으로 자옥을 보며 말했다.
“나, 배삼순이라고, 내 본명도 알려줬어. 거짓말을 하면 죽을 거 같아서. 그런데 그러지 말았어야 했나봐. 그냥 나 혼자 죽었어야 했나 봐.”
“미친 년. 어차피 여기 들어온 사람들 신상 명세는 다 파악이 되어 있어. 5천 명 전부 사진까지 붙은 명부가 있다는 거지.”
“그게 여기도 있고, 지구에도 있겠지?”
“골드 헌터란 놈들이 정부에서 파견한 놈들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을 거고, 이 서류를 보낸 쪽에서도 어떻게든 확보를 했겠지.”
“그, 그럼···!”
“그러니까 정신 차려 이 년아. 잘못하면 여기저기 끌려다니며 이용만 당하다가 죽을 수도 있어. 알아?”
자옥이 정신이 나간 듯한 성희에게 따끔하게 호통을 쳤다.
자옥의 목소리에 성희의 눈빛이 조금 되살아났다.
“그래도 이런 정보를 알리면서 자중하라고 한 것까진 일단 우리가 손해 볼 일은 없었어. 그래서 시키는 대로 했고.”
자옥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제 내가 온 거네? 그 사람들 연락책으로?”
“그런 거지.”
“그런데 언니는 왜?”
“뭐가?”
“왜 숨어 있지 않고 이렇게 드러냈냐고. 언니는 우리의 리더잖아.”
“호호호. 숨어봐야 어딜 가겠어? 그렇다고 내가 가만히 있으면 다른 얘가 나서야 하는데, 그럼 그 얘는 마음고생 안 하겠어? 그냥 한 살이라도 더 먹은 내가 해야지.”
자옥은 별 일 아니란 듯이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나는 제 멋대로 잘났다고 설치고 다녔네? 벌써 골드 헌터들의 레이더에 딱 걸렸겠네?”
“뭐 그 정도까진 아닐 수도 있지. 너보단 그 재홍이란 사람이 더 튀었을 걸? 너는 그냥 재홍에게 붙어 다닌 혹 정도로 넘어가야지.”
“그럼 앞으로는 좀 모자란 척 해야겠네? 재홍씨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것처럼?”
“머리가 나쁘진 않네. 그렇게 하면 되는 거야.”
“그리고 이 크라운의 연락책 노릇은 계속 하고?”
“어차피 피할 구멍도 없어. 이미 그들의 그물에 걸린 신세니까.”
성희의 말에 자옥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도 나쁜 놈들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니 골드 헌터란 놈들이 나쁜 놈들이면 그보단 조금 덜 나쁜 놈들이었으면 좋겠어.”
“언니 생각엔 아직은 괜찮다는 거지?”
성희가 물었다.
“그래. 아까도 말했잖아. 우리에게 유리한 면만 있었다고. 아직 접촉도 없었으니까.”
“내가 오기 전까진 그랬지.”
“그리고 네가 왔어도 아직은 문제가 없는 거고.”
“키키킥 웃기네. 어차피 그 놈들이 스스로 목을 그으래도 고민을 해야 할 처진데 뭐. 어차피 목숨은 버리고 여기 왔잖아. 남은 사람들을 위해서.”
“그 말도 맞네. 이미 선택지는 없는 거네. 이쪽이든 저 쪽이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할 테니까.”
성희의 말에 자옥도 현실 파악이 되었다는 듯이 맥없이 대답했다.
그렇게 성희와 자옥의 은밀한 만남은 끝이 났다.
하지만 성희를 찾는 사람은 자옥만이 아니었다.
그 후로도 성희에게 접근하는 이들은 제법 많았다.
하지만 그들 중에 누가 크라운에 속해 있는지는 오직 성희만 알 뿐이었다.
점조직인 크라운에서 유일한 허브 역할을 성희가 자청해서 맡은 것이다.
어떻게든 자신의 가치를 높여 보려는 성희의 수작 아닌 수작이었다.
* * *
- 로드, 이건 아닌 거 같습니다.
“뭐가?”
- 아니 어떻게 제 몸에 이런 걸······.
에포르 병사는 머리에 꽃을 꽂고 있었다.
미쳤다거나 하는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머리에 한 송이의 꽃이 피어 있는 모습이다.
