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 결사대 (13) - 운명은 내가 결정한다
한건우는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속속들이 읽었다.
그냥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모용황의 <화안금정>과 함께, 오감과 육감을 틔우는 특성들이 빛을 발했다.
사람들의 얼굴 근육에 떠오른 두려움과 긴장.
산등성이 건너편에서 거친 바람을 타고 오는 흙내음.
땅속을 파고드는 두더지의 몸에서 뛰는 맥박 소리까지.
밀려들어오는 무수한 정보의 파도.
‘신이 된 것 같군.’
한치의 과장 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스으으···.
한건우가 손에 쥔 예언 석판에 빛으로 글씨가 떠올랐다.
처음 보는 이계의 언어였으나, 저절로 해석이 되었다.
[세계선에 황혼의 시간이 찾아오면, 그걸 막는 방법은 두 가지 있다.]
‘두 가지나?’
석판의 인심이 꽤 후하지 않나.
그렇게 생각했던 한건우의 인상이 곧 찌푸려졌다.
[첫 번째는 지배종의 수를 10분의 1로 줄이는 것이다.]
‘이건 모용황이 찾아냈다던 방법이잖아.’
[다만, 이는 황혼의 시간을 유예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면 그렇지. 결국 제대로 된 해결책은 아니었어.’
[두 번째는 한 세계선의 인과를 다른 세계선에 넘기는 것이다.]
“흐음.”
그게 어떻게 가능하다는 건지.
지금의 한건우조차도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석판의 설명을 기다리고 있던 때.
한건우의 머리 위에 다시 빛무리가 나타났다.
“!”
한건우는 이제 그 빛무리의 정체를 알았다.
바로 시스템의 세계선을 총괄하는 <최고 관리자>.
“구면이군.”
시간적으로는 방금 전이겠지만.
오랜만에 만난 듯한 기분이었다.
다른 일행의 눈에도 그 빛무리가 보이는 모양이었다.
빛무리는 어두운 밤하늘을 배경으로 환하게 빛나더니, 촉수처럼 긴 팔을 뻗었다.
- 한건우 씨, 결국 해내셨군요. 축하드립니다.
귀로 들리는 목소리가 아니라, 머릿속을 울리는 소리였다.
최고 관리자의 말투가 굉장히 공손하게 바뀌어 있었다.
“마스터, 저건 도대체?”
“뭐지? 마수는 아닌 것 같고···.”
일행들은 나타난 상대를 공격해야 할지, 도망가야 할지 우왕좌왕했다.
한건우만이 담담하게 서 있었다.
때마침 나타난 존재가 반갑기까지 했다. 궁금증을 풀어줄 만한 상대였으니까.
“이봐, 세계선의 인과를 넘긴다는 게 무슨 뜻이지? 그게 어떻게 황혼의 시간을 막는다는 거야.”
- 아하, 쉽습니다. 두 세계선을 연결하는 다리만 찾으면 저절로 진행됩니다.
“다리만 찾으면 된다고?”
-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에서 흐르듯이. 짙은 핏물이 맑은 물에 번지듯이. 황혼의 시간을 불러오는 에너지는 저절로 다른 세계선으로 움직일 겁니다.
“흠.”
한건우가 골똘히 턱을 쓰다듬자, 최고 관리자가 답답한 듯 힌트를 주었다.
- 모르시겠습니까? 두 세계선을 잇는 다리는 이미 존재합니다. 그건 바로···.
“바로 나겠지.”
한건우는 최고 관리자의 말을 잘랐다.
설명을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한건우 자신이 바로 그 다리였다.
뇌룡의 심장의 히든 스킬을 타고 세계선을 이동해 왔으니까. 회귀 전의 세계와 회귀 후의 세계는 서로 다른 세계선일 테니까.
- 잘 아시는군요.
“그러면, 인과를 넘겨받은 다른 세계선은 어떻게 되지?”
- 짐작하는 대로죠. 하나의 세계선을 지키는 대신, 다른 세계선을 희생시키는 겁니다. 그것이 도태되는 세계선의 운명이니까요.
사람들은 오가는 대화를 듣고 창백하게 질렸다.
신들의 대화를 엿듣는 필멸자가 된 듯.
감히 끼어들면 안되는 자리에 있는 듯했다.
“좋아, 그렇다면 시스템 관리자의 권한은? 준다, 준다 하더니 대체 언제 주는 거냐.”
- 그렇습니다. 당신에게 이 세계선의 관리 권한을 주죠. 잘 해낸다면, 지배하는 세계선을 늘려줄 겁니다. 언젠가 당신이 성장한다면, 저와 동등한 위치가 될지도 모르겠네요.
“그전에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게 있는데.”
- 제가 대답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대답해 드리죠. 무엇이 궁금합니까?
“내가 사는 지구에도 처음부터 균열과 각성자가 있었던 것은 아닌데, 그건 누가 만들어낸 거지?”
