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 결사대 (5) - 드래곤 슬레이어
“저게 말이 돼?”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지?”
“미쳤다, 미쳤어···. 사람이 아니야.”
각성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곳에 있는 50여명의 각성자들은 주로 아레스와 알파스의 길드원들, 그리고 이비현의 부하들이었다.
한건우의 최측근 말고는, 한건우가 싸우는 모습을 실제로는 처음 보는 이들도 있었다.
모두 프라이드가 있는 강한 각성자였지만. 방금 본 전투 장면이 그들의 혼을 빼놓고 말았다.
“어이, 막내야. 턱 빠지겠다.”
박이경은 실실 웃으면서 자신의 길드원을 툭 쳤다.
박이경이 막내라고 부른 사람은 임수호, 임진호와 같은 ‘투견장’에서 나온 네크로맨서였다.
이제까지 네크로맨서는 왠지 한건우의 길드원들과 잘 어우러지지 못하고 대립각을 세우곤 했는데.
오늘 한건우의 활약을 보고는 넋이 나가 있었다.
“아, 아닙니다.”
네크로맨서가 황급히 표정을 갈무리했다.
자기 부하가 다른 길드 마스터를 보고 감탄하고 있는데도. 박이경은 조금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이제 좀 알겠냐? 내가 건우 형님을 왜 따르는지 말야!”
박이경은 경탄의 눈으로 한건우를 바라보았다.
임수호와 임진호 형제도 잔뜩 흥분한 채였다.
“저게 북경의 황룡이지?”
“...건우 형이 드래곤을 잡았어.”
“그러면 드래곤 슬레이어 아니야?”
“와··· 그런 사람이 있었나?”
“세계 최초지.”
수십 년 전 북경을 파괴했다는 전설의 황룡.
그 크기를 볼 때 해츨링도 아닌 성체였다.
그 드래곤을 저토록 수월하게 잡다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건우 씨, 괜찮으세요?”
“마스터!”
이비현과 은설아가 그리핀을 타고 훌쩍 날아서 다가갔다.
한건우는 숨을 고르며 황룡의 사체 옆에 내려앉았다.
황룡은 뱀처럼 긴 몸을 힘없이 늘어뜨리고 죽은 채였다. 드래곤끼리의 싸움으로 황금색 비늘에 스크래치가 나 있었다.
치이이익-
가까이 가자, 죽은 드래곤의 살에서 검은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한건우가 창을 꽂은 안쪽이 인드라 신격의 뇌전으로 새카맣게 타 있었다.
[황룡을 처치했습니다! 경험치 + 30000]
“....”
기가 막힐 정도의 경험치에 한건우는 기함했다.
지금은 스탯 하나를 올리기가 어려울 정도의 단계였는데. 이 정도라면 스탯 포인트를 올리고도 남았다.
‘드래곤을 잡는 게 이렇게 쉬워졌다고?’
자신이 충분히 강해졌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애초에 처음 볼 때부터 압도적인 느낌이 아니었어.’
각성자든 마수든, 처음 마주치고 나면 대강의 견적이 나오기 마련.
황룡이 등장했을 때, 한건우가 받은 느낌은 이랬다.
‘분명히 강하지만, 충분히 때려눕힐 수 있는 상대.’
그리고 그 견적은 맞아 들어갔다.
한편으로는 믿기지 않았다. 부상조차 입지 않고 성체 드래곤을 깔끔하게 잡다니.
한건우는 황룡의 가슴께로 다가갔다. 마창 게이볼그가 꽂혔던 자리였다.
‘분명히 이쯤에서 느껴졌어.’
한건우는 오른손에 다이아몬드 폼을 취했다.
그의 손끝이 영롱하게 빛났다.
푸욱!
한건우는 손을 황룡의 몸속으로 푹 집어넣었다. 인드라의 뇌전을 맞고 타버린 속살이 아직 뜨거웠다.
촤아악!
한건우가 옐로 다이아몬드처럼 보이는 커다란 돌을 빼냈다. 따뜻한 돌에서 광채가 번뜩이면서 엄청난 마기가 느껴졌다.
“억! 저건···.”
“드, 드래곤 하트다!”
사람이 드래곤 시체에서 맨손으로 드래곤 하트를 뽑는다니.
살아생전 두 번은 보기 어려울 광경이었다.
이계 유적에서 발견한 빙룡의 시체 하나로, 한건우의 길드가 얼마나 성장했던가.
가장 중요한 드래곤 하트를 마수의 알 부화에 쓰고, 남은 사체 부산물만으로도 그 정도였다.
