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미리미리 준비를(2)
8. 미리미리 준비를(2)
여진만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서류를 살피고 있었다.
누가 보낸 것인지 알 수 없는 서류가 아침에 그의 집, 문틈에 끼어 있었다.
누런 서류봉투에 들어 있는 몇 장의 문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살피기 시작한 그것이 지금은 여진만을 무척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 서류에는 그레이 포탈과 골드 포탈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여진만은 들어본 적도 없는 골드 포탈.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며 또한 그 포탈을 이용하는 골드 헌터는 지구와 포탈 너머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골드 헌터들이 앞으로 일으킬 것으로 예상하는 몇 가지 악행들에 대한 추측을 적어 놓았다.
여진만은 그 추측들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지구에 남은 가족을 인질로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헌터들을 노예처럼 부릴 거란 예상.
골드 헌터가 진짜로 있다면,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포탈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다시는 지구로 돌아오지 못한다고 정부가 확언했다.
그래서 그 보상으로 무려 5억이라는 큰돈을 준다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지구와 그곳을 오갈 수 있는 놈들이 있다면?
그놈들이 일반적인 헌터들을 억압하려 한다면?
당연히 가장 좋은 방법은 지구에 있는 가족들을 인질로 잡는 것이 될 것이다.
특수부대 중사로 근무했던 여진만은 문서가 말하는 추측이 충분히 실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그 골드 헌터가 국가의 관리를 받는 이들이라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여진만이 근무했던 부대에서도 자주 거론되었던 이야기였다.
서류를 보낸 사람은 단지 이런 가능성을 알고 있으라고만 했다.
그리고 포탈을 넘으면 자신의 능력을 감추고 지휘부의 눈에 띄지 말 것을 권하고 있었다.
아울러서 어느 정도 그쪽 세상에 적응하면 죽음을 가장해서 몸을 숨기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고 권했다.
“새끼, 좋다 이거야. 이런 정보를 주는 건 좋은데, 뭐? 입조심을 하라고? 그렇지 않을 때의 일은 상상에 맡겨?”
여진만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머릿속에선 서류에서 말한 골드 헌터들의 행태가 떠오르고 있었다.
서류를 보낸 놈이 하는 짓이나 골드 헌터란 놈이 하는 짓이나 뭐가 다르단 말인가.
서류에서 골드 헌터들이 가족을 인질로 잡을 수도 있을 거라는 예로 든 내용들.
봉투를 보낸 놈의 위협에 인질이란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서류에 들어 있는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인질로 할 수 있다는 내용은 서류를 보낸 놈도 취할 수 있는 스텐스다.
“좋다. 일단은 내가 손해 볼 일은 없으니까 따라준다. 하지만 언제고 얼굴을 보게 되면······.”
여진만은 서류를 구겨 잘게 찢으며 이를 갈았다.
* * *
- 로드, 어디로 가십니까?
에포르가 도현이 향하는 방향에 의구심을 가지고 물었다.
상태창 확인이 끝난 도현이 다시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서쪽은 포탈 홀이 있는 방향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 도현이 1구역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원래 관문을 통과해서 도현이 도착한 2구역은 허름한 석조 건물의 내부였다.
그곳 역시 고대 그리스의 신전을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는데 크기가 무척 작았다.
실내 공간이 열 평도 되지 않는 작은 건물이었던 것이다.
도현은 그곳에서 어느 정도 정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밖으로 나온 후 건물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도현은 그런 현상에 놀라지 않았다.
원래 1구역 관문을 통과하면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2구역 초입에 무작위로 뿌려 놓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도현이 움직인 방향이 1구역이 있는 서쪽이라 에포르가 질문을 던진 것이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어서 계획 변경이야.”
도현이 에포르에게 대답했다.
- 변수란 말씀입니까?
“원래는 2구역에서 사냥을 하면서 성장하는 루트를 타야 하는데, 헌터 포인트가 3만이나 생겼어.”
- 헌터 포인트가 많이 생긴 것이 변수란 말씀입니까?
“그래, 이게 지금은 쓸 수가 없는 점수거든. 아직 시스템 상점이 해금이 안 되어서 말이야.”
- 그렇군요.
“하지만 아주 쓸 수 없는 건 또 아니야. 헌터 포인트를 받고 물건을 파는 상인이 있거든. 그것도 1구역에.”
- 1구역에요?
