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 epilogue - 귀환자
한건우가 어둠의 핵 속으로 사라진 이후.
3년이 지났다.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각성자는 그날 나타난 <최고 관리자>의 음성을 들었다.
그에 맞서 세계의 멸망을 막은 한건우의 이야기는 전설과 신화가 되어 기려지고 있었다.
[여러분, 저는 한건우 플레이어가 자연 각성했던 학교 앞에 와있습니다. 이곳은 한건우 플레이어의 지지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순례하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데이 제로(Day 0)> 3주년을 맞아 한건우 플레이어를 그리워하는 인파가 몰려있는데요-]
TV 화면 속 리포터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
남녀노소, 빈부, 국적까지. 다양한 이들이 꽃 한 송이를 놓기 위해 긴 행렬을 이루었다.
모인 사람들의 얼굴은 밝아 보였다.
지난 3년간, 한국은 정남준 대통령을 중심으로 비극을 극복하고 눈부신 성장을 이뤄냈다.
세계 각국에는 아직도 혼란에 신음하는 나라가 많아서, 한국의 평화유지군을 파견해달라는 요청이 올 정도였다. 멕시코시티의 성공 사례가 소문이 난 탓이었다.
리포터가 시민들에게 마이크를 들이댔다.
[저희가 이렇게 살 수 있는 건 모두 한건우 플레이어 덕분이니까요.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죠.]
[한국 사람이라면 한건우 추모합시다!]
[추모 아녜요! 한건우 플레이어는 꼭 돌아올 거라구요!]
한 어린아이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TV 속 시민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꼬맹이가 똑부러지네. 그렇지! 형님은 꼭 돌아올거야.”
술기운에 코가 빨개진 박이경이 소파에 엎어진 채 웅얼거렸다.
흰색 정장을 차려입고 서류를 검토하던 차은비가 안경을 고쳐쓰며 한숨을 쉬었다.
“어제 또 권석진 대장이랑 술 마셨죠? 나랏일하는 사람을 데리고 말야.”
“형님 얘기로 말이 통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박이경이 취기가 오를 정도면. 거의 치사량의 알콜을 쏟아부었을 것이다.
차은비가 힐을 해주기 위해 박이경의 이마에 손을 얹으려 했으나, 박이경은 그 손목을 잡아챘다.
“그냥 취한 채로 있을래. 그리고 나도 나랏일 하거든?”
“그건 나랏일이 아니라 자경단이라고 불러요. 비질란테 몰라요?”
“비질 뭐?”
박이경은 알파스 길드의 마스터 직위를 내려놓은 채였다.
자연인으로 돌아간다는 걸, 부하들이 울고불고 말리며 ‘고문’ 자리를 줘서 그나마 길드 소속은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박이경이 마음을 터놓는 상대가 하나 있었다.
지금은 국군 대원수로 승진한 이능력 특수전단의 권석진 대장.
그들이 친해지게 된 계기도 우스웠다.
“하여간 자기가 무슨 영웅인 줄 알아.”
이능력 특수전단은 이제 반정부세력이나 미등록자를 잡는 조직이 아니었다.
민간인을 위협하는 악성 범죄자를 소탕하는 특수기동대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특수부대가 범죄자를 체포하러 출동할 때마다 박이경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
범죄자를 신나게 두들겨패며 스트레스를 푸는 것 같다는 증언이었다.
나름대로 복면까지 쓰고 신분을 숨기려 했지만, 그 몸집은 몰라보기도 어려웠다.
“영웅, 필요하지. 세상에 형님이 없잖아···.”
차은비는 그런 박이경이 안쓰러웠다. 그녀는 자기에게 기댄 박이경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나도 마스터가 보고 싶다구요.’
차은비는 현재 아레스 길드의 부 마스터였다.
2년 반 전의 투표에서 만장일치로 뽑혔을 때, 차은비는 사람들이 자기를 놀리는 줄 알았다.
- 제가요? 저는 리더를 맡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닌데.
- 크하하, 그건 인정이지! 부 마스터는 리더가 아니라 소처럼 일하는 사람이니 걱정 말라고.
투표를 구경하던 박이경이 옆에서 그렇게 놀렸다.
‘다들 현명했어. 내 안에 일 중독자가 있는 걸 꿰뚫어봤구나!’
차은비는 그동안 아레스 길드를 엄청나게 큰 조직으로 키워냈다.
주인을 잃은 일성과 환인을 흡수하다시피 하고, 다른 중소 길드들도 통합하여 몸집을 키웠다.
월드 클래스의 각성자 전투원들과 그 지원 조직, 사업부서, 연구소, 자선단체, 학교···.
일개 길드가 아니라 거의 작은 국가를 꾸려도 될 정도였다.
“세상이··· 변하긴 했죠.”
차은비가 중얼거렸다.
한건우가 사라진 ‘데이 제로’ 이후.
