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 결사대 (10) - 도박
금고를 든 이비현은 한건우와 일행들의 충격적인 모습을 보고 긴장했다.
‘상대는 단 한명인데?’
대부분은 당장 고꾸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큰 부상을 입고 있었다.
한건우의 발목에서는 너덜너덜해져 피가 흐르고 있었고, 항상 침착해 보이던 얼굴에도 지친 기색이 배어나왔다.
최후의 보스라는 모용황의 세력을 쉽게 이기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로 처참한 상태일 줄이야.
그러나 이비현과 솜브라도 편하게 있던 것은 아니었다.
모용황의 지하성에서 이 금고를 빼내오느라 죽을 뻔하지 않았던가.
‘그 여자, 죽여버릴 거야.’
소소.
이비현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그녀가 싫었다.
출발하기 전.
한건우는 이비현을 불렀다.
- 북경에 가면 따로 부탁할 게 생길 것 같아.
그러면서 그녀와 함께 길드 건물에 갇혀있던 소소를 찾아갔다.
- 지하성의 보안은 철저해서 외부인이 절대 들어갈 수 없지만. 유일한 예외가 있어요. 천망의 간부가 보고를 위해 드나드는 통로죠.
- 거기도 보안이 보통 아닐 것 같은데?
- 아뇨, 다른 경로에 비할 수 없이 쉬워요. 천망 요원들만 속여넘기면 되니까···. 저 아가씨가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죠?
손발이 묶인 소소가 생긋 웃으면서 이비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한건우가 본론을 물었다.
- 그러면 예언 석판이 든 금고는 어디에 숨겨져 있지?
- 아직 모용황 님을 모르시는군요.
- 무슨 소리냐?
- 황제가 자신의 궁 안에서 보물을 숨겨 놓던가요? 금고는 숨겨져 있지 않습니다.
- 뭐? 아무런 저주나 결계 없이 그냥 놓아져 있다는 거야?
- 그렇습니다. 실제로 지하성 안을 지나가며 몇 번 보기도 했고, 제가 가까이 다가가도 아무 일 없었어요.
- ···.
- 귀한 아티팩트를 바닥에 두어도 감히 훔쳐갈 사람이 없을 곳인데. 하물며 아무도 열 수 없는 금고를 숨겨둘까요?
한건우는 <거짓 간파>를 써보고, 소소의 말이 진실임을 확인했다.
그러나 소소의 방을 나오면서 팔짱을 꼈다.
- 설령 소소가 저렇게 알고 있더라도, 모든 걸 아는 건 아니야. 일단 침투로와 위치를 파악한 건 다행이지만··· 방심하면 안돼.
- 걱정 마세요. 적진에서 방심하는 일은 없어요.
이비현은 소소의 말을 반만 믿었다. 그리고 그게 이비현의 목숨을 살린 셈이었다.
우선 천망의 간부가 이용하는 침투로까지는 무리 없이 들어왔다.
그 후, 지하성 안에 숨어들 때가 문제였다.
- 여기서 은신하고 기다리세요.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탈출하시구요. 이제부터는 나 혼자 가겠습니다.
- 대장님!
이비현은 만류하는 부하들을 떼놓고, 혈혈단신으로 지하성의 궁궐 안으로 들어갔다.
소소가 말한 내실로 들어가니 검은 금속으로 된 사각형의 금고가 보였다.
정말로 지키는 사람 하나 없었고, 방어막이나 트랩 같은 것도 안 보였다.
‘저건가?’
보는 눈은 없었지만.
이비현은 <그림자 맹시>를 쓰고 그림 리퍼의 사슬낫을 든 채, 조심히 금고에 접근했다.
아다만티움 금고이니, 강철보다 훨씬 무거울 터.
미리 근력을 강화해주는 아이템 팔찌도 착용했다.
그런데도 이비현은 뭔가 불길한 감각으로 인해 함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지금 이 곳에 나 말고 누군가 또 있어, 분명히!’
이비현은 금고로 다가가려는 움직임을 멈추고 심장박동을 늦추기 위해 호흡도 늦춰버렸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감당할 수 없을 정도까지 호흡과 심장박동을 늦춘 상태에서, 오감을 예민하게 일깨웠다.
아주 미세한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확한 위치가 파악되지는 않았다.
머리에서 발생한 땀이 눈썹 끝에 맺혔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공간에 자신과 같은 암살자 클래스의 각성자가 숨어있다는 걸.
아마도 금고만을 비밀스럽게 지키는 천망의 요원인 듯했다.
이비현과 이름 모를 암살자.
둘은 갈대숲에 숨어 서로를 노리는 맹수처럼 서로를 살폈다.
맹수가 직감적으로 상대의 실력을 알아보듯이.
이비현도, 그도.
상대가 자신만큼 강하다는 걸 알았다.