그 이유는 도현이 새로 활성화시킨 숲의 성 때문이었다.
시스템 상점에서 구입한 <엔트의 열매>를 복용하고 흡수한 도현은 드디어 숲의 성에 대한 점유율을 31.4%까지 올릴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숲의 성에 대한 스킬도 열렸다.
산성에는 [산성 장착]이라는 기본 스킬이 있었는데, 숲의 성에도 [숲의 성 장착]이란 기본 스킬이 있었다.
그래서 도현은 기본적인 스킬들은 모두가 비슷하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산성과 달리 숲의 성은 30% 점유율에서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정원수 소환]이 그것이었다.
[정원수 소환]은 숲의 성에 있는 정원에서 특정한 풀이나 나무를 소환할 수 있는 스킬.
물론 그 점유율이 낮아서 정작 소환할 수 있는 정원수는 아직 몇 되지 않기는 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게 어딘가.
도현은 [숲의 성 장착]을 몇 번 해 보고는 그 다음에는 [정원수 소환]에 푹 빠졌다.
그 결과 현 시점에서 소환할 수 있는 정원수들은 모두 한 번씩 소환을 해 봤고, 그 효과도 확인했다.
[정원수 소환]은 특정한 효과를 지닌 정원수를 소환해서 일정 범위 안에서 그 효과를 누리는 일종의 버프 스킬이었다.
예를 들어 <골드라인 로즈마리>는 그 향기를 맡으면 집중력이 높아진다.
그리고 <붉은 지혈초>는 잎을 뜯어 지혈제로 사용할 수 있고, <꿈꾸는 월광초>는 마력의 회복을 빠르게 해 준다.
지금 에포르 병사의 투구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 바로 <꿈꾸는 월광초>다.
실제로 월광초의 꽃은 작아서 그리 티가 나지 않는다.
그런데 월광초의 커다란 잎의 테두리가 새하얗게 되어 있어서 잎 자체가 꽃처럼 보인다.
지금도 에포르 병사의 머리에 커다란 꽃이 꽂힌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월광초의 잎 때문이었다.
“좋잖아. 원래 [정원수 소환]은 고정식 스킬인데 그걸 네 머리에 꽂으니까 언제든 이동 가능한 상태가 되잖아. 얼마나 좋아?”
- 하지만 로드, 저는 로드의 의전 담당관으로서 그 품위를 지켜야 할 마땅한 소임이······.
“에포르, 에포르. 지금은 특수 상황이잖아. 지금 이 로드가 혼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고군분투를 하는 중인데, 하나 있는 신하인 우리 에포르가 그 정도도 못 참아? 응? 그런 거냐?”
- 로드, 그렇게 말씀하시면 이 에포르, 드릴 말씀이 없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차라리 이 꽃을 어깨나 등에······.
“움직임에 최대한 방해를 받지 않을 곳이 머리 아니냐. 응? 그러니까 참자. 응? 에포르.”
에포르가 이런저런 항의를 해 보지만 결국 도현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다.
어쨌거나 도현은 에포르의 로드가 아닌가.
“그나저나 이것도 마음에 든단 말이지.”
도현은 왼손의 활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시위를 당겼다.
기기기기긱!
빈 활을 당겼는데 시위가 가득 당겨지자 활의 중심에서 시위까지 가녀린 넝쿨이 이러지더니 삽시간에 몸을 부풀려 화살이 되었다.
피이이잉!
도현은 화살이 생기자마자 시위를 놓았다.
콰과곽!
날아간 화살은 수십 미터 떨어진 나무에 깊이 박혔다.
“역시 나쁘지 않아.”
도현이 손을 털며 말했다.
그러자 활이 스르륵 풀어져서 도현의 소매로 모습을 감추었다.
정확하게는 손목 보호대 안으로 사라진 것이다.
- 로드께서 숲의 성 갑옷을 일부만 활용하시는 것이 놀랍습니다. 어떻게 무기가 포함된 손목 보호대만 따로 쓰실 수 있는지.
에포르가 그런 도현의 모습에 새삼 감탄스럽다는 듯이 찬사를 토해냈다.