단 한명의 각성자도 새로 생겨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각성자 등록 같은 문제도 관심에서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균열도 열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단순한 우연이나 일시적인 현상인가 했지만.
3년을 지켜본 결과, 결론을 낼 만도 했다.
어쩌면 평화가 오고 있는 것 같았다.
좋아해야 마땅하지만, 차은비의 표정은 쓸쓸했다.
‘마스터, 어디 계세요. 살아는 있는 거예요?’
*
“내가 바로 최강의 ‘무적 방패’ 임진호다!”
“그럼 난 ‘얼음 황제’ 임수호 할래! 내 얼음 칼을 맞아라!”
일고여덟 살이나 될까.
길가에서 두 쌍둥이 형제가 장난감 칼을 들고 아웅다웅 다투고 있었다.
그 옆에 세워진 번쩍거리는 최고급 세단 안에서, 그걸 본 남자가 실소했다.
“하하하, 저걸 그 두 사람이 봤어야 하는데!”
정장을 입고 웃고 있는 남자는 아레스 길드의 매니저, 금해준이었다.
임진호와 임수호 형제는 요새 세계를 종횡무진하며 해결사 역할을 하곤 했다.
‘건우 형이라면 이렇게 했을 거’라는 말과 함께.
아레스 길드의 위상을 높이는 행동이라고 생각해서 적극 독려했는데.
그 결과는 금해준의 예상과 조금 달랐다.
두 형제가 유독 아이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 것이다.
임수호와 임진호가 전력으로 싸우면 누가 이기느냐?
이런 주제가 전세계 아이들이 열내는 토론 주제가 되어, 외신 뉴스에 소개될 정도였다.
“해준 오빠, 뭐 재미있는 일 있어?”
“앗, 지윤아. 언제 왔어!”
금해준이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한건우의 여동생, 지윤은 어느덧 성인이 되어 눈부신 미인으로 자라 있었다.
“지금 나왔지. 바로 가는 거야?”
“응, 어서 타.”
금해준은 빙긋 웃으면서 남몰래 지윤의 눈치를 살폈다.
문제의 그날 이후, 지윤은 한동안 큰 충격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금해준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줬지만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지. 마스터는 지윤이에게 마스터는 지윤이에게 오빠이자 부모 같은 존재였고, 하나뿐인 가족이었으니.’
오빠가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며, 지윤이 매일같이 오빠가 먹을 저녁을 손수 차리고 있다고.
도우미 아주머니가 금해준에게 귀띔해준 적도 있었다.
‘최근에는 꿋꿋해진 것 같아서 안심이었는데.’
걱정하는 금해준에게 지윤이가 불쑥 말을 꺼냈다.
“해준 오빠, 나 할 말 있어.”
“응? 뭐, 뭔데?”
금해준은 괜히 긴장하면서 얼굴이 붉어졌다.
‘아이고, 이 무슨 불순한 생각이냐! 형님도 안 돌아오셨는데.’
순간적으로 뭔가를 기대한 자신에게 죄책감이 느껴졌다. 금해준은 스스로 뺨을 내리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나, 각성자 아카데미 편입 시험 보려고.”
“뭐라고? 가, 각성했어?”
끼익!
금해준이 갓길에 차를 세웠다.
“그럴 리가 없잖아. 요새는 각성자가 안 나오는 거 알면서.”
“아하하, 그··· 렇지? 그런데 아카데미는 왜?”
“연구하고 싶은 게 생겨서 그래.”
원래 각성자 아카데미는 각성자 중에서도 엘리트만 갈 수 있는 교육기관이었다.
요새는 문호가 개방되어서 각성자나 균열에 관한 연구를 하려는 일반인도 시험에 합격하면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시간을 쪼개가며 열심히 공부했구나.”
어린 나이에 오빠가 남겨준 천문학적인 재산이 있건만.
지윤은 사치나 낭비하는 일 없이 보통의 학생처럼 살아왔다.
그나마 공부 이야기를 할 때는 새하얀 얼굴에 드리운 그늘이 옅어진 듯해서 좋았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응, 끝까지 연구해서, 오빠가 어디로 갔는지 단서를 찾아낼 거야.”
“좋아, 응원할게.”
금해준은 씩씩하게 답했지만, 속마음은 착잡했다.
‘데이 제로’에 벌어진 일은 최고의 학자와 연구자들도 밝혀내지 못했다.
지윤이 좌절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든 것이다.
‘마스터가 돌아오실 때까지, 지윤이가 엇나가지 않게 내가 잘해줘야지.’
금해준과 한지윤이 향한 곳은 옛 아레스 길드 본사 건물이었다.
지금은 사업 규모가 감당이 안되어 사옥을 새로 지어서 옮겼고, 옛 본사 건물은 한건우가 있던 시절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거기에 대해서 OB들은 대찬성이었다.
“다들 오고 있네.”
