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회귀인가 예지몽인가?(1)
1. 회귀인가 예지몽인가?(1)
이제 끝났다.
콰직!
“크르륵!”
방패 모서리로 쓰러진 놈의 목을 내리찍었다.
보라색의 피가 종아리로 튄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미 온 몸이 피범벅이다.
보라색과 붉은색.
보라색은 적들의 피고, 붉은색은 나의 피다.
털썩!
마지막 적의 목을 부러뜨리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길고 긴 회랑.
폭이 수십 미터나 될 정도로 넓고 길이는 눈으로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길다.
지금 그 길고 넓은 회랑에 시체가 가득하다.
인간과 비슷하지만 ‘악마’를 떠올리게 하는 외형의 시체들.
차원 회랑을 따라 뉴어스 침략에 나선 적들의 선봉부대였다.
나는 그것들을 막기 위해 이 회랑을 홀로 지키고 있었다.
- 마지막 임무다.
- 살 생각은 버려! 죽을 때까지 막아. 그게 네가 해야 할 일이다.
- 걱정하지 마라. 네 가족들은 감시목록에서 제외될 거다. 네가 임무를 완수하기만 하면.
- 회랑이 무너질 때까지 버텨라. 그리고 회랑과 함께 소멸하란 이야기다.
“개자식!”
명령을 내린 놈을 떠올리며 한 마디를 뱉어 보지만 사실 의미는 없다.
처음부터 정체를 들키지 말았어야 했다.
골드 헌터, 그 개 같은 놈들의 존재를 몰랐던 것이 뼈아프다.
지구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자들은 절대로 골드 헌터를 거역할 수 없다.
골드 헌터는 그레이 헌터와 달리 이곳 ‘뉴어스’와 지구를 오갈 수 있는 특권을 지닌 이들이다.
게다가 지구에서도 헌터의 힘을 그대로 쓸 수 있는 초인이고.
그런 그들이 지구의 부와 권력을 손에 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나마 끝이라니 홀가분하네.”
죽음조차 뜻대로 선택할 수 없는 삶이었다.
헛되이 죽으면 그 분풀이를 지구의 가족들이 받게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살았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는 죽음을 허락받은 자리.
그래서 차라리 마음이 편하다.
이제 가족들은 놈들의 감시를 받지 않고 평범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죽은 후에 굳이 지구의 가족들을 어찌할 이유는 없을 테니까.
‘잘, 살겠지.’
그럼 된 거다.
그나마 이게 지금 내가 가질 수 있는 위안의 전부란 사실이 서글프지만 어쩌랴.
목줄을 풀 수 없는 사냥개의 말로란 이런 것일 수밖에.
쿠구구구구구구구!
쩌저저저적 쩌저저적! 쩌저적!
회랑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뉴어스와 침략자 놈들의 세상을 이어주는 통로.
그 통로를 지탱하던 힘이 다한 것이다.
이로서 당분간 침략자로부터 ‘뉴어스’는 안전할 것이다.
다시 통로가 열리기까진 적잖은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그 시간을 벌기 위해서 내가 이곳에서 죽어가는 것이다.
쿠르르르르릉!
회랑이 양쪽 끝에서부터 무너져오고 있다.
이제 곧 끝이 나겠지.
터덩텅!
오랜만에 투구를 벗었다.
눈과 코 부분에 T자형 틈만 있는 투구가 발밑에서 뒹군다.
차르르륵!
아, 그게 있었지.
문득 생각이 나서 목걸이 줄을 당겨 팬던트를 꺼냈다.
딸깍!
회중시계처럼 뚜껑이 열리는 팬던트.
하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시계가 아니라 반지다.
왕관을 축소해 놓은 것처럼 생긴 반지.
마지막 임무를 받은 후, 뉴어스의 시장 좌판을 구경하다가 얻은 이 반지는 빌어먹게도 나만 사용할 수 있는 전용 반지였다.
그것도 상위 직업으로 전직할 수 있는 효과를 지닌 아이템.
하지만 전직을 하면 능력의 상당 부분이 일시적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 때문에 나는 전직을 할 수가 없었다.
임무에 투입되기까지 남은 시간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그 대가를 가족들이 받게 될지도 모르는데 전력 약화를 감수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끝난 지금은 거칠 것은 없다.