‘암살자에게 주어진 기회는 단 한번. 먼저 자신의 위치가 드러나는 사람이 죽겠지.’
암살자 간의 목숨을 건 게임의 룰이었다.
‘....’
극도의 긴장 속에서 시간이 느려지는 듯했다.
‘아무리 완벽한 은신이라 하더라도 분명히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드는 곳에 그자가 있을 거야. 어디냐.’
아무것도 없는 방안의 조명은 어둑했다.
방 가운데 놓인 널찍한 탁자 위에 금고만이 존재했다.
조명의 반사로 방 내부를 천천히 살펴보았으나, 미세한 빛의 굴절이 일어나는 곳은 보이지 않았다.
호흡을 멈추고 자신을 감출 수 있는 시간은 한계가 있었다.
한건우를 위해서라도 빨리 금고를 확보해야 했다.
‘내 감을 믿어야 해.’
이비현은 몸을 빠르게 회전시키면서 허벅지에 차고 있던 단검을 금고가 놓여 있던 테이블 밑으로 던졌다.
차르르···.
그와 동시에, 그림 리퍼의 사슬낫을 들어 자신의 앞을 휘두르면서 풍압을 일으켰다.
슈욱!
- 커억···.
은신술을 쓰고 있던 암살자가 드러났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목에 박힌 단검을 뽑으려 했다.
바닥에는 이비현이 일으킨 풍압에 의해 암살자가 던진 침들이 떨어져 있었다.
끝에는 맹독이 발라져 있었던 듯.
바닥이 부식되고 있었다.
이비현은 사슬낫을 들고 암살자에게 다가갔다.
- 다음부터는 신중하게 공격해. 다음은 없겠지만.
- 크어억···.
이비현은 암살자의 시체를 숨기고, 조심스레 금고를 들고 나왔다.
*
이비현이 들고 온 아다만티움 금고를 보고, 모용황의 얼굴이 굳었다.
“네년이 감히, 어떻게?”
모용황의 주위에서 분노의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올라왔다.
다른 곳도 아닌 모용황의 지하성에서 물건을 훔쳐 나왔다는 사실에 크게 당황한 듯했다.
이비현은 말없이 한건우에게 금고를 건넸다.
솜브라의 부하들도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모용황은 다시 여유로운 모습을 되찾았다.
“지금 당장 금고를 가진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나? 여기서 살아나가지도 못할 것이며, 석판의 나머지 조각 두 개를 언제 찾을지 기약도 없지 않나.”
“흐음···.”
“무엇보다 찾는다 해도 금고를 열지도 못할 것인데. 예언 석판이 다 무슨 소용이냐?”
한건우가 피식 웃었다.
“모용황,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잖아. 당신도 내가 없으면 영영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없는 것 아닌가?”
“....”
“당신과 뜻을 함께하던 주인들은 다 내 손에 죽었다. 그들이 쓰던 특성은 이 세상에서 오직 나 하나만이 사용할 수 있지.”
모용황이 성긴 수염을 어루만지며 느긋한 태도를 보였다.
“호오, 그걸로 협박이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아쉽게도 소용이 없네.”
“?”
“난 이제 예언 석판의 내용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네, 어차피 황혼의 시간을 막을 방법은 이미 찾았으니까.”
“당신이 찾았다는 그 방법, 정말 확실한가?”
모용황은 자신을 의심해 불쾌하다는 표정이었다.
“어이가 없군. 당장 확인이 된다면 모를까, 그런 말로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모용황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예언 석판은 일곱 조각이지. 우리 아르고스가 수십 년을 바쳐서 겨우 다섯 조각을 찾았다. 나머지 둘은 세계 어디에 숨어있는지도 모르고, 이미 찾을 기회를 놓쳤을지도 몰라. 아무리 자신만만한 자네라도 뭐든지 해낼 수는 없다네.”
“모용황. 사실 반신반의했는데··· 정말 모르고 있었나?”
모용황은 한참 동안 한건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의혹과 불신이 번졌다.
“설마··· 벌써 조각을 찾았을 리가.”
“못 믿겠나?”
한건우는 자신의 아공간 주머니 속에서 예언 석판 하나를 꺼냈다.
“허!”
모용황의 눈이 커졌다.
“당신의 <화안금정>이라면 이 석판이 진짜인지 아닌지 정도는 알 수 있겠지. 자, 확인해 봐라.”
모용황의 화안금정이 황금빛으로 번뜩이며, 석판을 샅샅이 살폈다.
“진실이로군, 진실이야. 석판 조각을 찾아오다니. 정말 아까운 인재야.”
“당신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내가 석판의 조각을 가져온다면, 한명의 동등한 주인으로 인정해 준다고.”
한건우의 일행들은 무슨 상황인지 몰라 멍하니 대화를 들을 뿐이었다.
