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 결사대 (11) - 영혼의 격
메시지 알림과 함께 눈앞이 어두워졌다.
순수한 암흑이었다.
<화식조의 눈>을 발하려 했지만, 갑자기 특성이 말을 듣지 않았다.
“!”
특성 사용뿐만 아니라 모든 감각이 무용해졌다.
인간의 감각으로는 인지할 수 없는 텅 빈 공간에 들어온 듯.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건우는 재빨리 오감을 끌어올렸다.
청각. 촉각. 후각까지도.
위치를 감지하는 공간감까지 전부 마비되면서 어지럼증이 일었다.
그러면서 수많은 시공간이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딱 한 번. 비슷한 경험을 해본 적이 있었다.
‘15년의 시간을 회귀해왔을 때와 비슷해···. 뇌룡의 심장의 히든 스킬이라고 했던가.’
어지럼증이 가라앉자, 한건우가 입을 열었다.
“이곳은··· 어디지?”
아무 빛도 없는 검은 공간.
오로지 자신과 모용황만이 보였다.
둘 사이의 거리는 바로 코앞인 것 같기도 했고, 아득히 먼 것 같기도 했다.
어디가 위이고 어디가 아래인지 몰라도, 투명한 바닥이 존재하여 서 있을 수 있었다.
‘빛이 없는데도 보인다니?’
상식적인 의문이 든 사이.
둘이 쥐고 있던 석판은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투명한 바닥 아래, 발밑 아득히 깊은 곳.
푸른 구가 하나 보였다. 지구의 모습을 닮은 구였다.
‘우주 공간? 그것도 아닌데···.’
액체에 잠겨있는 듯한 느낌이지만, 묘하게도 호흡은 가능했다.
“네놈···.”
모용황도 입을 열었다.
그가 이처럼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서로를 발견했으나, 아까 전처럼 섣불리 공격하지는 못했다.
그보다 이 공간의 정체와 자신들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설마···.”
모용황이 한건우에게 말을 걸었다.
“이 상황도 자네가 짜 놓은 계획의 일부인가?”
“그럴 리가. 나도 예상치 못했어.”
태연한 척 블러핑을 해봐야 소용없는 상황.
한건우는 심상치 않은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모용황도 이미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의 몸 크기만 한 빛무리가 공중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저 빛이 아니라, 두 사람을 압도하는 에너지가 느껴졌다.
“....”
“...!”
한건우와 모용황은 그 빛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빛무리는 두 사람 사이 공중에 멈추었다.
아직도 고개를 들어 올려다봐야 하는 높이였다.
- 너희들은 나로 인해 여기 소환된 것이다.
머릿속에 음성이 들렸다.
아이의 목소리 같으면서도 노인 같기도 했다.
시작은 분명 여성의 목소리였으나 끝날 때는 남성의 목소리였다.
한 존재 안에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 듯했다.
모용황도 같은 목소리를 들은 듯, 귀를 쫑긋 세우고 경계하는 기색이 보였다.
“누구냐?”
“예언 석판의 관리자인가?”
한건우와 모용황은 동시에 빛무리를 향해 물었다.
모용황의 물음이 좀 더 구체적이었다.
빛무리는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기에서는 놀랍게도 감정이 느껴졌다.
신난 것 같기도 했고, 우스운 얘기를 듣고 웃는 것 같기도 했다.
- 뭐라 소개하는 것이 좋을까. 너희 세계선의 수준에 맞추어 설명해줘야겠지.
“?”
- 신? 모든 균열의 주인들을 거느리는 진짜 주인? 너희 세계선의 시스템을 운영하는 최고 관리자? 무슨 이름으로 불리더라도 어차피 내 본질은 같으니.
“뭐··· 뭐라고?”
모용황의 얼굴 근육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그 끄트머리라도 닿기 위해 찾아 헤매던 존재가 바로 코앞에 있다니.
모용황은 상대의 정보를 읽기 위해 <화안금정>으로 빛무리를 바라보려 했다.
그러나 한건우와 마찬가지로, 모용황도 특성을 사용할 수 없었다.
자신을 최고 관리자라 소개한 빛무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설명을 이었다.
- 지금까지 많은 세계선에 예언 석판을 던졌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어. 그래서 내가 직접 이곳까지 내려왔다.
“세계선?”
한건우가 반문했다.
그건 시스템의 정보를 알고 있던 모용황도 사용하던 단어였다.
- 너희들, 그러니까 지구의 지배종인 인간은 지구와 그 주변만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 주위에 관해서는 거의 무지하지. 사실은 무수히 많은 차원과 세계가 존재한다.
