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 결사대 (4) - 황룡의 분노
한건우는 일행이 통로를 빠져나가는 시간을 계산하면서, 주위 공간을 둘러보았다.
‘팔문금쇄진의 함정··· 이걸 움직이려면 상당히 강력한 에너지가 필요할 거야.’
일행이 완전히 빠져나갈 때쯤, 함정을 역으로 이용해서 이 진형을 부술 생각이었다.
전장을 바깥으로 바꾸던지, 아니면 저 길쭉한 용을 땅밑에 파묻어 버리던지.
‘아직 다음 함정은 나타나지 않았어.’
한건우는 지금까지 진형에 나타난 함정들을 생각했다.
보통 수준의 침입자들이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죽었으리라.
‘최초의 추락에서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수천의 병마용에 휩쓸려 고전했겠고.’
궁수들의 화살비, 그리고 전차와 보병의 돌격.
병마용은 지휘관의 지휘에 따라 변화무쌍한 전술을 펼쳤다.
그리고 병마용 군대를 해치울 때쯤 되자, 황금색 용암이 그들을 덮쳤다.
한건우가 수은의 강으로 제방을 만들어내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용암에 휩쓸려 죽던지, 아니면 높은 곳으로 도망갔으리라.
마침 가운데 보이는 높은 누각.
거기 올라갔다가는, 천장에서 거꾸로 된 누각이 내려와서 납작해지는 식이다.
그 후에는 황룡이 나타났다.
‘황룡은 최후의 보스 같은 존재이지 함정 자체는 아닐 거야.’
아니라면 황룡이 자유롭게 진형 안팎을 드나드는 틈새 같은 게 있을 턱이 없으니까.
한건우는 진형 설계자의 심리로 들어가 보았다.
‘이제까지 본 팔문금쇄진의 함정들은 충분히 강력하지만··· 공중에서 날 수 있는 침입자에게는 큰 타격이 없다.’
다음 함정은 분명히 공중에 체류하는 각성자들도 꼼짝없이 당할 만한 것이어야 한다.
자신이 이 진의 설계자라면, 분명히 지금쯤···.
‘독연. 아니면 산을 퍼붓겠군.’
낭패였다.
다른 함정이라면 그 물리력을 거꾸로 이용할 궁리를 해보겠는데.
독이나 산 공격이라면 그냥 버텨내야 할 판이었다.
한건우는 지하공간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스으윽!
천장 곳곳.
일정한 간격으로, 노즐이 고개를 내밀었다.
꼭 화재를 막기 위해 물을 뿌리는 스프링클러처럼 보였지만, 그럴 턱이 없었다.
솨아아아아아-
아니나 다를까.
치명적인 강산성의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핏빛을 띠는 빗물이 순식간에 사방을 뒤덮었다.
치지지지지-
핏빛의 액체는 쇳덩이도 순식간에 녹일 만큼 강한 산이었다.
[크크큭.]
황룡은 몸 대부분을 통로 쪽에 우겨넣으며 꽁꽁 또아리를 틀고, 머리 끝만 살짝 빼내 한건우를 보았다.
한건우와 드래곤이 녹아내려 죽는 모습을 지켜보겠다는 심산인 듯했다.
‘저놈도 피할 정도라고?’
한건우가 다이아몬드 폼으로 변신하고, 드래곤에게도 <믿음의 방패>를 걸어주었다.
솨아아아-
치지···. 칙!
지상 최강의 방어 특성인 다이아몬드 폼이지만, 핏빛의 강산성 액체에 뒤덮이자 후끈한 기운이 느껴졌다.
드래곤은 날개를 거세게 펄럭이며 좁은 공간 속에서 종횡무진 날았다.
드래곤은 산성비 속에서 눈꺼풀을 제대로 뜨지 못해 자꾸만 벽면에 몸통이 부딪쳤다.
“음?”
그러던 중, 한건우는 익숙한 감각이 들었다.