- 쉬운 질문이군요. 한 세계가 시스템 안에 들어오게 되면 균열이 생기고, 그 세계의 지배종에게 각성이 일어납니다.
“시스템 안에 들어온다고?”
- 바로 저희 관리자들이 만든 우주의 법칙, 시스템 안에 들어오는 걸 말합니다. 그러니 여기서는 시스템의 규칙을 따라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당신의 세계선이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요.
“....”
- 시스템 관리자의 권한은 큰 힘이자 권리이지만, 이러한 법칙 속에서 영원히 순환을 유지해야 할 무거운 임무도 따라옵니다. 명심해 주십시오.
한건우는 아무 말 없이 최고 관리자를 바라보았다.
- 관리자가 되면, 늙지도, 죽지도 않는 불사의 존재가 될 것입니다. 자, 무릎을 꿇고 내 손등에 입을 맞추십시오.
최고 관리자가 빛무리로 이루어진 긴 촉수를 내밀어, 왕처럼 경건한 서약을 요구했다.
한건우는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놀라움, 두려움, 걱정.
각양각색의 표정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이비현의 얼굴, 그리고 드래곤까지 올려다보았다.
그들은 단단한 눈빛으로 한건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건우가 무슨 선택을 하든지 믿겠다는 굳은 신뢰가 느껴졌다.
한건우는 결심했다.
“시스템 관리자의 권한, 그딴 건 필요 없다.”
- 뭐라고···?
빛무리가 사나운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한건우는 태연하게 말했다.
“그리고 너를 없애서, 세계를 원래대로 돌려놓겠다.”
빛무리는 명멸하던 것을 멈추고 정지해 있었다.
- 나를, 없애겠다고요? 관리자의 권한도 거부하고?
“네가 끝이 아니다. 너 같은 놈들이 더 있다면 모두 없애겠어.”
- 우주의 법칙을··· 거부하겠다는 겁니까?
한건우는 확신했다.
<관리자>와 법칙이라는 단어를 써가며 자연스러운 일인 척 포장했지만.
‘어려울 때는 단순하게 생각해야 본질이 보이지.’
시스템이라는 건 그저 평화로운 세계선에 찾아온 침략자였다.
“우주의 법칙이 뭔지는 잘 모르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하지. 네 꼭두각시가 되어 멀쩡한 세상을 뒤엎고 파괴할 바에는 내가 이 순환의 고리를 끊겠어.”
시스템이 다루는 막대한 에너지와 자원이 어디에서 왔을까? 바로 침략당한 세계에서 얻은 것이리라.
- 하하하! 재미있군요. 과연 당신이 나를 이길 수 있을까요? 감히, 관리자의 권한도 받지 않은··· 일개 피조물에 불과한 자가, 신인 나를 죽이겠다니!
최고 관리자의 목소리가 점차 분노의 감정으로 바뀌었다.
- 말했지 않습니까? 나는 불사의 존재입니다.
“그것 역시, 시도해 보면 알겠지.”
- 당신의 어리석은 선택의 대가로 당신과 이 세계의 운명은 정해졌습니다. 지금 바로, 당신을 없애고 황혼의 시간을 집행하겠습니다!
최고 관리자를 이루는 빛무리는 하늘을 덮을 정도로 커지면서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한건우가 서 있던 대지에 존재감의 압력이 쏟아졌다.
공기가 일그러지고 땅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한건우는 일행들의 머리 위로 넓은 보호막을 펼치며 소리쳤다.
“미안하다, 모두. 한 번만 더 나를 믿어줘!”
가장 먼저 이비현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저런 녀석한테 지지 말아요. 건우 씨의 선택을 믿어요!”
길드원과 동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스터를 믿습니다!”
드래곤은 날개를 펴고 저공 비행을 하며 돌고 있었다.
[아빠, 같이 가!]
“그래, 고맙다.”
한건우는 기꺼이 드래곤의 등 뒤에 올라탔다.
드래곤은 위로 솟구치면서, 빛무리를 향해 자신의 온 힘을 모은 브레스를 발사했다.
지상에까지 마력 폭풍이 일어날 정도였다.
빛무리의 중심에는 암흑의 구가 생기더니, 브레스의 에너지를 흡수했다.
브레스는 빛무리에 접근하면서 눈에 띄게 약화되더니, 결국 사그라들어 버렸다.
“멀리서 하는 공격은 소용 없어. 저게 모든 공격을 무효화시키고 있어.”
[하지만 가까이 가는 건 더 위험해.]
“어쩔 수 없어. 최대한 접근해 줘!”
드래곤은 상대의 주위를 크게 돌면서 서서히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한건우는 아공간 주머니에 손을 넣어, 찌릿한 마력장이 느껴지는 황금색 마석을 꺼냈다.
바로 황룡의 몸에서 꺼낸 드래곤 하트였다.
콰악!