만약 결사대가 성공해서 돌아간다면, 거의 이걸로 국가를 다시 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마스터, 괜찮으세요?”
황급히 달려온 차은비가 한건우의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녀의 입술이 벌어졌다.
“아니, 이건 정말··· 마스터는 괴물이에요, 괴물.”
차은비가 할 일이 거의 없었다.
피로도가 쌓인 근육과 인대를 치유하고, 깊지 않은 상처를 몇 개 손보니 끝이었다.
“팔문금쇄진은 파괴됐군요.”
“네?”
한건우는 황룡이 빠져나오면서 박살난 구조물을 바라보았다.
구조물에 맺혀있던 마력 불빛은 사그라들었다. 그것뿐 아니라, 땅밑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느껴지던 진동도 멎은 듯했다.
“땅밑에 이런 진형을 설치해두다니. 잘못 빠져든 사람은 다 죽었겠어요!”
차은비가 몸서리를 쳤다.
‘나만 살려두고 나머지는 죽이려고 한 건가?’
아까 황룡이 내뱉은 말에 의하면, 모용황은 한건우 일행이 쳐들어오는 걸 알고 있었다.
사실 그건 놀랍지 않았다.
설령 몰랐다 하더라도, 그의 영역에서 이 정도로 난리를 쳤으면 알아채는 건 시간 문제니까.
모용황은 한건우만 살려두라고 지시했다.
그 이유는 알 만했다.
‘내가 없으면 예언 석판의 봉인을 풀 수가 없으니까 그렇겠지?’
이제 석판은 자신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행세하더니,
‘시스템의 관리자 권한’이 퍽 탐났던 모양.
‘절대로 모용황에게 관리자 권한을 내줘서는 안 돼.’
지금 모용황과 천망에서 한국을 대상으로 공들여서 한 실험을, 손쉽게 전세계 대상으로 확대할 수 있을 테니까.
“지금 바로 들어갈까요?”
“아니요, 재정비를 해야겠습니다.”
팔문금쇄진 안에서 병마용과의 전투를 치루느라 모두 진이 빠진 상태. 1안이었던 기습은 어렵게 된 상황.
선전포고한 상태라고 생각하고 제대로 정비해서 들어가는 게 나을 것이다.
부상자들을 치료하다 보니,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겨울이 아니더라도 북경의 밤은 추운 편이었다. 먼저 야영지 구축을 해야 했다.
각성자들이 나서려 할 때, 한건우가 손끝을 움직였다.
[특성 발동 : 금속 조작]
그르르르르- 터엉!
대지에서 나온 금속 성분이 모여 순식간에 야영지 건물을 이루었다.
예전에 만주에서 태일제가 보여준 능력이었다. 아니, 그보다 훨씬 대단했다.
하룻밤만 머물다 가기에는 지나치게 견고하고 큰 저택이 지어졌다. 거의 작은 성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이런 면에선 각성자라 좋은 점이 참 많네요.”
이비현은 한건우의 방에 들어와 있었다.
“오늘도 고생 많았어.”
한건우도 자신의 몸 상태를 체크하고, 장비를 점검하며 내일을 위한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
“적들이 기습할 가능성은 없을까요?”
“설아가 테이밍한 마수들이 주변을 지키고 있고, 각성자들도 번갈아서 경계근무를 서고 있어.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대응할 수 있을거야.”
“건우 씨는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단신으로 황룡을 잡아내다니. 이제 국내 1위가 아니라 세계 1위의 각성자가 아닐까요.”
“글쎄, 여전히 모용황이 세계 1위일 것 같은데.”
“그자가 정말 그렇게 강한가요? 건우 씨보다 강한 각성자라니··· 상상이 되질 않아요.”
“나도 스스로 예전보다 훨씬 강해졌다고 생각해. 적들을 죽이면서 몇 단계는 성장한 느낌이로. 그럼에도 아직 그 자를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은 안 들어.”
한건우가 담담하게 말했다. 이건 다른 이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내용으로, 상대가 이비현이니 털어놓는 속마음이었다.
“단순히 스탯이나 능력이 강한 것을 넘어서서, 모든 게 평범한 인간의 범주에서 판단할 수 없다는 느낌이야.”
“너무 걱정 말아요. 우리 모두 당신과 함께할 거에요.”
이비현이 조금 뜸을 들이다가 덧붙였다.
“그리고 저도···.”
한건우가 미소지었다.
“고마워. 이번 일만 잘 끝나면 평화의 시대가 올 거야. 그때는 우리 둘이서 여행이라도 떠나자.”
“여행··· 이요?”