핏빛의 빗방울을 손끝으로 뭉갰다.
‘아하.’
운이 좋았다.
한건우는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특성을 발동했다.
[특성 발동 : 피의 군주.]
스스스스스···.
그르르르···.
[뭐지?]
황룡이 눈을 번쩍 떴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쏟아져내리는 강산성의 액체는 공중에 동그랗게 뭉치기 시작했다. 땅이나 용암 위에 떨어졌던 액체마저 다시 솟아올라 구에 뭉쳐졌다.
지하 공간 전체에 몇십 톤을 쏟아부었는지. 구의 지름만 수 미터에 이르렀다.
“푸른 해룡의 피.”
이계의 물질 중에서 가장 강한 산성을 띠는 액체.
바로 푸른 해룡이라 불리는 아룡종의 혈액이었다.
한건우는 피를 다루는 특성으로 해룡의 피를 제어할 수 있었다.
콰아아아-
한건우는 곧바로 황룡에게 푸른 해룡의 피를 쏟아부었다.
[크아악! 안돼!]
강산성의 핏물에 뒤덮인 황룡은 온몸을 지렁이처럼 뒤틀며 용틀임을 하더니, 통로로 나가기 시작했다.
황룡은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돌벽으로 이뤄진 통로에 계속 몸체를 부딪쳤다.
슈우우-
한건우는 드래곤을 탄 채로 황룡의 뒤를 쫓았다. 황룡이 돌벽을 박살내며 통로를 넓혀준 덕에 날개를 조금 붙이고 잘 통과할 수 있었다.
콰아아-
황룡은 푸른 해룡의 피를 뒤집어쓴 채, 통로 천장에 정면으로 부딪쳤다.
콰르르르···.
진형을 이루는 기계 장치가 부서지고, 천장 위쪽이 뻥 뚫렸다.
“지름길이냐? 고맙다.”
한건우는 미꾸라지 같은 황룡을 쫓아 위로 올라갔다.
*
그때, 먼저 진형을 빠져나간 일행들은 모두 비행 마수를 한 마리씩 잡아타고 있었다.
북경은 야생 마수의 천국이었고, 은설아에게는 놀이공원이나 다름없었다.
옛날에 그리핀 몇 마리를 길들일 때도 전전긍긍하던 때가 있었는데. 어느새 그녀는 마수 군단을 자연스럽게 이끌고 있었다.
대장을 태워서 기세가 등등해진 그리핀이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우리는 여기서 마스터를 도와줄 수 있는 걸 해요!”
“그게 뭔데, 꼬마?”
박이경은 날개 달린 백사자를 타고 은설아를 따라왔다. 무거운 박이경을 태우느라 헥헥거리는 백사자가 불쌍해 보였다.
“저쪽에 인공 구조물 같은 게 보여요. 이 진형을 움직이는 축 아닐까요?”
“오케이, 가보자!”
중앙에 기계장치처럼 보이는 구조물이 있었다. 빛이 새어나오는 걸로 봐서 뭔가 작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걸 부숴 버리면 된다는 거지?”
박이경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휙 뛰어내렸다.
<거대화>와 <신체 강화>를 발동하고, 바윗덩이 같은 주먹이 구조물을 노리고 내리찍었다.
그 순간.
콰과와아-
“으헉!”
안쪽에서 구조물을 부수고 튀어나온 황룡의 머리에, 박이경의 주먹이 정면으로 내리꽂혔다.
졸지에 황룡에게 딱밤을 먹인 박이경.
그의 몸이 충격으로 멀리 튕겨나가 데굴데굴 굴렀다.
황룡이 빠져나오고, 한건우의 드래곤이 바싹 뒤쫓아 나왔다.
일행이 입을 떡 벌렸다.
웬만해선 놀라지 않는 그들이지만.
이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설아야, 물러서 있어!”
한건우가 은설아에게 지시했다.