한건우는 주먹을 쥐어 드래곤 하트를 깨뜨렸다.
- ···!
심상찮은 기류에, 드래곤이 놀라 멈추었다.
한건우는 조각난 황룡의 심장을 그대로 씹어 삼켰다.
까드득!
두근.
두근.
비활성 상태로 숨어있는 특성이 다시 발동되었다.
뇌룡의 심장 조각을 합체하는 데 사용되는 특성이었다.
[특성 발동 : 비스트 마스터]
한건우의 몸은 황룡의 심장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부담과 함께 해일처럼 밀려오는 힘이 느껴졌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뼈가 뒤틀리며 재조립되었다.
울컥!
한건우의 코와 귀로 선혈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사이 드래곤은 빛무리를 향해 빠르게 접근했다.
최고 관리자에게 가까이 갈수록 드래곤의 강건한 신체가 손상을 입었다.
파즈즈즈···.
바깥쪽 날개뼈가 꺾이더니, 꼬리 끄트머리와 발톱부터 조금씩 부서져 나갔다.
드래곤의 신체 곳곳이 압력으로 부서지면서, 내상에서 체액이 스며나오기 시작했다.
타아아앗!
그럼에도 한건우와 드래곤은 물러나지 않았다.
마창 게이볼그의 창끝이 빛무리를 겨누고 있었다.
오로지 빛무리를 향해 돌진하는 것.
그것 하나만 생각했다.
한건우의 발목 아래 부분은 어느새 압력에 짓이겨지고 있었고, 창을 쥔 손도 점차 희미하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왼쪽 눈은 내부에서의 압력으로 인해 뜨여지지 않았다.
한건우는 핏발이 선 오른눈으로 끝까지 빛무리의 중심, 암흑의 구를 조준했다.
‘인간을 우습게 보지 마라. 너희들 맘대로 가지고 놀다가 버리는 장난감이 아니야.’
한건우의 강한 사념은 그대로 진언이 되어 최고 관리자에게 전해졌다.
- 어리석은··· 순순히 관리자의 권한을 부여받았다면 당신은 살 수 있었습니다.
‘아니, 내 운명은 내가 결정한다. 너희 같은 놈들의 장난질은 사양하겠어.’
한건우는 이제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기어이 빛무리의 가운데, 암흑의 핵심까지 도달한 순간.
드래곤은 다시 한번 브레스를 쏘아냈다.
한건우는 드래곤의 등을 박차고, 브레스와 함께 발사체가 되어 나아갔다.
한건우의 손에는 마창 게이볼그가 들려 있었다. 브레스를 타고 나아간 한건우는 최고 관리자의 빛무리 속 어둠의 핵심을 꿰뚫었다.
번쩍!
세상 전체가 밝은 서광으로 밝혀졌다.
붉은 광선이 밤하늘을 뚫고 우주 공간을 밝혔다.
빛무리의 가운데에는 거대한 허무의 공간이 나타났다.
마치 거대한 관통상을 입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남아있던 중력에 의해, 한건우는 암흑 속으로 삼켜졌다.
한건우를 삼킨 빛무리는 더이상 모습을 유지할 힘을 잃은 듯이 몇 번 깜빡이더니 스러져 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건우 씨!”
이비현이 밤하늘을 향해 외쳤다.
그때 커다란 그림자가 추락했다.
의식을 잃고 속수무책으로 떨어지는 드래곤이었다.
박이경과 차은비는 드래곤이 떨어지는 지점을 향해 달려갔다.
터어엉-
터엉-
추락하는 드래곤을 무사히 받아내기 위해 모두 힘을 모았다.
쉴드와 역중력, 마력 그물.
충격을 줄이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다행히 드래곤은 큰 충격 없이 땅에 내려왔으나, 떨어지기 전부터 온몸이 부서져 있었다.
이대로 두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워보였다.
“안돼, 외상부터···.”
임수호가 차은비에게 전륜성왕의 구슬이 박힌 스태프를 건넸다. 버프 특성이 있는 이들은 모두 차은비에게 힘을 모았다.
차은비는 드래곤의 외상 부분에 달라붙어 힐을 쏟아부었다.
외상 부분은 눈에 띄게 붙었으나, 드래곤의 의식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건우 형은 어디 있지?”
한건우의 흔적이나마 찾기 위해 주변을 샅샅이 찾아보았으나, 밤의 폐허는 원망스러울 만큼 평온했다.
결사대의 각성자들이 점차 희망을 잃을 무렵.
이비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한건우 씨가··· 그리고 저희가··· 해냈어요.”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들의 얼굴에 의문이 서려있었다.
이비현은 다시 단호한 얼굴로 강조했다.
“한건우 씨가 목숨을 걸고 우리 세계를 지켜낸 거예요.”
“그럼... 형님은?”
박이경은 울분을 참지 못한 듯, 주먹을 꽉 쥐었다.
봉합한 주먹의 상처에서 피가 터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