금해준이 차를 세우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짙은 보라색의 성체 드래곤이 막 옥상에 내려앉고 있었다.
그 뒤로, 익룡처럼 보이는 무수한 비행 마수 떼가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선두에 타고 있는 은설아의 실루엣도 보였다.
<비스트 마스터>라 불리는 은설아.
그녀는 작았던 키가 훌쩍 자라났고, 얼굴은 표정 없이 차가웠다.
마수와 어울릴 때 말고는 웃음을 보기가 어려웠다.
“옛날에도 가끔 무서웠지만, 이제는 말도 못 붙이겠어.”
“아냐, 설아가 얼마나 마음이 여린데. 부모 잃은 아이들도 도와주고 있고.”
특별히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동료들은 매해 이날이 오면 길드 회의실에 모이고 있었다.
“어, 수호 오빠랑 진호 오빠도 왔어? 멀리 갔다고 해서 못 올줄 알았어.”
형제를 발견한 지윤의 표정이 환해졌다.
“다른 날은 몰라도 오늘은 와야지.”
“알파스 분들도 오셨네요!”
씩 웃는 박이경을 따라, 북경에 결사대로 따라갔던 알파스 길드원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마치 장례식장에 오듯이 어두운 옷을 입고 묵묵히 있다가 돌아갔는데.
이제는 가족 모임에 오듯이 편한 분위기였다.
“자, 준비하시죠!”
해준은 다같이 식사라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캠핑을 하듯이 준비한 먹거리를 회의실 탁자에 펼쳤다.
다들 앉아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했다.
“그나저나 비현 씨는... 연락하는 사람이 없는 겁니까?”
분위기가 무르익자, 해준이 조심스레 물었다.
“우리 모두 힘들지만 비현씨도 누구보다 충격이 크겠죠.”
“솜브라의 대장 자리도 내려놓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솜브라 쪽에서도 모습을 본 지 오래됐다고 해요.”
한숨을 쉬는 일행 사이로,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지나갔다.
“어, 갑자기 웬 바람이?”
“형 벌써 취했어요? 실내에서 무슨 바람이에요. 창문도 닫아놨는데.”
“아니야··· 분명히 불었는데···.”
용인 모습으로 앉아있던 드래곤이 조용히 고개를 돌려 창문 쪽을 바라보았다.
이비현은 일행들의 모습을 확인하고 조용히 빠져나갔다.
그녀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항상 이곳에 와서 한건우를 추억하고 있었다.
이제 솜브라는 그녀 없이도 돌아갈 수 있게 만들어놓았고, 미등록자들의 삶도 안정을 찾았으니, 그녀가 더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직도 마지막 전투가 있던 날 입었던 낡은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건우 씨, 사람들의 시간은 흘러가고 있는데 제 시간은 여전히 그날에 멈춰 있어요.’
혼자서 건물 옥상에 올라간 이비현이 난간에 걸터앉아 노을 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하늘에서 공간이 찢기고, 마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설마, 균열? 이게 얼마만이지?’
이비현은 은신을 풀고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새 균열에서 느껴지는 마기의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균열 알림은 뜨지 않았지만, 엄청난 에너지 반응이 감지되었다.
‘공략 시간조차 없이 그냥 균열이 열리고 있어!’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S급? 아니 그 이상이야. 상위 각성자들을 모두 모아야···.’
아래로 내려가 도움을 처하기도 전에, 균열이 완전히 열렸다.
그 안에서 나타난 것은 괴물도, 거인도, 언데드도, 악마종도 아니었다.
한 남자의 인영이 하늘에서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횡단보도를 지나가던 시민들, 도로를 달리는 운전자들도 모두 길을 멈추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각성자를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몇몇 행인들은 한건우를 기리는 꽃을 든 채였다.
긴장한 이비현의 눈이 점점 커졌다.
챙그랑-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시미터가 힘없이 떨어졌다.
“건우 씨.”
“오래 기다렸지? 집에 왔어.”
이비현은 한달음에 달려가 한건우의 품에 안겼다.
에너지 반응을 느낀 동료들도 속속 옥상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설마···?”
“그렇지, 드디어!”
“오, 오빠···?”
“형님! 오셨습니까!”
동료들 모두 한건우에게 뛰어들었다.
하늘에 갈라졌던 균열은 어느새 깨끗이 사라지고 없었다.
“마지막 <관리자>를 해치우는 데 좀 오래 걸렸습니다.”
한건우가 말하자, 모두 벼락같이 굳었다.
“그, 그럼 설마···.”
“앞으로 우주에 균열 같은 건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지구에도, 그 어떤 세계선에도.”
“....”
동료들은 할 말을 잃고 한건우를 바라보았다.
한건우는 손에 쥐고 있던 창을 내려놓았다.
동료들의 어깨 너머로 노을 지는 하늘이 비쳤다.
투쟁의 시대는 저물고, 새 시대의 시작이었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