은설아는 모든 비행 마수들을 뒤로 물렸다. 거기에 탄 각성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르르르···.
황룡은 분노에 사로잡혀 눈빛이 희번득했다.
[방심했군.]
“과연 그것 때문일까?”
한건우가 비웃자, 노한 황룡이 숨을 깊이 들이켰다.
주위의 공기가 빨아들여지면서, 대기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구름의 움직임까지도 영향을 받을 정도였다.
후우우욱-
황룡이 브레스를 쏘기 직전.
한건우는 푸른 해룡의 피로 만든 구체를 황룡 주위로 쏘아보냈다.
산성을 띠는 액체가 황룡의 코와 입 속으로 그대로 훅 빨려들어갔다.
쿨럭! 쿠르륵!
황룡이 긴 몸뚱아리를 회오리치며 미친 듯이 기침을 내뱉었다. 준비하던 브레스는 그대로 사그라들었다.
[가, 감히!]
황룡의 눈에 광기가 서렸다.
황룡은 브레스를 포기하고, 긴 꼬리를 쳐서 순식간에 드래곤 가까이 이동했다.
휘리릭!
드래곤의 몸통을 뱀처럼 감으면서 날개 힘줄을 콱 물었다.
[악! 아파!]
“진정해!”
드래곤이 몸부림치면서, 한건우는 드래곤을 놓치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당황한 드래곤은 앞발로 황룡을 쳐냈다. 황룡이 몸통을 조이던 것을 잠시 풀었다. 수십 미터 크기의 두 드래곤이 공중에서 엎치락 뒤치락 하기 시작했다.
드래곤은 빠른 속도와 방향 전환에 자신이 있었지만, 자신보다 더욱 자유롭게 움직이는 상대를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완전한 성체 드래곤. 가까이에서 붙으면 드래곤 쪽이 기세에서 밀리는 것이 사실이었다.
한건우가 멀리서 드래곤에게 소리쳤다.
“구름 속으로 들어가!”
드래곤은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르고, 위로 올라갔다. 거의 수직 발사 수준의 곡예 비행이었다.
황룡은 드래곤을 뒤따라 거침없이 따라 올라왔다.
하늘로 올라가는 중, 두터운 구름층 속으로 들어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지금이군!’
뒤따라 날아가던 한건우가 아공간 무기집에서 스톰 브링거를 뽑았다. 지난번 싸움으로 내구도가 많이 떨어졌지만, 잠시 돌풍을 불러오는 정도는 충분했다.
휘유우웅-
순식간에 구름이 없어지면서, 가려져 있던 정오의 태양빛이 비춰졌다. 한건우의 드래곤은 재빨리 태양을 등지고 몸을 틀었다.
[!]
깊은 지하의 어둠 속에서 나와서, 갑자기 강한 태양빛을 마주한 황룡.
황룡은 크게 확장되었던 동공을 축소하며, 잠시 드래곤의 움직임을 놓쳤다.
콰아악!
그 사이, 드래곤이 황룡의 몸통을 물었다.
황룡은 빠져나오려고 몸을 강하게 뒤틀었다.
그러나 드래곤은 황룡의 몸뚱이를 놓아주지 않았다. 밑날개와 뒷발톱으로 황룡을 강하게 얽어버렸다.
슈우-
드래곤은 대지를 향해 빠른 속도로 낙하했다. 지상에 가까워지자, 드래곤은 황룡을 바닥으로 거세게 패대기쳤다.
구우우웅-
황룡은 굉음을 내며 땅에 처박혔다.
드래곤도 속도를 미처 다 줄이지 못해, 정상적으로 착지하지 못하고 땅에 구르면서 멈췄다.
그리고는 황룡이 떨어진 곳을 향해 바로 브레스를 발사했다.
뇌전과 빙정이 섞인 죽음의 브레스였다.
황룡이 완전한 성체 드래곤이라면, 한건우의 드래곤은 성체가 되어가는 청소년기.