“2구역으로 와야 상태창이 열리고 헌터 포인트가 해금이 되는데, 그걸 쓸 수 있는 곳이 1구역에 있다는 거지. 아주 웃긴 일이야.”
- 그렇군요. 그걸 로드께선 이미 알고 계신 거군요.
“과거에 한 번 경험해 봤다니까 이 빌어먹을 뉴어스를.”
도현은 그렇게 말을 하고는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과거에요?
“그건 차차 알아가자.”
도현은 그렇게 대꾸하고 걸음을 옮기며 지구에서 벌인 일들을 떠올렸다.
과거 뛰어난 헌터로 알려졌던 이들을 골라 서류를 전달했다.
그들이 그 사실을 정부에 알리면 문제가 심각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낮은 이들만 선별해서 보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아니 최악의 상황이라도 도현 자신이 드러날 일은 없도록 일처리를 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그런 식의 활동을 이어갈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곳 뉴어스에서 반 골드 헌터 세력을 만들 속셈이었다.
- 로드,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앞에 몬스터가 있습니다.
도현이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에 나타난 몬스터를 에포르가 경고했다.
도현이 급히 몸을 낮추며 전투 준비를 했다.
그런 도현의 겉모습은 완벽한 중무장 상태였다.
투구의 T자형 틈만 제외하면 그 어떤 부분도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전신갑옷을 입은 모습.
“귀찮은 것들!”
도현이 올빼미 머리를 한 대형 곰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2구역 초입의 대표 몬스터인 아울베어는 순식간에 목이 꺾여 쓰러졌다.
* * *
1구역과 2구역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투명한 벽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벽은 1관문을 통과하지 못한 이들에겐 절대적인 위력을 보인다.
하지만 관문통과자에게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스르륵.
도현은 1구역과 2구역 사이의 벽을 거침없이 지났다.
그리고 반나절 이상을 이동해서 결국 목적지에 닿았다.
- 저기입니까? 로드?
저녁이 될 무렵, 도현이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무료했다는 듯이 에포르가 재빨리 말을 걸었다.
‘그래. 나중에 1구역의 중심이 될 곳이지. 처음에는 포탈 쪽에 도시를 세우지만, 시간이 지나면 1구역 전체가 헌터들의 생활 거점이 될 거니까.’
- 그렇게 되는 겁니까?
‘처음 2년 동안엔 4만 명 정도가 정착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수가 급격하게 늘어나거든. 아주 많이.’
도현은 에포르에게 그렇게 설명하며 걸음을 옮겼다.
폐허가 된 고대 유적이라고 생각하면 딱 맞을 풍경.
1구역의 숲 중앙에는 황량한 언덕이 있다.
그리고 그 언덕의 남쪽 기슭에 허물어진 도시 유적이 있는 것이다.
유적에서 뭔가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한 초기 헌터들의 탐색이 끊이지 않는 곳.
하지만 있는 것이라고 허물어진 석조 건물과 도로뿐이고, 특별한 유물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말 그대로 허물어진 도시 유적으로만 파악된 곳.
하지만 이후에 도시 기반이 잘 닦여 있는 곳이라는 판단에 포탈 홀 쪽에 세웠던 신서울을 이쪽으로 옮기게 된다.
“여기다.”
도현이 한참 걸음을 옮기다가 유적의 한 곳에 멈추며 말했다.
- 뭐가 있습니까 로드? 다 무너진 돌조각뿐인데 말입니다요.
에포르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듯이 물었다.
“맞아. 여기도 별 건 없어. 하지만 내가 헌터 포인트를 가지고 있으니까 달라질 수 있는 거지.”
도현은 그렇게 말을 하며 아치형의 입구와 벽만 아슬아슬하게 남은 건물에 손을 가져다 댔다.
뭔지 모를 문양의 흔적이 흐릿하게 보이는 부분이었다.
[H.Point를 확인했습니다. 복구하시겠습니까?]
그러자 손이 닿은 벽에서 희미한 빛이 나면서 시스템 알림이 떴다.
“복구한다.”
도현이 대답했다.
[복구에는 500H.Point가 소요됩니다. 복구하시겠습니까?]
그러자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알림이 떠올랐다.
“그렇다.”
도현이 다시 한 번 복구할 뜻이 있음을 확인했다.
그다음 순간.
스화확!