반지를 꺼내 왼손 중지에 끼워 넣었다.
십 년이 넘도록 존재도 몰랐던 승급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이제 곧 죽을지라도 마냥 넋을 놓고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승급 아이템을 사용합니다.]
[산성의 주인에게 승급 아이템 왕의 반지를 사용할 자격이 있습니다.]
[산성의 주인이 일곱 성의 주인으로 승급합니다.]
[일곱 성의 주인······.]
시스템 알림이 내게 일곱 성의 주인으로 승급했다고 알려왔다.
하지만 그게 뭔지 몰라도 이미 늦었다.
쿠과과과과과곽! 콰르르르릉!
“젠장!”
두 세계를 이어주던 회랑이 완전히 무너지며 사라지고 있다.
조각조각 분해되어 어딘지도 모를 차원의 틈에 흡수되는 것이다.
그건 내가 죽인 놈들의 사체는 물론이고 살아있는 나도 포함된 이야기다.
“씨······.”
마지막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나는 내 몸이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것을 보고 느꼈다.
그렇게 나는 ‘끝장’이 났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오래도록 그리워했던 목소리가 나를 깨우기 전까지는.
* * *
“도현아! 도현아! 일어나야지? 응?”
‘누구? 응? 이 목소리는?!’
도현은 잠결에 깜짝 놀라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머, 깜짝이야. 얘가 갑자기 왜 이래? 안 하던 버릇을 하고?”
“어, 엄마?”
“호호홋, 우리 도현이 잠이 덜 깬 모양이네? 엄마라니, 오랜만에 들어보는 소리네? 호호호.”
“아, 어머니!”
“이제 정신이 좀 들어?”
“그, 그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머니? 그리고 여긴 내 방? 지구의 내 방이라고?’
“정신 차리고 어서 내려와라. 오늘 중요한 계약이 있다면서 그 여원 그룹하고.”
“네? 여원 그룹하고 계약이요?”
도현은 어머니의 말에 깜짝 놀랐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여원 그룹과의 계약, 그 날은 도현의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변곡점이 되는 날이었다.
“아버지! 아버지는요!?”
도현이 급히 침대에서 일어나며 어머니를 보며 물었다.
“니 아빠? 당연히 씻고 출근 준비 하고 있지 뭐 하겠니? 그러니까 너도 어서 준비해야지. 이러다가 또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뛰어 나갈래?”
“아, 아니에요. 금방 나갈게요. 내려가 계세요.”
“그래. 어서 준비해라. 평소엔 안 그러던 애가 왜 오늘따라······.”
어머니는 도현의 방을 나가며 낮게 뭐라고 중얼거리신다.
평소와 달리 늦잠을 잔데다가 정신없는 모습을 보였으니 그럴 법도 하다.
도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침대에 주저앉았다.
‘어떻게 된 거지? 차원 회랑에서 죽지 않았나? 설마 그게 꿈이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도현은 그런 생각을 하며 정신을 집중해서 자신의 상태창을 불러왔다.
하지만 숨 쉬듯이 되던 것이 안 된다.
‘상태창이 안 보인다고?’
도현은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몸에 힘을 줘 봤다.
하지만 원했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마력도 없어. 그럼 그게 꿈?’
너무도 생생한 꿈.
뉴어스에서 보낸 십여 년에 걸친 장대한 꿈이 너무도 자세하게 기억났다.
“도현아!”
“네, 내려가요.”
도현은 어머니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시간이 벌써 7시를 훌쩍 넘고 있었다.
이러다간 정말 출근에 늦을 수도 있다.
* * *
복잡한 심경으로 식사를 마치고 출근길에 오른 도현이 힐끗 룸미러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 오늘 여원하고 계약할 때요.”
“음? 왜?”
뒷자리에서 노트북에 열중하던 도현의 아버지 최성수가 고개를 들고 운전석의 도현을 봤다.
“저도 함께 갔으면 하는데 괜찮을까요?”
도현은 조심스럽게 아버지에게 물었다.
“음? 네가?”
“네, 아버지.”
“계약은 영업부에서 할 일이지 기획부에서 할 일은 아닌데?”