“그래. 작전이나 균열 공략 말고, 진짜 여행.”
그때, 한건우의 감각에 이질적인 느낌이 포착되었다.
“서쪽 외곽이야. 뭔가 있어.”
이비현도 바로 장비를 챙기고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모용황이 보낸 적들일 거야. 사람들에게 알려줘!”
한건우는 빠른 속도로 앞장섰다. 이질적인 기척이 느껴진 곳으로 향했다.
야영지 외곽, 각성자들이 번갈아 2인 1조로 경계근무를 서는 지점이었다. 더 바깥쪽에는 은설아가 테이밍한 마수들이 공중과 지면, 땅속까지 전방위로 진을 치고 있었다.
“마스터, 어쩐 일이십니까. 이곳은 별일 없습니다.”
얼굴을 보니 낯이 익었다.
한명은 자신의 길드원이었고, 한명은 박이경의 길드원이었다.
“수상한 움직임은 없었습니까?”
한건우는 주위를 경계하면서 물어보았다.
“네, 아직까지 별다른 움직임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이 생긴다면 바로 보고하겠습니다.”
군더더기 없는 대답이었다.
주변에도 별다른 흔적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건우는 꺼림칙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한건우는 돌아가는 척하면서 길드원에게 사담을 걸었다.
“출발하기 전에 별도로 무기를 지급받지 못하셨군요. 영표가 미처 챙겨주지 못했나 보네요.”
“아, 괜찮습니다. 워낙 급박하게 왔으니까요.”
그러자 한건우는 바로 <그래비티 필드>를 가동시켰다.
쿠웅-
한건우의 길드원은 바닥에 엎어진 채로 붙박혀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가 숨을 컥컥대며 사정했다.
“마··· 마스터! 저한테 왜 갑자기 이러시는 겁니까?”
“내 길드원이 아니군.”
출발하기 직전, 한건우와 박이경은 길드의 무기고를 전면 개방했다. 자유롭게 무기와 보급품을 챙기도록 했다.
잊어버릴 래야 잊어버릴 수 없는 일이었다.
옆에 있던 알파스의 길드원이 한건우를 향해 암기를 던지면서, 품속에서 세검을 꺼내 한건우에게 돌진했다.
‘이놈도 알파스의 길드원이 아니군.’
동귀어진.
자신이 죽더라도 한건우에게 상처를 입히겠다는 각오였다.
암기와 칼날에 시퍼렇게 흘러내리는 액체는 구태여 확인하지 않아도 극독이었다.
[특성 발동 : 위상 전환]
파앗!
마구잡이로 덤비는 적을 상대하는 건 숨 쉬는 것보다 쉬웠다.
한건우는 상대방과 자신의 위치를 바꿔버렸다.
알파스의 길드원을 사칭한 자는 한건우에게 세검이 스치기도 전.
자신이 날린 암기에 맞아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어갔다.
한건우는 그자의 등을 밟고, 자신의 길드원을 흉내내고 있는 자에게 물었다.
“원래 여기서 보초를 서던 이들은 어떻게 했지?”
“크큭, 그걸 내가 말해줄 성 싶으냐?”
한건우가 <마인드 컨트롤>을 써서 심문하려던 동안. 그자는 입안에 숨겨놓은 독약을 깨물어버렸다.
“...!”
이렇게 쉽게 자결할 줄은 몰랐다. 한건우는 이들의 죽음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사이 발빠른 각성자들이 따라왔다.
“혀, 형님···?”
대지를 쿵쿵 울리며 달려온 박이경이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자신의 부하를 한건우가 죽인 모양새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비현이 두 명의 시체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녀가 죽은 자들의 목 언저리에서 얇은 피막 같은 것을 주욱 벗겨냈다.
“...뭐요!”
“인피면구. 얼굴 가죽으로 만든 가면이에요.”
가면을 벗기자, 낯선 얼굴들이 드러났다.
체형만 비슷할 뿐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천망의 요원들이 침투했군.”
한건우가 말했다.
차은비는 적들의 몸 상태를 살피며 숨을 삼켰다.
“어휴, 둘 다 지독한 독이네요. 잘못 맞으면 치료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죽을지도 몰라요.”
박이경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럼··· 내 부하는 어디 있지. 죽은 거요?”
“네, 죽이고 나서 얼굴 가죽을 벗겨서 사용한 것 같아요.”
보초 2명이 동시에 죽고, 천망의 요원들로 바꿔치기 당한 것이었다.
“용서 못 한다, 이놈들.”
부하를 잃은 박이경이 울분을 터뜨렸다.
그때 야영지 중앙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습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