“....”
- 각 세계선을 관리하고, 연결하고, 때로는 황혼이 찾아온 세계선을 닫기도 하지. 그게 바로 나의 일이다.
한건우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방금까지 같이 싸우던 동료들, 그리고 한국에 있던 길드원과 여동생까지.
그들이 있던 세계가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 건 아닌지 불쑥 걱정이 일었다.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는 대강 알겠는데. 여기는 어디지? 그리고 내가 있던 세계는 무사한가?”
한건우는 말과 동시에 아공간 무기집에 손을 넣으려 했다.
그러나 무기를 잡으러 뻗은 손은 허공을 쥘 뿐이었다.
‘아공간이 열리지 않는군.’
특성을 쓸 수 없는데, 무기와 아이템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 걱정 마라. 지금은 찰나의 순간을 무한대로 늘여놓았지. 원래 너희가 있던 곳은 만 분의 1초도 지나기 전이다.
“좋소, 어찌 되었든 당신이 예언 석판에 쓰인 시스템의 관리자 권한을 줄 수 있는 존재겠지요?”
모용황이 빛무리에 다가서며 손을 뻗었다.
그의 눈빛에는 권력에 대한 욕망이 형형했다.
“그렇다면 어서 나에게 관리자 권한을 주시오. 돌아가면 할 일이 많으니까 말입니다.”
빛무리는 공중에서 더 낮게 내려와, 한건우와 모용황과 비슷한 눈높이가 되었다.
- 아, 그렇지. 너희들에게는 지금 그게 가장 중요하겠지. 하지만 너희의 경우는 특별하다고.
“두 명이 동시에 석판을 잡았기 때문입니까?”
- 그 점도 있으나, 석판은 자신과 가장 인과를 많이 만들어 낸 자를 알고 있어. 예언 석판이 완성되는 순간, 석판은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게 되지.
빛무리는 마치 둘을 응시하는 듯한 느낌으로 얘기했다.
- 단, 이번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이야.
“나와 저 애송이가 동일한 만큼의 인과를 얻었다는 겁니까?”
모용황은 두려움을 무릅쓰고 분하다는 듯 말했다.
“지금까지 세계 곳곳을 뒤져 석판 조각을 찾기 위해 들인 시간과 노력. 그리고 석판의 개수. 어떤 면으로 보나 명백히 내가 더 많은 인과를 가지고 있소!”
- 시스템의 법칙에는 오류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만들어낸 석판도 마찬가지지.
빛무리가 설명을 더했다.
- 납득하기 어려운가? 최근 지켜본 바로는 너의 행보가 예언 석판의 완성과는 많이 멀어졌던 것 같은데?
‘그렇지. 모용황은 자신이 황혼의 시간을 맞는 새로운 길을 찾아냈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행동에 옮기고 있었으니까.’
- 너희들의 방식으로 표현하면, 자신에게 소홀해진 사람보다는 최근에 잘해주는 사람한테 더 마음이 갈 수 있는 게 아니겠어?
모용황은 억울한 표정을 갈무리했다.
어차피 이 존재에게 따져봐야 소용없다고 느낀 것이다.
“그럼 우리 둘이서 <시스템>의 관리자 권한을 놓고 경쟁을 해야 한다는 겁니까?”
- 그렇다. 너희들의 인과는 동등하니, 석판이 납득할만한 기준을 하나 더 추가하게 된 것이지.
“좋습니다. 그게 바로 자격 검증이라면··· 이야기가 깔끔해지는군요.”
모용황의 눈빛에는 살기와 자신감이 어려 있었다.
빛무리가 경고했다.
- 지구에서와는 다를 거다. 여기는 너희의 영혼만 와 있는 상태니까.
“영혼···?”
모용황이 자신의 몸을 살피며 되뇌었다.
- 진정한 강함은 혼의 격으로 판단할 수 있는 법이지. 의지와 신념이 영혼의 힘이 될 것이다. 우열을 가려 보아라. 패자는 이 자리에서 소멸하고, 승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크흐흐··· 으하하!”
모용황의 얼굴이 밝아지며 광소를 흘렸다.
“수천 년을 버틴 영혼의 격이다! 애송이 하나를 이길 수 없을 리가.”
모용황은 어느새 영혼의 상태에 완전히 익숙해져, 자신의 형체를 자유롭게 변화시키고 있었다.