최성수는 기획부에서 대리로 있는 아들이 여원 그룹과의 계약에 함께 가겠다는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만, 이제 기획부도 어느 정도 적응을 했으니 영업 쪽도 관심을 가져볼까 합니다.”
“음?”
“평범한 상황이면 그냥 다음 기회를 노리겠지만 아무래도 여원 그룹과의 계약처럼 큰 거래는 좀처럼 경험하기 어려운 기회가 아닌가 싶어서요.”
도현은 차근차근 아버지를 설득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은 아버지와 함께 움직여야 했다.
생각 같아선 아버지를 회사에 묶어두고 꼼짝도 못하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여원과의 계약은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도현의 아버지는 대형 금속 공업사를 운영하고 있다.
말은 공업사지만 다섯 가지의 주력 사업체와 그것을 돕기 위한 보조 사업체 일곱 곳을 운영하는 준재벌급 기업이다.
도현은 그런 최성수의 외아들로 이제 입사 2년차로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었다.
“그 말에도 일리가 있긴 하다. 어차피 네가 내 아들이란 것을 모르는 사람도 없고. 계약에 동행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렇게 하자꾸나.”
최성수가 잠시 생각을 해 보더니 그렇게 허락했다.
아들의 후계자 수업으로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오전 업무를 마치는 대로 아버지 사무실로 올라가겠습니다.”
“아니다. 그냥 시간 맞춰 밑으로 내려와라. 계약이라고 하지만 오늘 싸인을 하는 것도 아니고, 식사를 하면서 최종 조율을 하는 거니까.”
“그렇습니까?”
도현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과거엔 오늘이 계약서에 싸인을 하는 날이라고 알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도 도현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거의 결정이 된 일이긴 하다. 그래서 대표들이 얼굴을 보는 거고.”
“그러니까 서로 얼굴을 보면서 잘 해 보자고 인사를 하는 그런 자리란 말이군요?”
“별 것 아닌 거 같아도 그런 자리가 꽤나 쓸모가 있다. 거래를 한 번만 하고 말 것도 아닌데 서로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어서 나쁠 것은 없지.”
“비슷한 조건이면 다음 계약을 따기도 쉽고요?”
“우리 입장에서는 그렇고, 저 쪽 입장에서는 믿을 수 있는 공급자를 확보하는 거지.”
“에이, 우리 유성공업이야 신뢰 하나는 최고 아닙니까. 신뢰와 기술로 앞서가는 유성!”
도현이 활짝 웃는 얼굴로 살짝 아버지를 돌아보며 말했다.
“녀석, 신호 바뀌었다. 출발해라. 하하하.”
* * *
도현은 오전 업무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지난밤의 꿈.
그것이 너무도 생생해서 좀처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도현의 모습에 기획실의 직원들은 오늘 계약에 사장님과 동행하는 것 때문에 그런가 보다 하고 있었다.
‘아직은 몰라. 정말 꿈이었을 수도 있지. 하지만 아버지께 무슨 일이 벌어지면 그건 정말 끔찍한 일이지.’
어차피 꿈을 핑계로 회사의 중요한 약속을 미룰 수는 없다.
그러니 자신이 아버지와 동행하기로 한 것이다.
꿈에선 약속장소로 가는 길에 교통사고가 났었다.
브레이크 파열로 멈추지 못한 대형 트럭이 아버지의 차를 올라탄 사고였다.
그 사고로 아버지는 몇 달을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유성공업이 급격히 흔들리며 연쇄 부도를 맞이하는 시발점이 바로 이 사건이었다.
도현의 꿈에 유성공업은 아버지가 병원에 있는 사이에 빠르게 대경그룹에 흡수되었다.
증거는 없었지만 대한민국 서열 4위의 재벌그룹인 대경이 유성공업을 노리고 일을 벌였다는 의혹이 클 수밖에 없는 이유다.
‘꿈이겠지만 찝찝하니까.’
도현은 어영부영 오전 근무를 마치고 사옥의 현관으로 나섰다.
이미 아버지의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음?”
그런데 도현의 눈에 뭔가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최대리님.”
“아, 네.”
도현에게 인사를 건넨 사람.
“처음 뵙겠습니다. 며칠 전에 새로 입사한 기동호입니다.”
“기동호씨?”
도현의 꿈에도 등장했던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사고 당시에 차를 몰았던 기사가 바로 이 기동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