도현이 손을 대고 있던 벽에서부터 은은한 빛이 번져 나가더니 도현 앞에 있는 건물만 시간이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주변에 뒹굴고 있던 돌들이 떠올라 벽을 세우고, 조각조각 흩어졌던 나무문이 조립되어 새로 만들어졌다.
“마법 같은 일이지.”
도현은 그 모습을 보며 새삼 감탄했다.
복원이란 정말 기적의 마법처럼 보이는 현상이다.
다 허물어진 폐허가 까마득한 과거, 번성했던 시기로 회귀하는 모습이라니.
도현은 완전히 복구가 끝난 건물을 잠시 바라보다가 문을 밀었다.
딸랑 딸랑 딸랑!
그러자 문에 달려있던 작은 종이 흔들리며 방문객의 등장을 알렸다.
그 소리에 건물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드디어 계약을 수행해야 할 때가 온 건가요? 어서 오세요. 손님.”
길게 놓인 진열대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여자가 도현에게 인사를 건넸다.
실내는 그 여인과 상품 없이 텅 빈 진열대만 있는 황량한 모습이었다.
그래도 사파이어 빛의 머리카락을 양쪽 어깨 앞으로 늘어뜨린 매혹적인 외모의 여자는 보기에 좋았다.
“상품을 보고 싶은데?”
하지만 진열대 앞으로 다가간 도현은 여인을 보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어머나 이렇게 삭막하신 분이 첫 손님이라니, 저 상처 받은 거 보이세요?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인데 너무하시네요.”
여자는 도현의 말에 정말 충격을 받았다는 듯이 슬픈 표정을 지었다.
“쓸데없는 짓은 그만하고 거래나 하지.”
하지만 도현은 여자의 그런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여자는 시스템이 움직이는 NPC같은 존재였다.
아무리 인간적, 감정적 교류를 해 봐도 그것은 단지 둘 사이의 문제일 뿐, 거래에는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
설사 둘 사이가 죽고 못 사는 관계로 발전한다고 해도, 그녀에게서 어떤 이익도 취할 수 없다.
그녀가 흔한 게임의 NPC이상이 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프로그램이 잘 짜여진 인형.
어찌어찌 공략을 잘 하면 기껏해야 스킨쉽의 즐거움 정도나 얻을 수 있을까?
과거의 기억에 의하면 잘 공략하면 거기까진 가능하다고들 했었다.
하지만 도현에겐 전혀 관심 없는 분야였다.
“재미없는 분이시네요. 알았어요. 그럼 상품을 보여드리죠. 그런데 통성명도 안 하는 건가요?”
“상점 주인과 손님, 그것 말고 뭐가 더 필요하지?”
여자가 이름을 물었지만 도현의 반응은 여전히 차가웠다.
“어머나 이러면 도리어 호기심이 생기는데 말이죠. 호호호. 좋아요, 뭐 일단 거래를 하죠. 여기 목록이 있어요.”
그러자 여자는 도현의 그런 반응이 도리어 재미있다는 듯이 표정을 바꿨다.
그러면서 도현의 눈앞에 시스템 알림이 떠올랐다.
[무기][방어구][액세서리][스킬][생필품][특수]
“원하시는 것을 찾아보세요. 포인트만 있다면 정말 요긴한 것들을 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첫 손님에 대한 예우로 제가 판매하는 모든 상품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도현은 여자의 말에 눈썹을 꿈틀했다.
여기서도 예상치 못한 득을 볼 기회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판매 목록의 세부 항목을 하나씩 확인했다.
그녀의 말처럼 각각의 항목에 엄청난 종류의 상품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도현은 그것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며 지나갔다.
무기와 방어구는 도현에게 필요 없는 항목이었다.
도현은 과거에도 산성 장착으로 그것들을 모두 해결할 수 있었다.
액세서리는 도현에게도 큰 도움이 된다.
그것들은 대부분 헌터의 여러 능력을 보조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현은 그 목록도 꼼꼼하게 확인만 했다.
도현이 원하는 것은 스킬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른 항목들까지 하나하나 확인하는 것은 정보 때문이었다.
갖가지 무기와 방어구, 액세서리에 대한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고 기억에 없던 것들은 새로 알아두는 과정.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이번 기회에 시스템이 판매하는 모든 상품의 정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상인 여자의 말처럼 그녀는 그녀가 판매하는 모든 상품을 보여줬다.
그것은 곧 이 목록이 시스템이 판매하는 모든 것이란 소리다.
이 여인은 시스템 상점의 주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