그는 나이 든 모습이 아닌 모용씨의 초대 가주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젊고 근육질에 대단한 강골로 보이는 몸이었고, 그마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거인처럼 커진 모용황은 빛처럼 빠른 속도로 한건우에게 달려들었다.
“죽어라!”
모용황의 주먹이 엄청난 기세를 품고 날아왔다.
콰아앙-
한건우 근처의 공간이 휘어질 만큼 큰 폭발이 일어났다.
“크흐흐, 궁지에 몰린 쥐가 되었구나!”
그러나 폭발의 충격이 가라앉은 후, 모용황이 본 것은 제자리에 버티고 서 있는 한건우의 모습이었다.
“아니!”
모용황이 놀란 사이, 한건우는 모용황의 품속으로 날아오며 팔꿈치로 모용황의 가슴을 강타했다.
“크어억!”
영혼의 충돌은 육신의 충돌만큼, 아니 그보다 더 묵직했다.
모용황은 덤벼들었던 거리의 몇 배만큼 멀리 튕겨져 나갔다.
“...이럴 수가! 네놈의 격이 이 정도란 말인가!”
한건우 역시 자신의 영혼을 재구성하고 있었다.
외형이 크게 변하지는 않았으나.
몸의 한계를 벗어나면서 낡은 허물을 한 꺼풀 벗은 듯한 자유가 느껴졌다.
한건우는 모용황을 노려보며 말했다.
“나는 나보다 강한 자들을 죽이며 살아왔고, 죽음을 이기고 과거로 돌아왔지.”
“...뭐라?”
방금 ‘시스템의 최고 관리자’라는 자는 분명히 말했다.
의지와 신념이 영혼의 힘이라고.
그 점에서 한건우는 누구보다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과거로···? 그래서였나. 모든 것을 예상하고 움직인다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 그러나 나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고작 후손들의 몸을 빼앗으며 살아온 추악한 노인네 따위와 비교되고 싶지 않군!”
“어리석은 놈. 내가 쌓은 세월의 격을 이길 수는 없다!”
모용황은 드래곤이 브레스를 뿜기 위해 준비하듯, 큰 호흡을 들이켰다.
한건우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기운을 가늠했다.
“죽어라!”
모용황이 한건우를 향해 온 힘을 다해 사자후를 터뜨렸다.
영혼의 격을 쏟아부은 기공포였다.
타앗-
한건우는 모용황의 공격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정면으로 돌격했다.
그는 모용황의 기공포 속을 그대로 뚫고 들어갔다.
“!”
놀란 모용황은 한건우의 접근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자신이 쏜 기공포의 여파가 아직 해소되지 못하여 움직일 수 없었다.
두 사람의 혼이 엇갈리는 순간.
한건우가 모용황을 스치면서 두 팔을 휘둘렀다.
스촤아악!
모용황의 잘린 양팔이 멀리 떨어졌다.
“크아아악!”
모용황의 가슴팍에도 엑스자로 상흔이 파였다.
육신의 상처로 인한 고통은 잊거나 누를 수 있지만.
영혼의 상처에서 나온 고통은 피할 도리가 없었다.
지옥에 떨어진 듯 몸부림치는 모용황을, 한건우가 저승사자 같은 모습으로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영혼의 격은 내가 더 높았던 것 같군.”
한건우가 모용황을 끝장내기 위해 다가가는데.
희미해졌던 빛무리가 다시 한건우의 머리 위로 내려왔다.
- 승부가 난 것 같군요. 생각보다도 더 금방이네요.
“기, 기다려 주시오.”
-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었으므로 그에 따른 처분을 하겠습니다.
빛무리는 완연한 검은색으로 변했다.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듯, 검정보다 더 검은 어둠이었다.
그 빛무리는 모용황마저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안돼! 이 모용황이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죽음을 예감한 모용황은 깊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붙잡을 것이 없어 속수무책이었다.
“끄아아아!”
모용황의 온몸이 쪼그라들었다.
거인처럼 크던 형체가 눌리고 뭉개지기를 반복했다.
수천 년을 살아온 모용황의 영혼은 마침내 주먹 안에 들어올 만큼 작아졌다.
모용황의 영혼이 어두운 빛무리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나서, 한건우가 물었다.
“그자는 어떻게 된 거지?”
- 패자의 운명이 궁금한가요? 다른 죽은 자와 같이, 우주의 일부가 되었다고 해두죠.
“....”
- 자, 이제 예언 석판은 그 주인을 정했군요. 그러면 시스템 관리자의 권한을 부여하겠습니다.
“잠깐만.”
한건우는 단호한 눈으로 빛무리를 마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