“하하, 이제 서로 칼날을 세운 마당에, 공허한 약속이 되었지.”
모용황의 몸 주변에서 날카로운 기운이 솟구쳤다. 공격 자세를 취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 한건우가 석판을 부술 듯이 꽉 쥐었다.
“!”
모용황의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팽팽한 긴장 속에서, 한건우가 말했다.
석판 조각은 탐스러운 인질처럼 한건우의 손에 들려있었다.
“예언 석판에는 큰 힘이 담겨있지만, 그 조각은 그리 단단하지 않군. 내가 손끝에 힘만 주면 충분히 부술 수 있겠어.”
모용황은 분노한 눈빛으로 한건우를 바라보았다.
“쥐새끼같이 구는구나. 예언 석판 따위, 무시하면 그만이다.”
모용황은 배짱을 부렸다.
그러나 한건우는 욕망으로 떨리는 그의 시선을 읽었다.
‘이자는 절대 예언 석판을 포기 못 한다.’
무려 시스템의 관리자 권한.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권력이 생길 것이다.
인간의 한계를 넘고, 차원의 한계를 넘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용황은 그 힘을 원할 것이고.
지금은 한건우도 그 힘이 필요했다.
이판사판.
한건우는 모험을 걸고 있었다.
될지 안될지는 모른다. 그러나 해봐야 했다.
이대로라면, 모두가 아는 세상은 끝이니까.
0시가 지나면 다시는 그전의 세상으로 되돌릴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건 상황을 반전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였다.
“모용황, 나도 석판을 부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무슨 말이냐?”
“당신이 이겼다. 난 당신에게 이길 수 없어.”
“그 말은... 자네가 나에게 복종하겠단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나?”
길드원들이 입을 벌리고 한건우를 바라보았다.
“그렇다. 그 의미로 내가 찾은 석판을 내어주지. 그리고 금고를 여는 것에도 협력하겠어.”
“뭐라고?”
모용황은 반신반의하는 듯했다.
그러나 긴장을 놓지 않고, 한건우의 표정을 시시각각 살폈다.
“대체 갑자기 변심하는 이유가 뭐지?”
“변심이 아니다. 당신에게 이기지 못한다는 걸 확인했어. 그리고 이번 조각을 맞추면 예언 석판의 내용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
석판을 맞출 때마다 하나씩 숨겨진 히든 메시지가 풀렸으니. 이번에는 예언의 내용이 나올지도 몰랐다.
“그 내용을 하루빨리 확인하는 것이 앞으로의 인류를 위해 더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해.”
“....”
“마지막 조각을 찾는다면 그것도 바치겠어. 당신이 시스템 관리자의 힘을 가지면 당신 밑에서 당신을 섬기겠다. 그 대신에 조건이 있다.”
“당연히 그렇겠지. 무엇이냐?”
“나와 같이 온 길드원들의 목숨과 지위를 보장해줘.”
“마스터!”
“건우 씨, 안돼요!”
한건우 주위에 있던 각성자들은 모두 놀란 표정으로 한건우를 바라보았다.
특히 박이경은 울분에 차서 한건우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차은비와 임진호가 박이경을 잡고 매달렸다.
모용황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렇다면 일단, 석판의 조각을 가지고 내 앞으로 와라. 허튼 짓을 하면 네 주위에 있는 자들의 목숨부터 거둬가지.”
“좋아..”
한건우는 한손에 석판 조각을, 반대쪽 팔꿈치에는 금고를 낀 채로 천천히 모용황의 앞으로 걸어갔다.
일행들과 한참 떨어져, 폐허가 된 정원 한가운데.
모용황과 한건우만이 서 있었다.
부상을 입은 일행들이 한건우를 돕기 위해 다가오려 하였으나.
한건우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들에게 경고했다.
가까이 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금고를 열기 전에, 석판 조각을 넘겨라.”
모용황이 손을 내밀었고, 한건우는 조각을 넘겨주었다.
먼저 모용황이 <화안금정>으로 금고의 봉인을 풀었다.
이어서 한건우도 하나씩 특성을 발동했다.
<다이아몬드 폼>.
<죽은 자의 날>.
<피의 군주>.
그리고 <강신>까지.
철컹!
다섯 개의 봉인이 풀리고, 절대로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아다만티움 금고가 열렸다.
모용황은 6번째 조각을 맞추는 데 집중했다.
그가 조각을 맞추자, 석판에서 광채가 번뜩였다.
모용황이 멈칫하는 순간.
한건우는 숨기고 있던 7번째 조각을 꺼내어 맞추었다.
“!”
석판이 완성되는 순간.
모용황과 한건우 모두 석판을 잡고 있었다.
- 예언 석판 완성(7/7)
- 관리자의 권한을 부여합니다.
- 오류 발생
- 자격 검증이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