“내가 이래 보여도 과거엔 수십 년을 마력 통로도 없이 마력을 썼던 몸이다. 그런데 온 몸에 통로가 뻥뻥 뚫려 있는데 이런 것도 못 하겠냐?”
- 과거의 곤궁함이 현재엔 지극한 이로움이 된 셈이지만, 이 에포르는 과거의 로드를 상상하면 저도 모르게 눈끝이 시립니다.
“그거 내가 불쌍하다, 뭐 그런 소리지?”
- 어찌 신하된 도리로 그런 불측한 말을 입에 담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 안 그런 척 하면서 돌려까기? 너 머리에 꽃 꽂은 게 아주 사무치는 모양이구나?”
- ······.
“자, 심통 부리지 말고 던전 클리어나 계속 하자. 아직 깨야 할 던전이 많이 남았다.”
- 2구역 던전 따위야 이젠 문제도 아니지 않습니까. [숲의 성 장착]으로 갑옷을 만드시고, 산성의 점유율을 모두 [산성병 소환]으로 쓰시면 병사들의 수가 엄청 날 텐데요?
“그것도 괜찮겠지. 뒤에서 활 쏘는 연습도 하고.”
- 로드께서 산성병사를 모두 소환하시면 활 쏠 틈도 없을 겁니다. 그냥 군대로 밀고 가는 거나 다름없을 테니까요.
“하긴, 그렇게 생각하면 좀 사기 같단 생각이 들긴 해. 과거엔 정말 죽어라 뛰어 다녔던 곳인데 말이지.”
도현은 [산성 장착] 하나에 의지해서 몸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던 과거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 때에 비하면 지금은 정말 거저먹는 거나 다름이 없는 던전 공략이었다.
“어쨌건 가자. 던전 몇 개 클리어 하고, 김재홍이도 찾아 봐야 하고, 현실에서도 2기 헌터들 중에서 몇몇 골라서 작업도 해야 하니까.”
도현은 시간이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며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김재홍과 성희를 만나는 바람에 크라운이 조금 일찍 꾸려지게 생겼다.
그럼 그에 맞춰서 현실에서도 해야 할 작업이 있었다.
* * *
1기 헌터들이 1구역에서 한창 적응에 힘겨워 할 무렵.
지구에서는 2기 헌터 모집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래도 1기엔 정부에서 꽂아 넣은 인원이 제법 있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라는 고리타분한 말로 부려먹을 수 있는 사람이 그만큼은 있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2기엔 그 숫자가 대폭 줄었다.
있더라도 포탈에 밀어 넣기엔 아까웠다.
언제든 써먹을 수 있는 좋은 패를 그런 곳에 쓴다는 것이 낭비처럼 느껴진 것이다.
수가 제법 될 때에야 아쉬울 것이 없었지만 대폭 줄어들자 아까워졌다고 할까.
그래서 2기 헌터들부터는 정말로 지원자들 위주로 채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은 도현이 미리 손을 쓸 인재들의 수가 전보다 많다는 이야기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도현은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뉴어스에서는 최초 던전 클리어를 하느라 바쁘고, 현실에선 새로운 크라운 멤버를 만드느라 바빴다.
게다가 크라운 멤버를 제대로 부려 먹기 위해선 그들의 약점을 숨겨줘야 했다.
그들의 약점이 골드 헌터들의 손에 들어가게 되면 크라운과 골드 헌터 사이에서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었다.
그래서 도현은 멤버로 뽑은 이들의 약점을 미리 체크하고 언제든 빼돌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물론 언제까지나 공권력을 속이고 싸울 수 없다는 것은 도현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뉴어스에서 어느 정도만 세력을 만들게 되면, 그 때부터는 현실의 공권력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만큼 뉴어스가 중요해질 때가 올 것이다.
그 때까지만 크라운은 암중에서 모습을 감추고 있으면 된다.
“정 안되면 이쪽에서도 한바탕 살풀이를 할 수밖에.”
- 로드, 언제든 명령을 수행할 산성병사들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이 에포르 역시 로드께 한 목숨 바치겠습니다.
“넌 어차피 내가 죽기 전엔 안 죽잖아. 어디서 말만 번지르 하게···.”
- 로드 저의 충심을 어찌 그렇게······.
“그래, 충심. 믿어 줄 테니 조용히 좀 해라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