그런데도 드래곤의 브레스는 근처의 지형을 바꿀 정도였다.
폭탄이 떨어진 듯 거대한 구덩이가 만들어졌고, 브레스의 여파로 근처의 땅 전체에 서리가 내렸다.
드래곤은 황룡의 시체를 확인하기 위해 구덩이 근처로 날아갔다. 그런데 시체가 안 보였다.
[이상해! 아무리 브레스를 맞았다고 해도 시체의 일부조차 없을 수는···.]
“조심해!”
그때, 땅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황룡이 튀어나오면서 드래곤의 목을 물고 다시 하늘로 끌고 올라갔다.
기습에 놀란 드래곤은 반격도 하지 못한 채 끌려올라갔다.
한건우와 길드원들은 빠른 속도로 올라가는 드래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때, 한건우가 박이경에게 소리쳤다.
“박이경, 최대한 세게 날 때려줘!”
“오케이, 알겠수!”
박이경은 자신을 향해 점프해 오는 한건우의 상태를 확인하지 않고 풀파워로 훅을 날렸다.
한건우는 발바닥 부분으로 박이경의 거대한 주먹을 맞으면서 동시에 <페더 폼> 특성을 사용했다.
‘이걸 쓰는 날이 있네.’
몸을 깃털처럼 가볍게 하는 특성이었다.
박이경의 파워를 추진체로 하여 몸을 가볍게 하니, 한건우는 로켓보다 빠르게 하늘로 솟아올랐다.
하늘에서는 드래곤과 황룡이 싸우고 있었다.
황룡은 아까 산성 혈액을 들이마신 탓에 브레스를 쓰지는 못했고, 드래곤도 연속으로 브레스를 쏠 수는 없었다.
황룡은 고온의 불꽃을 일으켜 자신의 몸에 두르고 있었고, 한건우의 드래곤은 냉기와 뇌전으로 맞서고 있었다.
마법 능력은 팽팽한 가운데, 결국 몸싸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는 크기가 작은 한건우의 드래곤 쪽이 불리했다.
[특성 발동 : 강신]
‘아그니, 인드라. 빨리 나와라. 화염 지옥이 지루하지 않나?’
한건우는 마창 게이볼그를 꺼내, 아그니와 인드라의 신격을 받았다. 창과 한몸이 된 채로 미사일처럼 날아가는 것이었다.
한건우가 다가오는 것을 눈치채고, 황룡이 용언을 뱉었다.
[벌레만도 못한 녀석이 감히 날 노리는 것이냐!]
황룡은 드래곤에게 집중적으로 쏟아내던 화염을 분산시켜 한건우 쪽을 공격했다.
그러나 아그니의 신격을 강신한 한건우에게, 화염은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다.
[어떻게 된 거지? 인간이··· 믿을 수 없다!]
한건우가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은 채로 날아오자, 황룡은 크게 당황했다.
황룡의 비늘은 군데군데 벗겨져 상처가 드러난 부분이 있었다.
푸욱!
마창 게이볼그가 황룡의 상처 부위에 깊숙히 꽂혔다.
크롸아악!
황룡은 몸통을 뒤틀며 괴로워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드래곤 하트에 창이 꽂힌 순간.
한건우는 창끝을 통해 인드라의 뇌전을 방출했다.
파지지지지직!
인드라 신격의 뇌전이 황룡을 타격했다.
전격을 받고, 황룡의 몸부림이 뚝 멈추었다.
두근!
황룡의 커다란 심장이 크게 한 번 박동했다.
그리고 멈추었다.
치이이이···.
황룡은 내부가 꺼멓게 익은 채로 지상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건우는 창을 꽂은 채 같이 추락하다가, 공중에서 뛰어 드래곤의 등 위에 착지했다.
[아빠,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쿠우웅-
거대한 충격음이 지상에서 들렸다.